2-5 조선시대의 후기 무기
제 5 절 조선시대의 후기 무기
1. 각종무기 발달과 변천
가. 일반무기의 발달과 변천
(1) 무기의 종류
조선후기에 사용하거나 소개된 일반무기의 종류는 조선 전기에 비해서 훨씬 다양함을 볼 수 있다.
(가) 공격무기
1) 도검류
환도, 쌍수도, 왜검, 제독검, 본국검, 쌍검, 월도, 마상월도, 형도, 이인검, 삼인검, 사인검, 칠성검, 턱도, 신기만승화력도, 횃대검
2) 창 류
장창, 죽장창, 기창, 낭선, 이화창, 화창, 환자창, 도창
3) 궁시류
가) 궁 류 : 정양궁, 예궁, 목궁, 철궁, 철태궁, 고, 각궁
나) 시전류 : 목전, 철전, 예전, 편전, 동개살, 장군전, 세전, 유엽전, 장전
4) 노
5) 곤봉류 : 곤봉, 편곤, 마상편곤, 철퇴
6) 공성무기류 : 검차
(나) 방어무기
1) 방패류 : 간, 장빈
2) 수성무기류 : 마름쇠, 거마창
(2) 무기별 발달과 변천과 분석
(가) 공격무기
1) 도검류
? 화도
조선은 정통적으로 전투에 편리한 짧은 환도가 현실에서는 요구되었다. 환도에 대한 설명은 일차적으로 조선 전기 환도조를 참고 할 수 있겠다. 환도에 관한 『무예도보통지』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명은 단도이다... 옛말에 병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칼을 말한다. 이제 와서는 진치는데 쓰지 않으니 실전되었다. 글래 변방의 관리들이 등이 두텁고 길이가 짧은 칼을 제조하기를 간청하였으며, 군사들은 편리한 이 칼을 많이 쓴다.”1)
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실정으로 국가는 병사들에게 개인 휴대무기로, 전투용인긴 환도를 지급해 주었다, 그런데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긴 것보다는 짧은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긴환도는 단병기의 대종으로 병사들에게 근접전의 무기로 지급되었으나 훈련이 부족한 병사들은 위험에 대한 공포심과 중량으로 인한 사용 불편으로 이를 기피하였다. 그러므로 일반병사들은 짧고도 가벼운 환도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의 접전 시 동원되는 무기체계의 순서를 보면 화포?활?돌로 되어 있으며, 창검과 같은 단병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단병기에 대한 준비와 훈련 및 대응책의 미비이며, 창검이 전투무기로서의 지위가 그만큼 낮았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개 병사에 있어서의 환도의 기능은 적의 살상에 최대의 목적을 두지 못하고, 사용의 편리성에 중점을 둔 기능이 강했다.
무관들은 병사와는 달리 긴환도가 사용되었다. 지휘관의 경우에 환도는 지휘용 내지 의례용의 기능이 있었기에 위엄의 표시로 길어졌던 것이다.
? 쌍수도
본명은 장도인데 용검, 평검으로 속칭 되었다. 후에는 양손으로 잡고 사용한다 하여 쌍수도라 불리어졌다. 조선 전기에는 쌍수도가 실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조선후기에는 중국의 영향과 일본에 대응하면서 일부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조선은 일반적으로는 이를 제작하지 않고, 중국으로부터 수입했으며, 특별한 경우에만 제작되었다. 『무예도보통지』에도 중국의 제도만이 실려 있을 뿐이다. 중국에서도 예전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제작되었다가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주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이 쌍수도는 왜구가 장기로 여겼던 무기였다.
