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근대의 무기
제 6 절 근대의 무기
1. 대원군의 무기개발
1836년 12월, 고종의 즉위와 더불어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내외의 도전에 대처하여 안으로는 유교적 민본정치의 부흥과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밖으로는 열강의 도전과 침략을 배격하는 쇄국양이책을 강행하였다.
포군 및 총군의 강화에 따른 화기수요의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고종 4년 1월과 9월에는 화기 등 무기전반을 제조 또는 수리하게 하였으나 쇄국하에서는 외국선진기술의 도입이 저해될 수밖에 없어서 신식무기의 개발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다만 고종 4년(1867년) 9월, 훈련대장 신관호가 「해국도지」에 실려있는 것을 본따서 수뢰포를 제조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신미양요가 일어난 고종 8년(1871) 현재 어영청이 보유한 화기를 볼 때 대원군의 무기 정비를 위한 다방면의 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시 양국의 무기 현황>
국 가 |
무 기 체 계 |
비 고 | |
병인양요 |
한 |
조총, 화포, 도검, 궁시류, 창 |
구장식유통형화기 |
불 |
소총:구장식소총, 뇌관격발식소총 화포:유탄포(1837년부터 사용) |
1840년경부터 뇌흥뇌관을 격침으로 때려서 발화 | |
신미양요 |
한 |
구장식유통형화포(200여문), 도검, 창, 궁시류 |
모든 무기면에서 성능 열세 |
미 |
- Starr소총(대검착검) - 7연발 Spencer소총 - Remington소총 - 후발식 강선포(85문) ․ 8인치포 ․ 9인치포 |
남북전쟁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화기로 장비한 정예병 |
두 차례에 걸친 양호의 격퇴는 아직 조선에 대한 무력진출을 본격화할 여유를 갖지 못했던 프랑스와 미국이 우선 무력시위를 통해서 통상의 목적을 달성하려다가 실패하자 더 이상의 침공을 단념한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대원군의 집권이래 강력히 추진된 군비강화의 노력이 어느 정도의 결실을 거두어 프랑스나 미국이 예상외의 저항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대원군집권시 제조된 무기>
년 도 |
무 기 |
내 용 |
고종 4(1867) |
수뢰포제작 |
-해국도지에 실려있는 것을 본딴 것 |
고종 11(1874) |
소포, 중포제작 |
-양륜이 달린 포차위에 설치 -포신의 상하조정 가능 -청동제 구장식 유통형화포 |
또한 대원군 집권기의 군비강화책에 힘입어 화약병기기술도 크게 발달하여 고종 11년(1874)에는 국산주조화포로서는 가장 근대적 소포, 중포가 제조되었다.
이 소포와 중포는 청동제로서 포신의 주조술이 매우 숙련되어 있고, 죽절도 2개조에 불과하며, 포차위에 설치하여 기동력을 보유하였고, 포신을 상하로 움직여 사거리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대원군이 집정한 10년간에 걸쳐 우리나라의 화기는 그 나름대로 크게 발달하였지만, 세계적인 화기발달의 추세에 접근하기도 전에 일본에 의해 개국을 강요 당했으며, 이를 계기로 열강세력의 유입으로 자주적인 화기의 발달을 저해하게 되었다.
2. 개화기 무기개발을 위한 노력
일본의 근대화된 군사력에 의해 오랫동안 굳게 닫아왔던 문을 열게된 조선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문명과 근대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강병책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18년(1881) 1월,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11월말에는 38명의 유학생을 청에 보내어 선진문물을 학습하고 이듬해 11월 귀국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근대적인 병기공장을 설치할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유학생의 유학기간이 1년에 불과하고 그 학습성과도 보잘 것 없어서 이들의 기술만으로는 병기공장을 설치 운영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병기공장은 고종 20년(1883) 4월, 중국장인 4명을 고용해 서울 삼청동 북창에 기구창을 설치하고 중국공장들로 하여금 무기제조법을 교습케 함으로써 발족을 보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임오군란이후 조선은 부분적이나마 일본의 군사기술을 도입하면서 주로 청의 군제와 기계를 받아들여 강병책을 추진하여 그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조선의 무비자강 노력에 편승하며, 자국의 노력을 진출시키려는 청․일을 비롯한 열강의 책략으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또한 조선정부는 고종 25년(1888) 2월, 미국퇴역군인 수명을 군사교관으로 초빙하여 사관양성을 위해 설립된 연무공원에서 군사교육을 시키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정부는 격변하는 정국속에서도 강병책을 꾸준히 추진하였으나 재정의 궁핍, 외세의 간섭, 지도력의 부족 등으로 구심점이 없는 빈번한 정책변화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군사훈련방법 및 군편제가 일본식, 청식, 미국식, 러시아식으로의 잦은 변경으로 전투력을 강화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기구국도 기술의 미숙과 재원부족으로 근대적 무기생산체제를 완비하지 못하여 조선군은 여전히 구식의 화승총을 주무기로 사용하였다.
