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사진

붉은 군대의 수호신 포병 제 2 편 - 자주포 2 of 2 (소련 포병)(펌글)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7. 15. 19:39

포탄은 지휘관 큐폴라의 오른쪽을 날려버렸다. 다행히 담뱃불을 붙이기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내 머린 무사할 수 있었다. 갑자기 러시아의 돌격포(Assult Gun)가 나타났고 난 사수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다. 크라머는 즉시 사격을 가했지만, 그 순간 두 번째 포탄이 포탑을 강타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 남아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헤드폰으로 난 아직 티거에 남아있다고 알렸다.

 

                                                                   - 오토 카리우스 (Otto Carius, 독일의 전차 에이스) -

 

 

자주포병대의 구성    Organisation of the SU Batteries

 

SU(러시아어 Samokhodnaya Ustanovka라고 쓰며 자주포란 뜻임)연대는 경(輕), 중(中), 중(重)의 세가지 형태로 나뉘며 보유 자주포들의 구성은 전쟁기간동안 다양했다. 몇몇 초기 편제도 (? Shtatniy : 미군의 TO&E 나 독일군의 Kriegsstaerkenachweisung와 비슷한)는 제한된 자주포 수량만 보유했음을 나타내며 후기로 갈수록 보유 자주포 수량과 자주포 생산량은 증가했다.

 

동토의 혹한 속에 워밍업중인 SU-76 

 

자주포 역시 견인포와 마찬가지로 4문으로 중대를 구성했으며 이 중대들이 모여 다시 연대를 구성했다.

처음 자주포 연대가 선보였을때 연대는 SU-76과 SU-122의 혼성연대로 구성되었으며 경SU-76 4개 중대(각 4문)과 중(中) SU-122 2개 중대 (각 4문)로 편제되었었다. 이 두 종류의 자주포는 그 성격과 운용방법에 있어 매우 달랐기에 이 편제는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했다.

 

박력있는 SU-122의 사진 

 

몇 달후, 이 자주포들은 각각 SU-76 5개 중대(각 4문)로 구성되는 경자주포 연대와 4개의 SU-122자주포 중대(각 4문)로 구성되는 중(中)자주포 연대로 분리되었다. SU-122는 1943년 말에 SU-85로 대체되었으며 SU-85는 전쟁말기에 SU-100으로 대체되었다. 중자주포 SU-152는 1943년 전장에 첫 선을 보였으며 2문으로 구성된 6개의 중대로 연대를 조직했다. KV-1이 SU-152연대의 지휘를 맏았다.

 

전쟁 말기, 중(中)자주포연대는 경자주포연대와 같이 5개의 중대로 구성되었다. 연대에 배속된 지원세력은 증가되어 대전차 소총 중대와 기관총 중대가 있었다. 보병들은 자주포와 근접작전을 벌이면서 판저파우스트(Panzerfaust)를 장비한 독일 대전차팀으로부터 자주포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차의 경우 이미 1943년에 이러한 작전대형을 갖추었었다.

 

시야가 좁은 기갑차량에 있어 판저파우스트 같은 휴대용 대전차 병기는 큰 위협이었다

 

ISU 시리즈들이 대량생산되어 전선으로 보내지자 중(重)자주포 연대는 ISU-122나 ISU-152 5개 중대(각 4문)로 증강되었다. 1944년 5월 소총 사단들은 경 SU연대를 배속받았으며 이 연대는 SU-76 3개의 중대(각 4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지휘는 추가적인 한 대의 SU-76이나 T-70이 맡았다.

 

전쟁 막바지에 좀더 거대한 편제가 구성되었다. SU 여단은 3개의 SU연대로 묶어졌고 (60-65문) SU-76이나 SU-57 경자주포 연대로 구성되던가 아니면 SU-100 중(中)연대로 구성되었다. 중(中)자주포 여단은 독일의 쾨니히티거가 등장한지 두달후인 1944년 11월에 구성되었으며 이는 이 왕호랑이에 대한 러시아의 응답이었다.

 

 아무리 왕호랑이라도 122mm 철갑탄을 견디진 못했다

 

 

자주포 운용 전술    The Tactics of Soviet Self-propelled Guns

 

붉은 군대는 항상 자주포 운용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독일의 자주포 (Sturmgeschutzen : 돌격포) 운용과 매우 구별되는 점이다. 소련은 자주포를 항상 자주포로 운용했지 독일처럼 구축전차로 운용하지는 않았다.

 

소련의 자주포들은 다른 직접 사격 포병(ZIS-3) 들처럼 진지로 이동하고 적의 면전을 강타했지만 독일의 3호 돌격포(StuG III)처럼 근접 대전차 전투를 의도하거나 각오할 생각으로 설계되진 않았다.