? 왜검
왜검에 대하여 『무비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도는 길이가 동일하지 않다. 사람마다 장도 한 자루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패도라 한다. 그 칼 위에 또 한 개의 작은 칼을 꽂아 두어서 편리하게 잡용에 쓴다. 또 삭도가 있는데 길이가 1척이 되는 것을 해수도라 하고, 길이가 1척이 넘는 것을 급살이라 한다. 자도의 세가지 종류는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필요에 따라 작음을 막론하고 반드시 자루 위 한 면에는 칼 이름을 새기고, 한 면에는 장인의 이름을 새겼다. 이것은 고금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을 판별하기 위한 것으로 창과 칼에 이용되었다. 일본의 상고도라는 칼은 산성군이 각 섬들의 유명한 장인들을 모두 모아서 창고 안에 가두어 두고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정성을 다해서 정교하게 만들었던 칼이었다.“
? 제독검
제독검은 예도와 동일한 종류의 요도이다. 임진왜란 때에 제독 이여송이 조선에 출전했을 때 통진의 굼 씨의 딸을 취하여 시녀로 삼았다. 몸에 지니고 있던 칼을 징표로 주면서 떠날 때 이르기를 ‘아들을 낳으면 천근이라 이름하라’ 고 하였다. 과연 천근을 낳아서 천근의 자손이 많이 거제에 살고 있다. 1746년에 통제사 이언상이 이 천근의 현손 무춘을 찾아 그 일을 칼자루와 칼집에 새기고는 그 칼을 다시 제독의 집안에 돌려 주었다.
? 검류
조선후기의 검은 조선전기와 동일하게 의장용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의장 혹은 의례적인 성격은 그 상징성을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제작 일시나 혹은 문양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러므로 제작 일시에 의한 이인검, 삼인검, 사인 검이나 혹은 보검, 칠성검 등이 있었다.
2) 창류
? 장창
임란 직전의 조선군의 창은 1597년 조선에 왔던 왜강광이 “너희들 창 자루가 너무 짧구나.” 라고 지적한 대로, 조선 초기에 길었던 창의 길이가 상당히 짧아지게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임란기를 통해서 조선군의 창 제도는 조 초기의 제도와 중국식의 영향을 받아 길어지게 되었다. 길이에 있어서 조선 초기보다 길고 중국식과 동일한 1자5척이 되었다. 창날의 길이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나, 중국식보다는 길고, 창 날 부분이 기창식과 동일한 형태이므로 9촌으로 추론이 된다. 중국식은 창날의 형태에 있어서 창날 쪽으로 갈수록 점차 가늘게 하였다. 조선식은 창날에 혈조(창날에 움푹 파인 것을 말함), 창 날 아래 부분에 작은 석반을 대고 창 자루 위에는 희고, 검고, 붉은 세 층을 서로 사이를 두고 칠하였다.
창 자루의 나무 재료로는 일반적으로 딱딱한 나무의 동체를 제일로 삼았으며, 다음으로는 나무를 쪼개서 댄 합목을 사용했다. 연하고 쉽게 굽어지는 가문비나무나 대나무는 피하였다.
? 기타 창류
『융원필비』에 보면 『무예도보통지』와는 다른 특수한 별도의 무기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 중에서 창류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화약을 이용한 창류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융원필비』의 무기는 중국의 무기서인 『무비지』의 내용을 초략해서 소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들 무기가 그대로 제작 사용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4) 궁시류
1566년 8월 유학 하응익이 “우리나라는 궁마의 기술을 숭상하여 수?당의 위협에 겼는데, 조종의 헌장은 무사를 포수의 하위로 대접하고, 궁마를 용검의 뒤로 천대하니 무사 가운데 분개하는 사람은 팔을 끊어 활쏘기를 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여 당시에 궁술이 용검과 화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처짐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궁술의 장려를 주장하고 있다. 비록 궁술은 척계광의 신법에 의해 삼수병제 가운데 포수(화포병)와 살수(창검병) 외에 사수(궁병)가 있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포수의 중점적인 육성은 궁술의 상대적 쇠퇴를 초래하였다.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각 궁으로는 간각염궁이 있다. 각 궁의 단점은 습기에 약한 점이 있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 전기에는 죽궁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를 더욱 보완하여 흑칠을 사용하였기에 염궁 혹은 합죽이라고도 불렀다.
? 노
노는 화기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용된 방호무기로 이에 대한 관심으로 1727년(영조 3)에 『노해』가 저술되었다. 노는 통상 하나씩 사용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개의 노를 1명이 발사할 수 있도록 연노의 법을 쓰기도 하였으며, 육전에서 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는 궁술의 쇠퇴와 더불어 그의 제작사용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그 명백마저요 상실된 상태였다.
