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전사

전투사례2. 극한 상황에서의 사격지휘

103ROTC #20 LTC / On Artillery 2007. 10. 25. 12:55
 

2. 극한 상황에서의 사격지휘

1.  개    요

가.  작전기간 : 1950년 6월 25일 ~ 28일

나.  작전지역 : 강원도 강릉

다.  적    군 : 북괴군 제5사단

라.  아    군 : 보병 제8사단 제18포병대대

2.  상    황

  북괴의 전면 남침 당시인 1950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보병 제8사단이 열세한 전력으로 강릉지역에서 적군 제5사단과 대치하여 격전시 아군포병인 제18포병대대원의 효과적인 포병사격으로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고 적에게 피해를 강요하여 차기 작전에 기여했던 전투이다.

  당시 전황은 북괴군 28경비 1여단 2개 대대 병력이 동해안지구 38도선을 경비하면서 38선 이남을 자주 침투하여 식량약탈 및 우익인사를 학살하였으며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유격대를 침투시키는 등 도발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군은 공비 격멸전에만 주력하여 적을 과소평가하고 적의 남침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3. 작전경과

  6월 25일 새벽 4시에 천교리 서남쪽 2km에 이르는 188고지에 낙하한 적 포탄 1발을 신호로 당시 동해안에서 연화동에 이르는 제 10연대 2대대의 38도선 경비 진지 일대에는 포탄이 비오듯 집중 낙하하기 시작하였으며, 38도선 상에서 적을 저지 격멸하고 호기를 포착하여 반격을 감행하도록 18포병대대의 1개포대가 10연대를 직접지원하고 주력은 사단을 일반지원하되 그 화력의 우선권은 10연대에 두었다.

  당시 사단포병인 18포병대대장 장강석 소령은 육본에 출장중이고 각 포대장과 참모장교, 그리고 선임하사급 10여명은 새로운 사격지휘법을 교육받기 위해서 포병학교에 파견중이었다.

  따라서 대대는 선임장교(대대부관, 대위 이남규)의 지휘하에 전 장교 및 하사관들은 영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0연대 2대대가 인구리선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사단장은 공병대대를 주축으로 편성한 혼성 예비대대의 역곡천 주진지 점령과 포병의 사천선 진출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대대는 3포대를 사단사령부에 진지를 점령케하고 1,2 양개포대는 11시에 사천선 남한의 미노리에 있는 사천국민학교로 진출 포진지를 점령하였다. 이 때 이남규 대위의 명령으로 주문진 북쪽으로 나아가 적정과 지형을 정찰한 제2포대의 김용운 소위는 첫째로 M-3포의 전술사정으로 인하여 현진지에서는 제10연대 2대대에 대한 효율적인 지원이 곤란하고, 둘째로는 동일진지에서 2개포대가 사격할 때 진지가 노출되기 쉬워 적의 포화로 제압될 것으로 판단되어 1개포대를 사천선 북쪽으로 추가하여 분산 운용토록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제1포대는 13 : 00에 사천선을 건너 석교리의 뒷골부근으로 추진함으로써 2,000m의 사정을 신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시 40분에 이르러 제 10연대 2대대가 역곡천의 주저항선을 목표로 철수하자 일제히 엄호사격을 실시하여 적의 공격을 견제하였다.

  제3포대는 사단 연병장에 방열한 채 사천국민학교로 진출한 제1포대의 사격효과 증대와 적에게 대포병사격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M3포의 사정이 짧아 대포병사격의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장약 5호의 탄을 변칙적인 사격방법을 사용하여 순발신관이 수목에 닿으면 작열하므로서 VT신관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도록 하였다. 13 : 00부터 적의 포격이 점차로 치열해지면서부터 제1포대 진지가 집중포격을 받기 이르러 16 : 00에는 사천국민학교를 철수하여 제1,2포대가 합세하였다. 당시 강릉의 남녀 학생들은 작렬하는 포화속을 뚫고 포탄을 운반하거나 음료수를 장병들에게 제공하였다.

  사단장은 이 전쟁의 승패는 오직 포병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6월 27일 적이 별다른 공세징후를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자 반격을 감행하여 우선 주문진을 탈환하고 진전에 따라 38도선을 일거에 회복키로 결심하고 18포병대대는 H-30분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되 연곡천 북쪽으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04시 30분 적의 선제공격으로 이 계획은 취소되고 공방전이 전개되어 주진지에 연곡천선이 붕괴되었다.

