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역사

제7장 새로운 전쟁의 시작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7. 10. 05:38

7. 새로운 전쟁의 시작
(From one War to Another)

제1차 세계대전의 생존자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주장 중의 하나는 중포병(heavy artillery)이 전투를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포병의 우세가 다음 전쟁에서도 재차 강조되어야 하는 지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 되었을 때, 이 주장에 대한 교감은 무너졌다. 1918년 포병 대전투(great artillery battle)에서 미래의 본보기를 보았던 사람도 있었다. 참호전은 이례적이어서 결국 미래의 포병은 강행군을 하는 보병과 기병중대 내에서 움직이는 경평사포라고 주장하는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여전히 중 및 경포병, 체계적인 포격, 그리고 융통성을 동일 체계에 대한 반대도 아닌 보완으로 보는 3번째 견해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생존을 위한 주력 중에서 포병 군수품 저장소에 대해서 가장 만족하였다. 그 결과, 1939년 그들이 야전에 배치시킨 포병부대는 1918년의 것과는 약간 달랐다. 즉, 주요한 변화로 대포를 끌거나 운반하기 위한 트럭 사용의 증가, 보조 통신수단으로써 무전기의 도입, 그리고 구형 중포의 일부를 현대식 105밀리 평사포와 곡사포로 대체했다. 사단포병의 기본 편성(75밀리 평사포 3문의 경연대와 155밀리(1917년형) 곡사포 2개 대대의 중연대)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차상급 제대의 지시를 따르는 포병은 세계대전을 2개로 구분하는 20년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재정적으로 제한을 받던 환경은 새로운 평사포와 곡사포에 대한 프랑스 보수주의에 대한 하나의 견해를 제공했다. 1918년 9월에 있었던 대부분의 포병대포는 1년 내지 2년도 채 안되었지만, 전체 전쟁기간 동안 프랑스 중포병에게 제공되었던 “드 방쥬” 시대의 무기를 최근 대부분 교체한 것이 또 다른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고 믿는 무기를 프랑스가 계속적으로 선호한 주요인은 교리에 있었다. 양 대전기간을 소모한 프랑스의 군사설립은 1918년의 방법적인 공격은 속도는 느리지만, 여기서 장차 전쟁에 대한 확실한 승리의 방식을 찾았다고 확신했었다. 결국 이 방식을 만들 당시에는 현존하지 않았던 무기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양 대전기간과 제2차 세계대전 첫 해동안 프랑스 육군은 이와 같이 2개 연대로 구성된 사단포병의 표준형을 존속시켰다. 최초 사단포병 연대의 직계인 경연대는 각각 75밀리 평사포 12문의 4개 대대(후에 3개 대대로 줄어든)로 구성되었다. 155㎜곡사포 12문으로 된 2대의 대대를 보유하였고 이 개선된 모델은 1917년에 소개되었다.  군단포병은 4개의 대대로 이루어진 중포병연대로 구성되었다. 군단포병은 4개 대대로 구성된 중연대, 105밀리 평사포 2개 대대와 155밀리 2개 대대로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 포병편성은(artillery organization)은 포병 일반 예비대(Reserve Generale d' Artillerie)로 알려진 중앙 공동관리(central Pool : 75밀리 평사포로부터 220밀리 곡사포를 가진) 대대에 의해 증원되었다.
포병 일반예비대는 전략적이고 범세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급 제대에서는 포병 일반예비대가 프랑스 참모장이 전선의 특정 부분에 프랑스 장원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주요 수단 중 하나이었다. 이것의 움직임을 가속화하기 위해서 이 예비대에 배속된 대부분의 부대를 차량화하였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작전을 위해 포병 일반예비대에 배속된 대대를 특정 사단이나 군단에 할당하기 위해 배속시킬 수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2년 동안 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포병 일반예비대의 대대를 차량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말과 목초의 부족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포장도로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장으로 이 부대를 이동시키려는 요구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이동을 강조했기 때문에, 많은 차량화 포병은 야지를 횡단하는 기동 능력이 매우 떨어진 차량을 제공받았다. 특히 75밀리 평사포 연대와 소수의 경부대도 (도로 이동이 빠른) 트럭과 (동원으로 징발된 많은 농업용 차량을 포함하는) 소형 경운기를 제공받았다. 이 후자의 부대는 차량화 포병으로서 도착지로 인도하는 트럭의 적재함에 대포와 경운기를 운반했다.
프랑스 육군이 양 대전동안 “미래의 포병전투(artillery battle of future)”로 선정한 모형은 레임에서 꽤 유용하다고 입증된 포병매복(artillery ambush)이 아니라, 그 대신에 “포병이 공격하고 보병은 점령한다”는 방식을 2년 동안 시행하여 마침내 활동하게 된 전투를 연구하여 칭찬하고 겨루어 보겠다고 결정했다. (프란 더(Flanders)에 대한 제1군의 공격은) 1916년 여름에 시작하여 1918년 가을에 끝났었다. 선례가 없었던 포병의 긴 방법론적 포격(methodical bombardment)과  지역 확보, 타 지역에서의 예비대의 소모, 그리고 적 고갈을 초과하는 목적으로 공격을 확대하려는 희망의 포기가 한정된 2개 요소이었다. 