5) 공성무기류
조선후기에도 차전과 유사하지만 차전의 단점을 보완시킨 검차의 제작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검차는 길이가 9척이 되는 두 개의 나무를 가지고 수레 채를 만든다.
두 수레 채의 중간 부분에 각각 바퀴 하나씩을 달아 속에 넣어 두었다가 수레를 끌고 갈 때에는 두 개의 바퀴만을 사용하고, 수레를 멈추고 있을 때에는 속에 넣어 두었던 두 바퀴를 내려 네 바퀴를 이용하게 한다. 수레 위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진열하고, 짐승의 얼굴을 단 방패 속에서는 신기전에서 화기가 뿜어 나오게 만들었다. 검차 1대에는 25명의 병력을 배치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포수 2명과 대장 2명은 대포수를 겸하여 대포를 장진하고 발사하는 것을 전적으로 책임진다. 검차의 양 옆에는 각각 병사를 10명씩 배치하여 한결같이 검차의 수레를 끼고 싸우게 한다. 이들 10명에게 지급해 주는 무기는 1번과 2번은 방패와 요도, 3번과 4번은 창과 활, 5?6?7?8번은 조총과 요도, 9번과 10번은 화전과 당파를 지급한다. 그리고 검차의 총책임자인 거정(車正) 1명이 수레 위에 서서 좌우로 독전한다.
(나) 방어무기
1) 방패류
? 간?장패
조선 전기에서 본 바와 같이 간이라고 불리는 방패로 그 모양이 보병용은 사각형이었으며, 기병용은 원형이었다. 조선 후기에 기병용의 원형의 간은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보병용은 장패라고 불리게 되었다. 장패는 길이에 있어서 6척9촌으로 종래보다 1척7촌이나 길어지고, 너비에 있어서 위는 종래와 비슷하나 아래가 좁아짐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방패가 장방패로 길어짐은 보병들의 다리까지도 방호 할 필요가 있어서 길이가 길어지고, 아래가 좁아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 등패
등패에 관해서는 『무예도보통지』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래된 거친 등나무로 손가락 크기만한 것을 재료로 사용하여 골등이나 대껍질로 촘촘히 싸고 중심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안쪽은 비어서 여러 개의 화살이 날아들어 와도 손이나 팔에는 닿지 않는다. 원둘레가 처마같이 높이 솟아 나와서 화살이 새어 들어와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 등나무로 아래와 위에 두 개의 고리를 만들어서 잡게 되어있다. 병사마다 하나의 방패와 하나의 요도를 잡는다. 요도 대신에 한 손에는 표창을 쥐고 상대편에 던진 후에는 반드시 급히 칼을 뽑아서 응대해야 한다. 오늘의 제도에 등패는 직경이 3척7촌으로 앉아서 몸을 숨기기에 부족하다. 조금만 더 넓히면 중국식과 같다. 또 지금의 식은 손으로 쥐는 곳에 부드러운 뽕나무로 만드니 중국제와는 다르다.”
2) 수성무기류
조선 후기에 사용된 수성무기류는 조선 전기와 동일한 수준의 마름쇠가 주류였다. 이외에도 기병들의 출입을 박는 거마창을 제작 사용하기도 했다.
2. 조선중기 화약무기의 발달과 변천
(1) 화약무기의 변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인의 조총은 총신이 길어서 그 구멍이 깊기 때문에 폭발력이 맹렬하다. 그러나 우리의 승자총통이나 쌍혈총통 등과 같은 총통은 총신이 짧고 얕아서 그 맹렬함이 조총만 못하고 그 소리가 웅장하지 못하다.”
라고 지적한 것과 같이, 조총은 당시에 조선이 최신예 소화기로 가장 중시해 오던 승자 총통을 능가하는 무기였다. 이에 조선은 일본군의 조총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하였다.