3. 동양 삼국의 근대화 준비
19세기에 접어들어 조선, 일본, 중국의 동양3국은 근대화된 서양물결을 타고 급속의 물결속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중국은 1840년의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는 패배를 맛보았으며, 영․불연합군에 의해 침공을 받아 결국은 천진조약과 애훈조약을 체결하고서야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작업이 시작되었고, 일본은 1853년의 미국군함에 의해 강압적인 수교를 하게 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근대화의 흐름에 순항하는 행운을 안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유독 근대화의 흐름에 역류하는 조선만은 중국보다는 8년, 그리고 일본보다는 무려 21년이나 앞선 1832년에 서양의 신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였다. 1863년 고종의 즉위와 더불어 등장한 대원군의 부국강병을 위한 노력이 있었기는 하지만, 병인․신미의 양요와 운양호사건, 임오군란, 동학혁명, 갑오경장, 을미사변 등 일련의 사건에 시달려야 했다.
4. 한일 의병전쟁시 무기
가. 한국군의 해산 및 항일전
군대가 일제의 강요로 해산되던 날(1907.8.1) 시위보병 제1연대 1대대장의 자결은 울분에 떨던 해산당한 한국군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사병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반납한 총기와 탄약을 되찾았고, 이어 제2연대 1대대의 병사들에게 알려져 이들도 항쟁 대열에 합세하여 일본군과 시내도처에서 시가전을 벌였는데, 항일한국군의 병력은 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이에 서울에 포진한 전일본군에게 전투명령이 하달되어 항일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기관총을 가졌고, 훈련이 우수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포로로 붙잡힘으로써 시위대의 대일항전은 일단 끝났으나, 이같은 항전은 지방에까지도 확산되어 대일전쟁은 계속되었으나, 중과부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해산된 장교 및 사병들은 지방에 내려가 의병으로 전환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그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다.
이와 같이 군대해산 이후의 의병활동은 중앙의 시위대 및 지방의 진위대 출신의 군인들이 다수를 차지하여 각 지방에 분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점점 의병의 숫자를 증가시켜 좀더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한일 의병전쟁을 전개해 나갔다.
나. 의병들의 무기
강제해산된 구한국군은 각 지방에 흩어져 각 지방의 의병들과 같이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독립적으로 국지적인 전투를 수행해서는 힘이 미치기 어려움으로 각지방의 의병들은 연합하여 연합작전을 수행하기로 연락을 취하고 서울 수복을 위한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호소문을 보내고, 또한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Manifesto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을 보낸 후 서울로 진격을 개시하였으나,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군은 선제공격을 해옴으로써 의병들은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영세농민의 오랜 국외 이민지였던 간도와 노령 연해주는 이제는 항일투사들의 망명처이기도 했다. 노령은 어느 곳보다도 강력한 무장투쟁기지 였는데, 총기의 민간인 소유가 공인되고, 총기 탄약의 매매도 자유로운 노령을 많은 의병들은 무기구입차 찾아들었다.
노령의병들은 노일전쟁 당시 한국전선에서 싸운 러시아군 퇴역장병과 제휴하여 그들의 후원하에 대규모의 국내침공작전을 시도하였으나 그들의 작전은 국경선 일대의 일본수비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한때 기세 드높던 의병들의 항일전쟁은 점차 종식되어 갔고, 훈련과 장비, 병력수 등 모든 부분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의병은 일본군과 대결함으로써 전과보다는 손실이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병과 일본군은 무장하고 있는 기본화기에 있어서, 시대적인 차이가 2세기에 가까워서 「의병 100명이 일본군이나 경찰 10명을 능히 이겨낼 수 없다」는 일본측 보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한국민의 무장봉기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현대무기의 제조나 수입을 철저히 봉쇄하여 구한말 한국군에게 공급된 소총은 낡은 것(29식 소총)으로서 일본군의 그것과는 현저한 화력의 차이가 있었고, 탄약고 또한 일본군에 의해 철저히 관리 및 통제되었다. 의병이 가지고 있는 기본화기는 화승총이었고, 심지어는 구식대포와 궁시, 도창, 곤봉, 돌 등을 사용한 실례도 많았다.
이에 비하면 일본군은 1905년(명치 38년)에 제작된 38식 소총(1936년-일본기 2599년-38식 소총을 개량하여 99식 소총을 개발, 제2차 대전말까지 사용)인 최신소총이었고, 필요에 따라서는 기관총도 동원하는 예가 많았다.
