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전사

2-7 현대의 무기

103ROTC #20 LTC / On Artillery 2007. 7. 18. 09:46
 

제 7 절  현대의 무기

 

1. 건군전후의 무기

 국군은 경비대로 발족할 당시 군의 모든 면에서 일본 군대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가, 1946년 3월부터는 미식으로 개정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 일제무기가 미제로 교체되고, 다음해 4월에 가서야 비로소 화기학에 대한 기초훈련이 실시되어, 1949년 주한미군의 철수가 완료될 즈음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부록 2-1>과 같은 장비를 받아 구비하고 있었다.

 육군의 장비는 매우 부족한 상태였으며, 그나마 현존 장비도 상당수가 노후화되거나, 주요부품이 훼손되고 망실되어 있었는데, 이는 미군이 비교적 성능이 좋은 것은 사전에 선별하여 철수때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또한 지상군의 필수장비인 전차는 전혀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력은 초창기부터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함정의 획득과 건조, 수리정비에 전력을 기울여 왔으나,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함정의 대부분은 경량급 소해정에 불과하였고1), 또한 공군의 경우도 연락기 및 연습기의 수준이었다.

 1949년 10월, 주한 미군사고문단장의 임시대리 베어드(John E. Baid)대령은 미국정부에 대하여 한국군은 “개인화기를 제외하고는 무비수준보다 인원만 더 많이 편성되어 있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2. 한국전쟁직전 무기

가. 북한과의 장비 및 화력비교

 한국전쟁직전 남한과 북한의 장비 및 화력을 비교하여 볼 때, 매우 두드러진 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아래와 같이 표기된 것은 장비의 성능과 화력의 위력은 고려치 않고, 단지 장비 보유수만을 비교한 것이다.

 야전에 있어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중의 하나인 야포는 1:11의 엄청난 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더구나 한국전쟁초기 북한이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있어 주동역할을 한 T-34 전차는 그 기동력과 충격력을 참작하지 않고 다만 전차에 장치된 85mm 전차포만을 고려하였으므로 실제 전투력은 보다 심한 격차가 있었다.

<한국전쟁시의 무기비교>                                     (1950. 6. 24 현재)


구분

한국군

대비

북한

 

 

 

-야포:

 105mm(M-3)곡사포:88

 ※91문중 3문 고장

1:11

-야포 및 전차:

122mm 곡사포:172

76.2mm평사/곡사포:380

76.2mm 자주포:176

T-34 전차(85mm포):242

소계: 970

-대전차포:

 57mm대전차포:140

1:4

-대전차포:

 45mm대전차포:550

-박격포:60mm:576

 81mm:384

 소 계:960

1:2.4

-박격포: 61mm:1,142

 82mm:950

 120mm: 226

 소 계: 2,318

-장갑차:37mm 포: 24

1:2.2

-장갑차:37mm 포:54

-고사포:0

 

-고사포:

 85/37mm전투함:36

함정

-전투함 및 소해정:28

-수송선 및 기타:43

1:1

-전투함(어뢰정):30

-수송선 및 기타:?

항공기

-연락기 및 연습기:22

1:9.6

-전투기 및 연습기:211


 ※ 자료: 한국전쟁사 제1권, 1977, 국방부 PP. 109~110.



 다음은 남북한 보병사단이 장비한 야포의 사거리를 비교한 것이다.


 <야포 사거리 비교>                                     (거리:m)

한       국

북       한

무         기

사거리

무         기

사거리

-105mm(M-3) 곡사포

6,525

-122mm 곡사포

-76.2mm 평사포

-76.2mm 자주포

-76.2mm 곡사포

※120mm 중박격포

11,710

13,090

11,260

 9,000

 5,700


 국군화력의 핵심인 105mm(M-3) 곡사포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보병연대용이었는데, 북한의 포병화력의 주무기인 122mm곡사포 사거리이 약 반밖에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북한 사단에는 국군에게는 없는 120mm 중박격포 18문이 장비되어 있기 때문에, 산이 많은 착잡한 지대에서도 공격부대에 대한 대구경화포의 근접지원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38선 방어에 임하고 있는 사단에게는 M-1소총이나 칼빈소총이 충분하게 보급되어 있었고, 37미리 고사포가 탑재되어 있는 장갑차(정찰대용)도 배속되어 있었으나, 남부지방에서 게릴라 토벌에 임하고 있던 3개사단의 장비는 매우 빈약하여 주무기는 구일본군의 99식 소총이었다.


나. 장비의 가동상태 및 보급수준

 1948년말부터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착수한 북한은 그들이 판단한 전쟁소요기간임 50일 이상의 전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모든 군수물자를 획득, 비축하고 일부 보급품은 북한내에서 생산 공급하는 단계에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은, 1949년 10월 미 군원계획에 의거 지상군 6만 5천명선을 기준으로 한 장비와 6개월분의 각종 보급품을 원조 받았고, 그 이후 북한의 전력증강에 대비하여 한국의 병력이 10만명 선으로 증가되었으나, 부족장비 및 보급품의 보충보급은 전혀 없었다.

 더욱이 국내 조달품은 예산부족으로 최하수준의 의식주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탄약에 있어서는 1949년말 현재로 총 1,900만발의 재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공비토벌과 교육훈련으로 적지않은 양이 소모되고  6․25당시에는 개인당 17기수 분의 분량만 남아 있었다. 이것은 전시 6일분 소요량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전투가 치열한 경우에는 1일분에 충당될 수량이었다.

 한편, 병기 생산면에서는 1949년 1월 용산에 병기공창이 창설되어 1950년초부터 수류탄, 소총실탄, 지뢰 등을 생산하였고, 해군은 진해 조함창에서 제1충무정을 건조하고, 병기공창을 설립하여 함정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도입된 함정의 건조년한이 오래된 관계로 많은 노력과 예산이 소요되었다.