정부는 전화를 입지 않아서 비교적 재력이 충실한 전라도 병영과 수영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서 조총을 제조케 하였다. 그 중 이순신이 1593년 9월 중순에 조총을 제조하는데 성공하였다. 『난중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쇠로 만든 총통은 전쟁에서 가장 긴요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더니 이제 온갖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을 만들어 냈다.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해 보고는 왜 총보다 더 잘 만들어졌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미 그 비법을 알았으니 도내에 같은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좋겠기로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도 공문을 들리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중앙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조총을 제조하게 되었다. 조총과 함께 삼용 총 및 철환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에 조선의 포수는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지만 조총의 생산량이 뒤따르지 못하자 제도의 각 읍에 월과 조총 수를 배당 시켜 생산량을 확대하였다. 조총의 생산량은 증가하여 전국의 연간 조총 생산량의 도합 약 3,400여 정에 달하였다. 당시의 조총의 1정당 가격은 포목 1필에 해당되었다.
(2) 무기의 종류와 무기별 발달 변천과 분석
조선 중기의 화약무기는 임진왜란 전후에 만들어진 화약무기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시기적으로는 1500년부터 1700년 사이에 제작되어 사용된 각종 화약무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의 화약무기에 관한 자료들은 1603년 편찬된 『신기비결』 1615년 편찬된 『화기도감의궤』, 1635년 편찬된 『화포식언회』 등이 있다.
(가) 총통
총통은 크게 대형화기, 완구, 소형화기, 그리고 외국의 것을 모방하여 만든 외국형화기로 크게 나누어 분석하여 보았다.
1) 대형화기
대형화기의 종류에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대형화기들은 외형상 크게 두 번 바뀌는데 첫 번째는 1555년부터 1595년 사이에 제작된 총통들로 세종 대의 총통(제1세대 총통)들과 같이 마디가 대마디처럼 단순하게 생긴 단순 마디형인 제2세대 총통과 1596년부터 1668년 사이에 제작된 총통들로서 띠 위에 마디를 올려 놓은 마디 띠형의 제3세대 총통으로 나눌 수 있다.
? 전자총통
가) 천자총통 - 1
현재 유물로 남아 있는 천자총통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명종 10년(1555) 10월에 주조된 제2세대 총통이다.
이 천자총통의 길이는 129㎝, 부리의 내경이 13㎝, 외경이 22.5㎝, 무게 296kg의 청동으로 만든 총통이다. 마디는 세종 때의 총통처럼 원통형 총통의 주위에 있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형태로 10개의 마디가 있다. 손잡이는 2개가 있으며 격목통 부근에 마디 두 개가 서로 붙어 있는 것과, 약통부분에 마디가 있는 것이 세종 때의 총통과는 다른 제2세대 대형총통의 특징이다.
나) 천자총통 - 2
현재 아산 현충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천자총통의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제작 연대에 단순히 기유라고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며 기유해는 60년마다 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느 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에 현존하는 대형총통 중 기유해에 제조되었다고 기록된 총통은 천자총통이 1개, 현자총통이 1개 그리고 별황자총통이 2개 등 대형총통 중에서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이들 기유명 총통들은 그 동안 조선 후기에 제조되었다고 추정하였다.
다) 지자총통 - 1
국내에 현존하는 지자총통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육군박물관에 소장된 지자총통(보물862호)으로서 명종 12년인 1557년 3월에 주조된 것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지자총통이다. 육군박물과의 지자총통과 동아대학교의 지자총통은 크기와 형태가 똑 같은 제2세대 총통이지만 육군박물관의 지자총통은 두 개의 손잡이가 훼손되었다.
크기는 전체길이 89.5㎝, 부리의 내경이 10.5㎝, 외경이 15㎝이다. 마디는 전부 10개인데, 약통을 시작하는 곳에 2개의 쌍 마디가 있으며, 약통에 2개의 마디가 있으며, 부리와 격목통에 모두 6개의 마디가 있다. 무게는 73kg이며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라) 지자총통 - 2
동아대학교 지자총통은 1969년 10월 9일 김올규 씨가 경남 창원시 내서면 금성리 신성에서 채석작업 중 발견한 것이다.