 

 독일 기갑의 팔방미인 삼돌이

 

이러한 전술적 운용지침을 나타내는 것이 소련의 자주포들은 기관총 장착이 부실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기관총은 접근전시 자주포에 위협을 가하거나 쇄도해 들어오는 적 보병 방어에 필수적이 무기다. 러시아군은 이 기관총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험한 꼴 당한 페르디난트

 

예를 들어,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의 페르디난트(Ferdinand)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그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SU 시리즈들이 12.7mm 대공기관총을 지급받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더구나 이 기관총을 사용하기 위해선 전차장이 상반신을 내미는 위험을 감수해야했다.) 이런 근접방어무기의 부족은 이 자주포들이 근접전투를 의도치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와 다르게 독일의 구축전차는 대개 기관총을 장비했으며 내부에서 조작할 수 도 있었다.

 

소련 자주포들의 목적은 측면이나 고지의 전장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에서 직접사격으로 돌격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직접사격은 그들이 요구하는 목표물에 더 정확히 강타하는 것을 허용으며 상대적으로 대구경인 소련의 자주포들은 독일군의 대전차포 진지를 안전한 원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예를들어 SU-76은 독일의 Pak38 5cm포보다 더 원거리에서 이를 격파할 수 있었다. 물론 독일이 좀 더 대구경의 포로 이를 교체하자 SU-76의 승무원들은 매우 피곤해졌지만.....

 

배신자 SU-100 

 

SU-85와 SU-100이 아무리 훌륭한 대전차무기라도 그들은 절대 전차사냥꾼 (독일의 Panzerjaegers처럼)으로 개발된 것은 아니며 항상 자주포로서의 기능만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대전차포 여단들의 증가로 SU-85와 SU-100연대가 이들 여단에 배속되었다. 덕분에 전쟁이 진행될수록 소련의 대전차포 전력에서 자주포의 비율은 점점 증가되어갔다.

 

소련 자주포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각 자주포들이 무전기를 장비했다는 것이다. 탱크의 경우 무전기는 매우 드물었으며 전쟁 초반 대부분의 전차는 무전기를 장비하지 않았으며, 말기에는 부분적으로 라디오 수신기(발신기는 없었다.)만 장비했었다. (단, 렌드-리스받은 전차들은 각 차량별로 무전기가 있었다.) 이 무전기 덕분에, 자주포 중대들은 용이한 협력이 가능했으며 또한 각기 독립적인 기동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중대 지휘관은 엄폐한체 목표물을 관찰하면서 중대의 다른 자주포와 협력하면서 공격이 가능했다.

 

 

ISU-152와 ISU-122의 등장    Focus on the ISU-152 and ISU-122

 

붉은 군대의 자주포 개발 정책은 전차에 기반한 자주포를 만드는 것이었다. 1944년, KV중전차 시리즈가 IS(Joseph Stalin)시리즈에 의해 대체될때 KV에 기반한 SU-152가 개발되었으며 나중에 IS에 기반한 ISU가 개발되면서 대체되게 되었다.

 

 ISU의 엄마가 되는 IS들

 

원래 ISU-152는 SU-152와 동일한 화포를 장착하는 것이었지만 152mm 포신의 생산부족으로 122mm A-19군단포가 일부 차량에 장착되었다. A-19를 채택한 이유는 이미 막대한 양이 생산되어 있었으며 포탄또한 그 못지 않게 생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2mm 포신의 공급이 충분했을 때에도, ISU의 122mm들의 생산은 계속되었고 이는 전선에서 매우 효율적인 병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원래 이 두 개의 버전은 같은 포방패를 사용하지만, 122mm 버전의 현대화된 포방패가 개발되어 D-25S라 불린다. 새로 개발된 포방패는 이후 생산된 차량에 적용되었고 더 동그란 모양을 했다.

 

 오리지날 ISU-122

 

 개량된 포방패와 머즐 브레이크를 장착한 ISU-122s 포신에 그려진 6개의 킬마크!

 

ISU는 생산량을 통해 그 기반이 되었던 IS-2에 비해 더 효율적인 병기임을 입증하게 되었다.(4,075 ISU-122/152 Vs 3,845 IS-2 = ISU Win!!!) ISU는 느렸지만 강력한 야수였고, 전선을 돌파임무에 맞게 설계되었다. 그것은 강력한 적의 방어공격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ISU는 이에 부적합했고 전선돌파 임무는 여전히 T-34가 맞게 되었다.

 

이 강력한 병기의 단점 한가지는 포탄의 수납량 제한과 낮은 발사속도에 있었다. ISU-152는 단 2종류 20발의 탄밖에 적재할 수 없었다. 탄의 무게는 43.6kg ~ 49kg에 이르렀으며 장약은 6kg이었다.

 

122mm탄의 무게는 26kg이었으며 30발을 적재했다. ISU시리즈에는 5명의 승무원중 2명이 장전수였고 나머지 승무원들이 탄을 적재하거나 탄피를 버리는 일을 도왔다.

