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전사

전투사례1. 관측사격 임무수행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10. 24. 10:36
 

1. 관측사격 임무수행

1.  개   요

가.  작전기간 : 1950. 8 13~18

나.  작전지역 : 경상남도 왜관, 다부동 지역

다.  적    군 : 북괴군 제13, 15, 3사단

라.  아    군 : 보병 제1사단 제17포병대대 1포대

2.  상   황

  진목정에서 신주막의 3.4km간을 가리켜 복곡이라 한다. 이 복곡은 좌우측 양편에 경사도가 가파른 표고 300~500m의 능선이 연결되고 신주막에서 “Y”자형으로 합쳐진 5번 및 25번 양도로가 이 골짜기를 통하는 다부동-대구 축선상의 애로이며, 적 기갑부대의 유일한 접근로이므로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사단은 적 전차가 이곳에 집중 투입될 것을 예상하고 이 지역을 담당한 제11연대에 제15연대 2대대를 배속함으로써 복곡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50년 8월 13일 오전 적이 이 접근로를 감제하는 유학산의 일부(837~574고지)를 점령했기 때문에 사단방어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복곡의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만 8.13~18일까지의 전투이다.

3.  작전경과

가.  기동부대

  8월 15일 07:00경 전차 6대와 장갑차(SU-76) 7대의 엄호하에 증강된 1개대대의 적이 5번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 복곡 계곡 돌파를 기도하였다.11연대 제1대대는 즉시 긴급 항공지원과 지원화력을 요청한 동시에 가용한 모든 화력을 총 집중하여 전차와 보병을 분리시키는데 안간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영용고-소이리 간에 설정된 살상지대에는 탄막이 형성되고 맹렬한 최후방어사격을 실시하였다. 또한 전차 특공대는 수류탄만 움켜지고 전차에 뛰어올라 굳게 닫힌 “헷치”를 열려고 하다가 후속하는 전차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곤두박질치면서 죽어갔으나 이러한 필사적 용전에 부딪혀 적의 공격기세가 꺽이고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곧이어 지원포병의 맹렬한 화력이 살상지대에 집중되자 적 보병은 도로 동쪽 356고지로 도주했다.

  이날 밤 적은 소대규모로 분산되어 밤새도록 파상공격을 계속했다. 그들은 1개 분대에 1명꼴로 소총을 휴대한 지휘자가 앞장서고 나머지는 수류탄 5-6발을 갖고 “만세”를 외치며 돌격하다가 쓰러졌다.

  그런데 적은 병사들에게 얼마나 술을 먹였는지 시체에서도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또한 동일 저녁 647고지에서는 8월 17일 저녁 3대대 12중대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8부 능선으로 약간 물러나 암석지대를 사이에 두고 적과 30~40미터 간격으로 대치한 채 8월 18일 아침까지 이곳에서 버텼으나 보급품이 추진되지 않는 등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 강인한 인내력을 발휘한 전투를 실시했다.


나.  포병지원

  11연대를 지원하던 제17포병대대 1포대는 50. 8 .30일 아침 소이리 동쪽 신기동에 포를 방열하였다. 이곳은 북, 동, 남의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자체방어에 유리한 반면 인접부대와의 협조가 곤란한 단점이 있었다.

  포대는 여기에서 11연대를 직접 지원할 태세를 갖추는 한편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개인호를 마련하고 직접조준사격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그러나 난데없이 적전차 2대가 소이리를 통과하고 그 얼마 뒤에 진목교가 폭파되는 폭음이 들렸다. 포대장은 고립된 것을 직감하고 대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한 결과 중대를 지원할 병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야간전투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 할 무렵, 포대진지 남쪽 355고지에서 증강된 1개 소대의 적이 접근하고 있었다.