이 지자총통은 육군박물관의 것과는 달리 파손된 곳이 없이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1557년 4월 주조된 것이다. 마디는 모두 10개이며, 격목통과 약통 사이에 있는 쌍마디를 중심으로 약통인 뒤쪽에 2개의 마디가 그리고 격목통과 부리가 있는 한쪽에 6개가 있다. 이 지자총통 역시 격목통과 약통이 사이에 두 개의 마디가 붙은 쌍 마디가 있는 제2세대 총통이다.
점화구멍은 뒤에서 첫째마디와 둘째마디 사이에 24개가 있다. 화약은 20량을 사용하였고, 새알같은 크기의 철환200개나 장군전 1발을 발사하였는데 사정거리는 800보였다. 전체길이는 89㎝, 부리 내경은 10.5㎝, 외경 17.2㎝이다. 2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 현자총통
가) 현자총통 - 1
『화기도감의궤』의 현자총통과 비슷한 총통은 진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제2세대현자총통이다.
총통은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유로서 1983년 8월 거제도 고헌 앞바다에서 준설작업 중 발견한 것이다. 이 현자총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 7월 청동으로 주조된 것으로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현자총통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길이는 79㎝, 부기의 내경은 7.5㎝, 외경 13.5㎝이다. 부리와 약통 사이의 마디는 모두 8개이며, 한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나) 현자총통 -2
1976년 3월 3일 잠수부 문동일 씨가 노량 앞바다에서 조개를 채취 중 발견한 것으로 체길이 84.3㎝, 부리 내경 5.8㎝, 외경 11㎝, 무게 38kg이다. 형태는 전통적인 형식으로 부리통과 격목토에 모두 9개의 마디가 있으며 약통부분은 부리통과 격목통부분보다 더 두껍게 제조된 제2세대 총통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총통은 부리의 내경이 5.8㎝인 점으로 보아 현자총통급으로 보이는데 총통의 이름이나 종류에 관련된 명문은 없으며 다만 제조연대를 알 수 있는 “만력”만 확인 할 수 있으므로 제조연대는 1573년부터 1619년 사이에 제조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새로운 형태의 총통이 등장하는 1596년쯤으로 추정된다. 현재 해사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다) 현자총통 - 3
육군박물관에 소장된 현자총통으로서 철로 제조된 것이다. 당시의 각종 총통들이 청동으로 제조된 것과 비교가 된다. 모양은 제3세대 총통으로 기유년인 16.9년 제조된 것으로 부리의 첫마디 다음에 작은 쌍띠가 있는 전형적인 제3세대형 총통이다.
오래 전에 남한산성에서 수집된 것으로 전체길이 95.5㎝, 부리의 내경 6㎝, 외경 15.3㎝이다. 총통에 무게 190근이라는 기록이 있다. 마디는 모두 11개이다.
라) 현자총통 - 4
제3세대 현자총통으로 조선후기의 총통과 같은 형식의 총통이다. 기유년(16.9)에 제조된 제3세대 총통과 다른 점은 총통의 앞부분, 즉 첫 마디와 둘째 마디 사이에 쌍띠가 없는 점으로 1815년 편찬된 『융원필비』에 나오는 현자총통과 거의 같은 형식이다. 현자총통 - 4는 1668년 제조된 것으로 이 시기에 대형포의 제조 감독으로 많은 활약을 하는 신기립의 작품 중 하나이다. 부리의 직경56㎜이며 전체길이는 810㎜이다. 청동으로 주조되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있으며 무게는 96근이다.
? 황자총통
가) 황자총통 - 1
1587년 청동으로 주조된 제2세대 황자총통으로서 부리의 내경이 4㎝, 외경 8.4㎝, 전체길이 50.4㎝이며, 부리에 6개의 마디가, 격목통의 뒤에 한 개의 마디가 있다. 손잡이는 1개가 있으며, 형식은 세종대의 제1세대 총통과 같은 양식이다. 몸통에 무게 31근8량이라고 적혀 있다. 현재 제3세대 황자총통은 남아있다.