<피아소총의 성능비교>
소 총 |
유효사거리(m) |
사격속도(발/분) |
특 징 |
화승총 38식 소총 |
73 400 |
10 |
구장식유통형 후장식강선식 |
※ 자료: 박성수, 독립운동사연구, p.240.
이러한 최신무기를 갖춘 일본군 앞에서 의병들은 먼저 화승에 불을 붙여들고 다른 한 손으로 철환과 화약을 총강 안에 비벼 넣어 사격하는 구식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다. 그나마도 모든 의병이 다 화승총으로 무장하지도 못하였고, 또 화승총은 비가 내리면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을 지녔었다. 게다가 1907년 9월 23일부터 단속되기 시작한 일본의 소위「총포 및 화약단속법」에 의해 11월말까지 약2개월간에 걸쳐 전국에서 한국인 소유무기의 압수소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수년 동안이나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운 의병들의 감투정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의병 중 일부는 진압 체포되었고 일부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피하여 점차 만주대륙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한일합병 이후 주권과 영토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국내에서의 항전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외로 탈출하여 보다 조직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그들의 행동 양상을 전환시켜 나갔다.
다. 의병들의 화약 및 화기제조
화승총은 그 제작이 쉬웠고 철환 및 화약의 조달이 용이하여 의병들 가운데에는 자체 생산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평남 덕천에서 기의한 김관수는 “그의 부하들을 불러모아 용의군을 차출하여 결사대를 단결”한 다음 “총검을 그 후원중에서 타조”하였다고 하며, 철환과 화약을 직접 제조하거나 각 동리에서 징발하여 사용하는 편법을 썼다. “대진 군용이 시급하니 화약 매호당 2근, 철 10개, 삼으로 만든 신 10켤레, 각동별 무명 1필을” 대납하라는 등 내용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 조달이 아주 용이했던 것을 알 수 있고 그 제조방법도 간단했다.
전해산은 1908년 10월 8일에 “황을 사들여 제조하며 납을 달구어 탄환을 만들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석용은 1908년 3월, “15일 새벽에 출발하여 비를 무릅쓰고 상내동으로 들어가서 자기황병을 구득했다. 이것이 요즘 금물인데 어찌하여 내 손에 들어왔단 말이냐”하며 반가워하고 있다.
또 전남경찰의 한 보고에 의하면 전남 장성군 북하면 월성리의 솥 제조업자 강화백은 한번 솥을 굽는데 솥 40개와 설철(쇳가루) 약 500돈쭝이 나온다고 하며 의병들은 이 설철을 이용하여 철환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화승총은 가장 손쉽게 제조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으나 신식총은 구득하기도 어려웠고, 탄환의 보급책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무릇 어느 전쟁에 있어서나 무기의 우열은 전술이나 전략을 따지기 이전의 문제이며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결정적 조건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된 의병들은 더욱 화약과 무기의 확보 및 무기의 성능개량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5. 항일 독립군 무기
한말에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던 의병활동이 일군의 강력한 무력으로 점차 활동 근거지를 상실하게 되자 많은 의병부대는 새로운 활동기지를 찾아 한만국경선을 넘어 만주로 이동하였다. 특히 3․1운동을 전후하여 국외로 망명한 항일투사들은 서간도를 중심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북간도의 국민회, 임시정부 산하의 북로군정서,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그 산하의 신흥무관학교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등이 이러한 무장단체의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와 독립군 조직이 무기를 구입하는 방법으로는 주로 중국 동청철도 방면에서 구입하여 운반해 오는 것과 노령지역 연해주로부터 구입하였었는데, 이 때 구입된 화기로는 일제, 체코제, 러시아제, 독일제 모젤식 총 등의 무기들로서, 38대 소총의 장총과 체코제 기관총과 탄약 등이었다.
체코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를 위해 러시아군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한 체코군은 동유럽전선에서 이탈하여 시베리아를 경유, 블라디보스톡에서 연합국의 주선으로 유럽을 향해 회항하고자하여 이동을 개시, 이동중 소지하고 있던 체코제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무기를 곳곳에 팔아먹기 시작하였는데, 그런 속에서 체코군은 같은 피압박민족의 처지에서 우리의 독립군들을 깊이 이해하여 다량으로 팔았던 것이다. 또한 일본제 무기가 노령지역에서 공공연히 매매되고 이었고, 러시아 혁명의 대세에 밀려 퇴각하는 백계 러시아인과 그들의 군대에 의해 일제 무기 및 러시아제 무기가 독립군에게 매매되었다.1)
<독립군 부대의 무기현황(일제, 체코제, 러시아제 혼합)>
부 대 |
무 기 체 계 |
비 고 |
북로군정서(500명) |
장총:500, 권총:40, 기관총:3 소총:1300, 권총:150, 기관총:7 |
1919년말 1920. 8말 |
대한독립군(400명) |
소총:200, 권총:30 |
국내진입 작전 전개 |
서로군정서(2000명 배출) |
소총:5(초기) |
신흥무과학교 |
국민회군(450명) |
소총:400, 권총:160 |
|
군무도독부(60명) |
소총:400, 권총 50, 기관총:2, 수류탄:120 |
|
※ 이외의 대소독립군부대들도 각종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음.