  포대는 즉시 직접조준사격으로 집중하고 총격전을 벌인 끝에 이를 격퇴했으며 그로부터 약 2시간후 2포대의 엄호하에 삼학동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17:00경 적의 복곡계곡 돌파 저지를 위해 제11연대를 직접지원하던 제17포병대대 제2포대는 아군의 항공 오폭으로 제3대대가 674고지 하단으로 철수하자 이 고지에서 끊임없이 포격을 집중하여 정면의 적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목표 정상에는 포탄이 명중되지 않았다. 다음 날 우계산에 배치된 동 중대 관측장교는 이틀간의 포격에서 단 한발의 포탄도 정상에 맞지 않고 탄착점을 줄이면 근탄이, 더하면 또 원탄이 생기자 홧김에 “올려 50”하고 무전기에 외쳤더니 이것이 적중되어 정통으로 정상에 명중되었다. 관측장교는 감격한 나머지 “중대 10발”하고 효력사를 요청했다. 그제서야 아군 포화가 674고지 정상에 신나게 폭발되었다. 이것은 관측장교 제도가 실시된 것이 얼마되지 않아(50. 8. 18일 대대에 곡사포 18문이 장비되었을 때부터 1개포대 관측장교 3명씩 보직되어 관측사격을 실시하였음) 그 기량이 미숙하여 고각수정을 할 줄 모르고 좌, 우, 근, 원탄으로 탄착점을 유도하였으므로 경사도가 가파른 고지정상을 명중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8.17일 오후 1사단 지역에 배치되었던 미 제 27연대가 18일 저녁 실시된 적의 보전 협동공격을 받았다. 이때 미군 포병 관측장교는 개인호 50미터 전방에 적전차가 육박했어도 후퇴하지 않고 포사격을 유도하여 용맹을 펼쳤으며 그 전차를 후속하던 3대도 맹렬한 포화가 집중되자 곧 철수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난 뒤에 개시된 적의 2번째 공격도 미군의 최후방어사격으로 격퇴되었다. 미27연대는 이날 밤 적이 돌격개시 신호로서 녹색신호탄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돌격을 시작한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녹색신호탄을 발사하여 적을 혼란시키고, 때로는 방어에 유리한 지점으로 유인하기도 했다. 또한 기동공간이 협소한 이곳에서는 방어 정면에 매설한 지뢰가 적을 저지하는데 큰 위력을 발휘했다. 다른게 아니라 방어진지 전방 150-200미터 지점에 지뢰지대를 설치할 때 노면이 단단할 뿐더러 적의 방해사격으로 땅을 파는데 시간이 걸리므로 지상에 지뢰를 방치한 곳도 없지 않아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지도 못한 효과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전진하던 적 전차는 지뢰를 보면 어김없이 정지했으며 뒤따르던 보병들은 그것을 제거하려 했다. 이 기회를 포착한 미군은 조명탄을 발사하고 화력을 집중하여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일 13:00경에는 항공폭격이 실시되었다. 674고지 정상에 배치된 제11연대 3대대는 적의 역습을 물리치고 공격준비를 하고 있을 때 우군기가 674고지를 맹폭했다.

  아군은 우군기를 보고 무방비 상태에서 손을 흔들다가 느닷없이 집중된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에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칠줄 모르고 반복되는 폭격에 나중에는 공황사태까지 빚어져 대대 전투지휘소를 비롯한 전병력이 고지하단으로 철수했으며, 우군기의 보복은 제1대대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3대대의 오폭 피해는 280명의 사상자가 발생되고 생존자가 100여명에 지나지 않아 대대가 와해된 거나 다를 바 없고 게다가 장병들이 받은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3. 22일 10:00경 위봉 골재로부터 진목정으로 빠지는 골짜기에서 백기를 든 북괴군 제13사단 포병연대장 중좌 정봉욱이 귀순하였다.

  귀순 이유는 북괴군 13사단장이 그들의 공격이 실패하고 패색이 짙자 포병 연대장에게 우학산-다부동 일대에 대한 포격에 잘못이 있다고 책임을 추궁하자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하판동 부근 과수원에 교묘하게 된 적 포병진지에는 아직도 122밀리 곡사포 7문과 76밀리 곡사포 13문이 배치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 정보에 따라 우군기의 폭겨과 미군 155밀리 곡사포의 포병사격이 집중되었으며 그 직후부터 적의 포격은 현저히 감소되었다.

4.  교    훈

  왜관 일대의 융단폭격의 북괴군 제2군단의 전위를 상실케하고 보병 제1사단의 용맹이 승리를 안겨준 빛나는 전사이다. 또한 최초로 한미연합 협동체제하에 미 27연대가 투입되어 연합작전을 실시하여 지상에서도 후회없는 결전을 치르었는데 성공의 요인을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겠다.

  첫째, 보전포 협동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이다. 즉 전방표적을 획득하고 처리하는 업무가 신속하고 전차를 따라 산개한 대형으로 공격해오는 적 부대에 대하여 포병화력에 의하여 전차와 보병을 분리 전차전을 실시토록 강요함으로써 상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달성하였다.


  둘째, 관측장교의 과감한 임무수행이 전투의 성과를 확대시켰다.

관측사격임무 수행이 미흡했던 탓으로 포탄의 사탄 산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고 대담성이 결여되었던 당시의 상황하에서 고각수정과경사도가 가파른 지형하에서 과감한 협차 반분이 목표지역을 명중시킴으로써 관측장교에게 새로운 경험과 자신감을 안겨준 것이다. 

  그리고 개인호 50미터 전방까지 적 전차가 육박해도 물러설 줄 모르고 포 사격을 유도했던 관측장교의 정신력은 승패를 떠나 격찬과 모범된 군인상을 연출했다.


  셋째, 장애물과 잘 협조된 화력운용이 예기치 않은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적의 기동축선상에 지뢰를 설치하고 포병의 조명계획하에 정지된 적 전차를 공격함으로써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