? 별황자총통
가) 별황자총통 - 1
1992년 8월 20일 해군의 충무공 해전유물 발굴단에 의해서 남해안의 통영 군 한산도 근처에서 인양된 별황자총통으로서 임진왜란 중인 1596년 청동으로 주조된 것이다.
제 3세대 형식의 총통 중에는 가장 빠른 시기에 제조된 것이다.
형태는 제3세대 형식의 특징인 주물의 상태가 1?2세대의 것보다 정교하고, 부리통과 격목통 사이에 있는 마디가 얇은 띠 위에 각각 놓여져 있고, 부리의 둘째 마디가 좁은 마디 2개로 된 쌍 띠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별황자총통은 불랑기처럼 약통의 뒷부분에 손잡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총 길이는 89.5㎝이고, 부리의 내경 5.8㎝, 무게 65.25kg이다.
명문 중 거북선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사용한 곳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는 아주 귀한 청동이다. 현재 해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옛 화약병기 중에서는 처음으로 1993년 9월 국보 274호로 지정되었다.
나) 별황자총통 - 2
별황자총통 - 1과 같은 형식인 제3세대 별황자총통으로서 기유년인 1609년 청동으로 주조된 것이다. 형태는 별황자총통 - 1과 같으며, 길이는 89.2㎝, 부리 내경 5.9㎝이다.
구조는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져있다. 즉 발사 물을 끼우는 부리, 토격이나 격목을 박는 격목통, 화약을 넣는 약통, 발사각도나 방향을 조절할 때 잡는 명철 등이며, 외견상으로는 죽절 부분(부리와 격목통), 무죽절부분(약통), 병철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현재 육군박물관 소속으로 전시되고 있다.
다) 별황자총통 - 3
별황자총통 - 1, 2와 같은 형식으로 기유년인 1609년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진주박물관 소장으로 수철로 만든 정철이 끼워져 있다. 전체길이 88.8㎝, 부리의 내경 5.8㎝이다.
2) 완구
세종 때의 완구종류는 총통완구 한 가지였는데, 중기에 접어들면서 대?중?소?소소 완구 등 네 가지로 나뉘어 발견되었다.
3) 소형총통
? 승자총통
승자총통으로 선조 초기에 김지가 전라좌수사로 재임시 창안하여 만든 것으로 세종 때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소총의 단점을 개량하여 발전시킨 총통이다.
즉 총의 부리를 길게 하여 사정거리를 늘리고, 명중률을 높인 것이다. 승자총통의 종류에는 승자총통, 자승자총통, 소승자총통, 상승자총통 등이 있었으나 김지가 몇 종류의 승자총통을 개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나) 발사물
1) 비진천뢰
? 비진천뢰 - 1(보물 860호)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수철로 만들었으며, 그 형태는 공과 같이 둥근 형태다. 직경은 2~21㎝이며, 윗부분에 가로 7.6㎝, 세로 8.4㎝의 사각구멍이 있고, 그 속에 직경 5.1㎝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리고 옆구리에 직경 2.5㎝의 구멍이 뚫려 있다.
? 비진천뢰 - 2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중인 것으로 직경 20㎝의 공 모양이며 주철로 만들었다. 위에는 가로 6㎝, 세로 4.5㎝, 4각 구멍이 있으며, 전남 장성 석마리에서 나온 것이다.
3. 조선후기 화약무기의 발달과 변천
(1) 화약무기의 변천
19세기의 조선 왕조, 특히 순조, 현종, 철종의 3대에 걸친 조선의 정치와 사회는 이른바 세도정치로 인하여 왕조 자체의 통치질서는 문란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국정이 문란한 가운데 화기의 개발이 촉진될 수는 없었다.
참고로 대표적인 화기의 전체 수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총 42,530자루, 기타 총류 1,421자루, 대포류 6,354자루, 화차 187승, 선환 6,372,630개, 화약 343,675근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량면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되나 실제의 보유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전투시에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군대의 인적 자원인 농민이 극도로 피폐되어 자주 육군과 수군의 군사훈련이 정지되었으며, 화기의 보수와 사격훈련은 소홀히 되는 현실이었다.