이상에서와 같이 주로 한만국경선을 넘어 만주지역에서 활동을 하던 독립군들은 제법 군의 체제를 형성하면서, 각지역에서 만방으로 거두어 들이는 군자금을 가지고 최신무기를 획득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같은 노력으로 그들은 당시의 일본이 사용했던 38식 소총 또한 독립군의 손에 의해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활용되었던 것이다.
6. 광복군 무장
1940년 9월 광복군 창군식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을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정통 무장독립단체라고 선언하였듯이 임시정부는 비록 소수의 인원이긴 하지만 광복군에 대해 그들이 전투부대로서 독자적으로 일본군과 전투행위를 하여 조국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간절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임정의 간절한 기대는 그렇게 간단하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군의 앞날을 흐리게 했던 최대의 난점은 재정문제였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임정의 재원은 중국정부가 몰래주는 약간의 원조금과 미주 각지에서 보내오는 교포들의 성금이 전부였고, 그 금액은 광복군의 운영자금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액수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부터 정식으로 중국정부의 군사원조를 받게되어 그 동안 겪었던 재정적 곤란을 타개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원조가 본격화됨으로서 광복군의 무기체계는 중국군의 무기체계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기체계상 하차없이 운용하고 있었지만 성능면에 있어서 중국군의 각종 무기류는 일본군의 무기류에 비해 매우 낙후한 무기들이었다. 광복군은 1943년 5월 버어마 전구 영국군 사령부와 협정을 맺고 한지성을 대장으로 하는 별동대를 파견하여 인도․버어마전선으로 나가 실전에 참가하였고1), 일본군내에 편입되어 있던 50여명의 학도병들이 무기를 지닌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의 제3지대에 소속되어 각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1944년 5월에는 주중 미국 공군 웨드마이어 중장의 원조로 광복군의 낙하산 훈련이 실시되었는데, 이 낙하산 훈련의 실시는 임시정부가 당초 예상하였던 대규모 병력 양성이 지연되자 소수 병력으로 적의 추방을 교란시키기 위해 취해진 것이었다.
또한 한미합작의 특수훈련 계획을 세워 1945년 5월부터 광복군 제2,3지대에 대한 미육군 전략처(O.S.S)에서 실시하는 특수훈련을 3개월동안 시켜 국내로 잡입한 다음 유격전술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였었다.
한편 재미 교포로 조직된 의용병 6백명은 육․해․공군에 고루 참전하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군에 배속된 한국군은 사이판․필리핀전투 등에서 제1선을 담당하여 일제에 강제 동원된 학병, 징병들의 호응으로 일본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이승만은 미육군전략처(O.S.S)와 교섭하여 한국청년 1백명 가량에게 게릴라 훈련을 시켰으며, 미육군사령부와 접촉하여 1백명 정도의 규모로 한인국방 경비대를 설치하여 캘리포니아 민병의 한인부대로 1942년 4월 26일 정식으로 발족하였으며1), 1943년 1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한인경위대 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비록 광복군에 소속된 것은 아니지만 외국의 현지에서 외국군의 무기를 들고 한국군(혹은 한국의용군)소속으로 참전을 했다. 그리하여 1943년 이래 연합군에 참가하여 직접 전투에 임한 한국군은 5천명이상에 이르렀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광복군이 사용했던 무기는 주로 당시 중국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류중에서 유격전에 필요한 소총, 경기관총, 수류탄, 권총, 각족 폭약류 등을 그대로 지원받았으며, 세계의 각지역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애국자들은 해당국가의 무기를 가지고 일본을 패망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광복군을 비롯한 세계각국의 애국동포 청년들은 세계 각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직접 국내 전투에 참전하여 자신의 손으로 독립을 쟁취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
12) 박영석, 한 독립군병사의 항일전투(서울:박영사, 1984), PP.62~91.
13) 이선근, 대한국사(서울:신태양사, 1973), P387.; 민족문화협회, 독립군의 전투(민족운동
총서, 제4집, 서울:횃불사,1980), P.256, 265.
14) 이선근, 상게서, P.394.; 민족문화협회, 상게서, 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