 

ISU의 부부! 남편인 니콜라이 오를로프는 운전수, 아내인 베라 오를로바는 지휘관이다.

이 불쌍한 사내는 아마 이차대전을 통털어 가장 잔소리를 많이 들은 남편일 것이다. (필자 주)

 

ISU가 처음 등장했을때 최초로 운용한 탄은 고폭 파쇄탄(?)이었다. (High-Explosive Fragmentation (HE-Frag)) ISU가 보유한 탄 중 최대 3분의 1만이 철갑탄 종류 였으나 이 야수가 날리는 고폭탄의 엄청난 폭발력만으로도 철갑탄은 그렇게 절실한 존재가 아니었다. 고폭파쇄탄은 장갑을 뚫을 필요도 없이 전차의 관측창이나 구동기어를 파괴시켜 가동불능상태를 만들고 전차병들을 기절시킬수 도 있었다.

 

소련은 실험결과 122mm탄은 최대 2,500미터에서 판터의 정면을 파괴해 저지시킬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붉은 군대가 보유한 이 펀치력은 판터의 일차 설계목표중의 한가지 유용성을 감소시켰다. 판터는 최우선적으로 대전차 저격전차로 설계되어 T-34 때거리들을 원거리에서부터 때려눕히는데 있었다. 이런 이유로 판터의 장갑은 정면은 두껍게 측면은 얇게 장착되었으며 또한 티거와 다르게 근접전을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초기 판터는 저격병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붉은 군대가 이에 대한 반격수단을 마련하자 판터의 피격률또한 상승하게 되었지만 판터의 제작비는 여전히 너무 비쌌다.

 

 곰돌이들도 만만치 않게 왕호랑이를 두들길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원거리에서의 우세는 월등한 광학장비를 보유한 독일군에 있었지만 90mm 60도의 경사장갑을 장착한 ISU 시리즈는 얼마 안되지만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122mm탄은 또한 쾨니히 티거에 대해서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유명한 소련군 전차 영웅 Dimitriy Loza대령은 1945년 1월 비엔나 시가전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마 이 책인듯....아마존에서 파네요            

 

‘JS의 철갑탄은 무엇이든지 격파가 가능했다. 우리가 비엔나로 진입할때, 3대로 구성된 JSU-152 중대를 지원받았어요. JSU들은 너무나 느려서 우리의 발목을 잡곤했죠. 고속도로에서 우리가 탄 셔먼은 70km/h의 속도를 냈지만 뒤의 JSU들은 장갑이 벗겨지도록 달려야 했어요. 비엔나 시가로 진입하자 제가 저의 책에 쓴 바로 그 사건이 벌어졌읍죠. 수대의 판터로 구성된 독일군들이 역공을 가했왔는데 판터란 놈은 중전차닙다. 저는 JSU들에게 전진해서 판터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날려버려!”라고 말하자마자 오! 정말 날라갔어요! 비엔나의 좁은 거리들, 높다란 빌딩들, 이 모든 것들이 이 광경의 목격자였어요. JSU는 400~500mm지점에서 판터의 후방을 강타했고 몸체와 떨어진 포탑은 수미터를 날아가서 떨어졌지요. 하지만 재앙은 우리의 머리위에서 일어났어요. 수많은 유리창들이 깨져 전부 우리 머리위로 떨어졌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사태를 예상치 못한 제가 원망스러웠죠. 헬멧을 쓰고있던 머리가 안다치건 천만 다행이지만 팔과 어깨는 성한 곳이 없이 다 베었었죠.’

 

ISU에 좀 더 중구경화포를 장착하는 계획이 입안되었다. 소련 첩보부에 의해 독일이 새로운 초중전차를 개발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최근 왕호랑이에 가슴을 쓸어내린 소련군 최고사령부에 접수되었다. 이 사건은 과장된 루머임이 판명되었고 독일이 충분히 생산할 여력마저 없었던 왕 호랑이가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쿠빙카 군사 박물관에 전시된 ISU-130의 프로토 타입. 소련은 언제라도 준비되어 있었다

 

만약 이런 초중전차가 전장에 투입되었더라면, 더욱 장갑이 증가되고 152mm 장구경포 ( BL-8과 BL-10)로 업건된 ISU와 (버젼에 따라서는 개조된 해군포 130mm S-26 : 33kg의 포탄을 900m/s으로 사격 (122mm는 25kg의 포탄을 780m/s으로 사격)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소련은 이미 독일이 그 어떤 전차를 개발하더라도 이들을 저지시키수 있는 계획이 있었지만 독일은 중전차 오직 신형중전차의 개발만이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ISU의 생산은 계속되어 소련과 그 동맹군들에게 사용되었으며, 초중구경포를 (406mm화포와 420mm박격포 포함)탑재하는 베이스가 되었다. ISU시리즈의 생산은 1955년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