기존의 화기도 현상유지조차 어렵게 만든 군정의 해이와 재정의 궁핍은 새로운 화기의 개발을 위한 시도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2) 무기의 종류와 무기별 발달, 변천과 분석
조선 후기의 화약무기는 1700년 이후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 사이에 제작되어 사용된 각종 화약무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의 화약무기에 관한 자료들은 1813년 편찬된 『무항비전』과 1868년경 편찬된 『호국신도군기도설』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이며 박물관에 현존하는 후기의 각종 포에 대한 연구도 앞으로 좀더 진행되어야 한다. 이 연구에서는 『융원필비』에 기록되어 있는 화기 중 현존하는 화기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가) 총통
『융원필비』에 기록된 대형화기로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대완구,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 등인데 이 중 현존하는 화기는 황자총통과 대완구가 있으며 『융원필비』에는 없는 대형화기는 불랑기와 중포, 소포 등이 있다.
? 재래식 화기
가) 천자총통
조선후기의 천자총통은 융원필비에 설명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것은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
융원필비에 의하면 천자총통은 길이 6척6촌3푼이며, 부리의 내경 5촌6푼의 대형 총통으로 무게는 1,209근이다. 청동으로 제조하였으며, 한번 발사에 사용한 화약은 30량이다. 50근짜리 대장군전을 발사하면 1,200보를 날아갔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총통 중 초대형 포이다.
나) 지자총통
『융원필비』에 의하면 지자총통은 기이 5척6촌7푼, 부리의 내경 5촌이며, 무게는 74근이다. 20량의 화약을 싸서 200개 또는 무게 33근짜리 장군전을 800보 이상 날려 보낼 수 있는 성능이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 현자총통
융원필비에 의하면 현자총통은 길이 4척1푼, 부리의 내경은 2촌9푼이며, 무게는 155근이다. 4량의 화약을 써서 철환을 사용하면 한번에 100개를 쏠 수 있다.
라) 황자총통
순조12년인 1812년 주조된 것으로 전체길이 885㎜, 부리내경 44㎜, 무게 130근이다. 총통의 중간을 포가에 걸어 상하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돌출부위가 있다.
1. 근대식 화기
근대식 화기는 서양포와 같은 구조와 모양으로 제조된 화기를 말하는 것으로 소포와 중포가 있다.
소포와 중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실물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소포와 중포는 바퀴 두 개 달린 포가에 설치하여 이동하여 사용하는 경우와 해안가의 포대에 고정포대를 설치하고 포를 설치하여 사용하는 두가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가. 소포
소포 역시 이동식 포가와 고종식 포대에서 사용하였는데, 주로 고종 11년인 1974년 운형궁에서 제조된 것들이다.
포의 부리 직경은 81~84㎜이고, 길이는 1085정도이다. 포의 몸통 중간에 포가나 포대에 고정시킬 수 있는 돌출부이들이 있고, 제일 뒤에는 손잡이가 있다. 청동으로 제조하였으며, 무게는 200~280근 정도이다. 한번 발사에 사용한 화약은 1근이다.
나. 중포
중포도 소포와 마찬가지로 이동식 포가나 고정식 포대에 설치하여 사용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종포는 1874년 운현궁에서 제조된 것들이다.
제원은 포의 비리내경 120~125㎜정도이고, 전체길이 1,120~1,230m 그리고 무게는 390~492근 정도이다. 한 번에 사용하는 화약의 양은 1근 9량이다.
----3) 소형화기
소형화기의 종류도 확실히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가장 많은 종류이다.
? 조총
조총은 임진왜란 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실제로는 임진왜란 등에 제조하여 사용한 듯한데 구체적인 것은 알 수가 없다. 특히 조총은 국산조총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남아 있는 조총들을 시대별로 구별하기도 쉽지 않고, 또한 조총 자체에 자료가 될 만한 명문이 남아있는 조총도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부터 국내에는 국산조총, 일본제 조총에 대하여 정확하게 조사되지 않았는데 약 30여종정도이며, 개머리판 없는 총신만도 10개 정도이다.