 차량정비 또한 기술의 미숙와 예산부족으로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일고작 2대의 엔진을 재생할 능력밖에 없었고, 수리부속품의 고갈 때문에 부대정비로서 해결될 고장차량마저 가동시키지 못하고 있었으며, 6․25 직전에는 총보유 1,566대 중의 35%(500대)를 회수하여 기지정비에 착수하고, 나머지 전량에 대한 일체검사를 실시중에 전쟁이 발발했으므로, 그 태반이 사용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3. 한국전쟁중 무기

 모든 것이 불리한 한국군은 초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소집회의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원조” 결의안이 통과되어 사상 최초로 유엔이 집단안전보장 원칙을 단행함으로써 한국에 유엔군이 투입되어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등장된 신형무기의 한반도 상륙은 자연스런 일이었으므로 전세는 유엔군에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 7월 1일 미군 선발대(스미스 부대)가 부산에 도착하자 한국군은 7월 3일 그 동안 와해되었던 각부대에 대한 정비에 착수하여 제1, 2수도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보충시켰는데, 재편성 당시 국군의 병기 재고량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일본에서 선적하였거나, 그 뒤 한국으로 긴급수송이 결정되어 7월 4일부로 인수 예정이던 것을 포함하여도 아래와 같이 「국군의 병기 재고량」수준밖에 되지 않았고, 당시 미극동군은 북괴가 전면전쟁을 도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아래 국군이 필요로 하는 품목을 비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급기지창에도 재고량이 없었다.


<국군 병기 재고량>

                                             (1950. 7. 4 현재)

병  기  명

단위

수 량

병  기  명

단위

수량

M1 소총

칼빈 소총

중기관총(수냉식)

 

 

18,000

22,000

  180

 

2.36인치 로켓포

81mm  박격포

57mm 대전차포

105m(M-2)곡사포

800

270

39

52

 ※ 자료: 한국전쟁사 제2권,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68, P.369.


<스미스 부대의 무기>

병기명

단위

수량

직접지원포

단위

수량

4.2인치 박격포

75mm무반동총

2.36인치로켓포

2

2

6

105mm곡사포

 

 

 

 

6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미 제52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7월 5일 오산 북방에서 진지를 구축, 점령하고 있다가 08시경 이곳으로 남하하는 북괴군의 전차와 3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180여명의 병력손실과 함께 모든 공용화기를 잃은 큰 손실을 입고 철수 하였다. 1개대대 규모의 명력과 미약한 전투력(스미스 부대의 무기)을 투입시킨 미극동군측은 이를 계기로 북괴군의 전력에 대해 재평가를 실시하여 이를 분쇄할 수 있는 대응무기가 한반도의 전장에 보내지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당시 새로 개발된 대전차무기인 3.5인치 로켓포가 미군에 의해 대전시가전에서 사용되었으며, 7월 23일 미군 제25사단은 상주에, 제1기병사단은 영동에, 그리고 미 제24사단은 거창-안양-하동 일대에 각각 배치되어 바야흐로 전전선에 걸쳐 연합군의 한국전쟁참여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감에 따라 신형전차를 비롯한 각종 중, 경기관총 및 155mm곡사포 같은 야포 등이 투입되어 연합군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게 되었다.2)

 1953년의 중공군 6월 공세를 겪고난 뒤, 국군 각 보병사단에 파견된 미 고문관들에 의하여 작성된 「국군 지휘능력 평가서」중에는, “엄연히 소화기 또는 박격포 사격이 보다 유효하다고 믿어지는 상황아래서도 국군 지휘관들은 포병지원에만 의존하였다.”라고 지적되어 있다.

 해군의 경우에 있어서는 개전초부터 유엔 해군이 동, 서, 남해안을 강력히 봉쇄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공군은 경비행기로써 부평의 육군병기창에서 시험제작한 15kg폭탄 274개와 서울 시경에서 인수한 수류탄 500여개를 가지고 출격하여 남하중인 적의 머리위에 투하하였다. 그나마 6월 27일에 가서는 폭탄 및 수류탄도 전량 소모되므로 폭탄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의 전 항공기는 정찰작전으로 전환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투기원조 요청에 의해 미국에서 받은 F-51 전폭기 10대를 인수하기 위해 6월 26일 한국군 조종사 10명은 일본의 이다즈께 기지로 출발하여 그곳에서 불과 4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F-51전폭기 10대를 직접 조종하여 귀국하고, 이튿날 7월 3일부터 바로 작전에 투입되었다. 7월 16일부터는 기관포(CAL-50)와 로켓탄을 탑재하고 출격하였다.

 이어서 연합군소속의 F-80전투기, F-82전투기, B-26경폭격기, RF-80A정찰기, B-29중폭격기, C-54수송기, C-47수송기, C-119수송기, F-86전폭기, F-84, F-94, RB-29 등이 대거 한국전에 참가하여 시종일관 제공권을 장악한 상태였으므로 육․해군 모두는 유리한 입장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일찍이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이 겪은 수많은 전쟁중에 이 때처럼 풍부한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전쟁을 치루어 본 적은 없었다.


1) 정하면 외, 한국전쟁사(서울:일신사, 1982), PP.99~101. 113.


2) 한국전쟁사 제3권, 국방부 전사 편찬위원회, 1970, P.307~319


'포병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3-2 무기체계 발전현황  (0) 2007.10.01
3-1 한국의 포병무기체계 변천의 개요  (0) 2007.10.01
2-6 근대의 무기  (0) 2007.07.18
2-5 조선시대의 후기 무기  (0) 2007.07.18
2-4 조선시대의 전기무기  (0) 2007.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