  사천국민학교에 포진한 제 1,2 양개포대는 이날 04 : 0에 적의 포격이 시작 되자 천마봉에 있는 10연대 2대대를 엄호하여 대포병사격을 실시하였으나 주 저항선이 붕괴되자 사단 연병장에 있던 제3포대마저 출동하여 3개 포대 15문의 포가 일제히 사격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포대장의 명령은 “각개포 계속쏴”라는 변칙적인 방법이었다.

  포탄을 제한없이 퍼부어 연곡천 연변을 탄약으로 뒤덮고 적을 계속 강타하였으나 08:00에 주저항선이 붕괴되자 포병진지는 보병의 지원없이 도출되었다. 이 때의 퇴로차단을 우려한 사단장은 포병의 철수를 명령하였으나 대대의 전 장병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진지를 계속 고수하면서 더욱 치열한 사격을 적에게 퍼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대 장병의 90%이상이 서북청년단 출신으로서 북진하여 하루라도 빨리 고향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상하가 뭉친 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해안선으로 상륙한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안자 제3포대는 사단장의 긴급명령으로 강릉으로 이동하고 제1, 2 양개 포대만이 계속 포격을 퍼부어 연곡천을 유린한 적을 판교리-석교리에서 일단 저지하는데 10시에 이르자 적은 전 화포를 포병진지로 집중하면서 해안으로 후퇴한 적들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적이 계속 밀려들어 포위망을 압축하자 18포병대대 장병들로 철수치 않을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 빠졌다.

  아수라장 속에서도 병사들과 사격을 계속하면서 백병전을 벌이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포를 1문씩 침착하게 빼내기 시작하였다. 다만 1포대의 전포대 선임하사였던 최서종 중사외 3명의 병사들은 1번포와 3번포 2문만을 극한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나 폐쇄기와 타이어를 파괴, 사용 불능케하고 철수하였다.

  한편 서울에 출장중이던 대대장 장강석 소령은 포병감 대리인 김계원 중령으로부터 의정부 방면으로 나아가 포병을 지휘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육군참모부장인 김백일 대령을 찾아가 자기의 복귀를 손꼽아 기다리는 18포병대대로 복귀시켜 달라고 직언하였다.

  그래서 승인을 받은 대대장은 징발한 민간차량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강릉으로 출발하지 못한 포병의 피교육 장병을 싣고 서울을 출발 강릉에 도착하였다. 대대장은 이 때 적이 120밀리 박격포 사격을 퍼부으면서 공세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자 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제3포대를 운산리에서 진지를 점령케하고 산두곡-양장산 일대를 사격하여 적의 공세기도를 분쇄하면서 제21연대의 방어부대를 엄호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28세의 사단장은 강릉고수를 위하여 결전을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대관령으로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갖춘 다음 대책을 세울 것인가를 결심하지 못하고 주저하였으나 거듭된 작전회의 끝에 대관령으로 철수할 것을 결심 했다.

  그리하여 18포병대대 3포대는 운산리로 나가 21연대 2대대를 지원하고 있어 사단이 대관령쪽으로 후퇴할 것을 후에 대대장의 짚차에 구경 50기관총을 장치하고 적중에 있는 강릉시내를 돌입하여 시내를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횡단하여 무사히 대관령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대관령쪽으로 철수한 사단은 유천리에서 지휘소를 개설하고 10연대와 21연대를 재편성하는 중에도 18포병대대 장병들은 적의 포병진지를 야간 기습하기로 적의 기습으로 착각한 나머지 침투해온 적을 먼저 구축하기 위해 부대주변을 수색하느라고 동분서주 하다가 시간이 경과되어 세계 전사상 유례없는 포병이 적포병 부대 타격을 하려했던 야간 침투 작전계획을 부지 못하고 말았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사단은 비록 대관령 너머로 철수하기는 하였지만 장병들의 사기 또한 왕성하여 예상외로 견제를 유지하고 병력은 물론 장비까지 성공적인 철수로 전투력을 유지하였다.

4.  교    훈

가.  대포병 사격의 효과적인 지원을 위해 포병추진 운용

나.  수목지역에 순발신관을 사격했을 시 VT효과 감지

다. 평시 철저한 교육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지휘관 부재중에도 차질없는 화력지원

라.  왕성한 사기와 용기(지휘관을 중심으로 전요원 일치단결)

(1)  포위망 속에서도 백병전을 수행하면서 직속적인 사격지원

(2)  철수하지 못한 화포 거부 조치 강구

(3)  특공대를 편성 적 포병 진지 야간 기습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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