일반적인 조총의 부리내경은 15~20㎜정도이며, 길이는 1.2~1.8m이다.
4) 기타 화기
이름을 확인 할 수 없는 많은 종류의 화기들이 남아 있지만 아직 종류를 정확히 확인 할 수 있는 자료와 방법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 조선청통구조 발사방법
1) 내부구조
총통을 크기별로 분류한다면 대형총통과 소형총통으로 나눌수 있으며, 그 기준은 사람이 손으로 들고서 발사물을 발사할 수 있는 총통을 소형총통, 그리고 그 외의 것을 대형으로 나누었다.
가) 소형총통
소형총통의 특징은 조총과 같이 손잡이로 사용할 손잡이용 나무를 장치할 수 있게 되어 있든지 아니면 손잡이용 나무를 끼울 수 있는 점이다.
소형총통의 종류는 병기도설에 기록된 것만도 이총통, 삼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팔전총통, 세총통 신제총통, 그 외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대표적인 것으로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등이 있다.
이러한 총통의 내부구조는 현존하는 소형고총통을 실측하고 총통 관계기록을 분석해 본 결과 조선 총통의 내부구조는 무격목형, 격목형, 토격형총통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나) 대형총통
대형총통은 세종시대의 장군화통, 일초옹, 총토완구 등이며, 1555년을 전후하여,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별화자총통,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 등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대포, 중포, 소포 등이 있었다.
대형총통의 내부구조는 조선 후기의 대포, 중포, 소포 등은 토격형의 구조이며, 그 이외의 총통 등은 격목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대형총통의 내부구조가 격목형인 이유는
① 대형총통에서는 전을 많이 사용하므로 격목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② 격목형 총통에서는 격목대신 토격을 이용하여 탄환을 발사할 수도 있고, 완구와 같이 환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환이 크기 때문에 토격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후기에 접어들어 토격형으로 내부구조가 바뀌는 것은 대포, 중소, 소포가 외국의 포를 모방하여 제작한 시스템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 발사방법
가) 무격목형 총통
고려 말부터 세종 27년까지의 총통들의 발사방법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격목형 총통의 발사방법을 참고로 추정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총통 속을 청소
② 점화선을 총통의 약통에 있는 점화선 구멍에 끼운다.
③ 약통에 화약을 채운다.
④ 화약을 다지고
⑤ 그 위를 종이로 덮고
⑥ 화살을 끼우고
⑦ 점화선에 불을 붙이고
⑧ 겨드랑이 사이에 총통의 자루를 끼고 두 손으로 잡고 조준하여 발사
등의 순서이며, ⑦에서는 ①부터 다시 반복하여 진행하면 될 것이다.
나) 격목형 총통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총통구조이다.
총통의 발사방법은 1603년 편찬된 『신기비결』에 기록되어 있다.
① 총통의 내부를 쓸고 씻는다.
② 점화선을 넣는다.
③ 화약을 넣는다.
④ 종이를 내려보내 화약 위를 덮는다.
⑤ 화약다지는 나무로 화약을 가볍게 다진다.
⑥ 격목을 집어 넣는다.
⑦ 화약다지는 나무를 이용하여 격목을 힘주어 다진다.
⑧ 탄환을 집어넣고 흙으로 덮는다.
⑨ 총통의 종류에 따라 몇 층씩 반복한다.
⑩ 총통 입구에 맞는 큰 탄환을 하나 집어넣은 다음 나무로 다진다.
이와 같은 발사준비가 끝나면 총신을 평평하게 바로잡은 다음 화약선에 불을 질러 발사한다. 위의 총통 발사 순서는 포환을 발사하는 경우이고, 화살을 발하는 경우에는 격목통에 격목을 다진 뒤 총의 부리에 발사무인 화살을 장진하여 발사하면 된다.
다) 토격형 총통
토격형 총통은 일반적으로 승자총통 등 소형총통인데 위의 발사순서 중 격목을 박는 대신 흙을 넣고 다질 뿐 다른 순서는 같다.
1) 『무예도보통지』 권2 설도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