양 대전기간 동안 반복되었던 이 기법의 구호는 “화력의 기동(maneuver of fire)”이었다. 유발된 영상은 나폴레옹(Napoleon) 또는 프레드릭(Frederick) 황제가 근위대를 이동시켰던 것처럼, 폭발단(group of explosion)을 다루는 현대 “과학적인” 지휘관이었다. 현실은 더 단조로웠다. 프랑스 포병은 포대가 한 표적에서 다른 표적으로 신속하게 전환하도록 허용하는 사격통제 체계의 계통적 성격과 마찬가지로 대포의 기술적인 특징은 “사격 한계(fir fan)"가 너무 좁아 ”화력 조각(fire sliver)"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한 “사격한계”내에 있는 표적에게 화력을 신속하게 전환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프랑스 육군은 독창성이 풍부한 개발인 지휘본부   (poste central du group)로 곧 인식될 것을 도입했다. 이것은 포대에게 전술적인 명령을 기술적인 현실로 변환하는 많은 작업을 포대에서 제외시킨 대대장 예하의 작은 본부이었다. 즉, 전장의 특정 대포에게 요망했던 결과를 포대에게 말하기보다는 지휘본부의 책임이 있는 장교가 대대의 3개 포대를 위한 사격제원(firing data)을 계산했다. 
이 기간의 많은 혁신처럼, 지휘본부는 프랑스가 “테일러주의”라고 불렸던 것의 산물이었다. 이것이 대서양의 양쪽에서 미국의 효율성에 대한 전문가인 테일러(Fredrick W. Taylor)가 작업자의 판단에 의존했던 모든 세부공정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에 기초를 둔 표준절차로 대체하여 절차 공정의 “낭비”를 감소시키려는 체계적인 시도이었다. 지휘본부의 경우, 그들의 판단을 표준절차로 교체한 작업자는 전통적인 프랑스 산업의 숙련공보다는 20세기초 미국 기업의 중간 관리자와 같은 포대장이었다.
지휘본부는 프랑스 대대에게 단일 표적에 3개 포대의 화력을 신속하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큰 장점이 있었다. 포대가 공통 조준점(common aiming point)에 그들의 평사포로 기록사격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12문 대포의 화력을 동시에 집중시킬 수 있다. 각 포대를 차례로 기록사격하는 전통적인 사격임무와 비교를 해 본다면,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시간계획표(timetable)와 시간이 소모되는 다른 협조방법만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었던 기습과 심리적 타격의 종류를 제공하도록 약속했었다. 이 체계는 포대장을 “순환으로부터 나오게 하는(out of loop)" 큰 단점이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술적인 무대의 연기자가 아니었다. 대신에 그들은 기술자, 또는 심지어 전화선의 다른 끝에서 음성으로 제공된 제원에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관료주의자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보병전차, 60밀리 및 81밀리 박격포, 그리고 대전차포와 같은 신형 무기가 호송포병(accompanying artillery)의 역할을 완전히 인수받았을 때, 집권화 사격통제(centralization of fire control)를 향한 추세의 결과는 제1차 세계대전의 “위대한 분리”와 함께 시작했던 보병과 포병의 물리적이고 조직적인 분리를 계속할 것이라고 표방해야 했다. 이전처럼 상급제대 본부에게 다음 이동을 협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위해 자의로 보병의 진도를 달팽이 걸음으로 유지했을 때, 분리로 인해 생긴 주요 손실 중 하나는 작전속도이었다.
양 대전기간 동안 대대 및 심지어 더 거대한 포병부대의 사격을 신속하게 집중하는 기법을 개발하는 작업을 열심히 하는 동안, 독일이 전반적으로 취하던 경험은 매우 달랐다. 국경수비대를 창설했던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싸우는 수단이 부족했다는 것을 베르사유 조약(threat of Versailles)때문이라고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후에는 황제에게 충성을 했던 중대, 대, 그리고 포대를 특정 지웠던 장점을 독일 육군에게 복구시키려는 신중한 정책을 추진했다. 국경경비대에 허용되었던 가장 큰 야전대포가 105밀리 경곡사포란 사실과 결합된 이 2가지 요인은 전쟁 전 독일 포병의 포대 지향권을 재창설하려는데 기여했다. 이전처럼, 이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포대장의 권한, 포병부대의 기동에 대한 관심(사격의 이동과 반대되는), 그리고 포병의 활동이 신속한 이동의 규칙이 될 거대한 전역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강조했다.
1933년 히틀러의 장악력을 따랐던 독일군의 재무장은 이러한 추세에 대한 부분적인 반전을 보였다. 베르사유 조약의 거부로 독일 병기창고는 중포병을 되찾았다. 내부 연소기관(internal combustion engine)에 애정을 가진 국가 사회주의자는 전장에서 그리고 전장으로 향하는 독일 육군의 대팽창은 국가 지연행동이었던 전역에서 싸우는 수단을 제공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전된 많은 사상을 근거로 하여 완전히 재편된 새로운 포병 편성이 탄생했다.
이 재구성의 첫 번째 재난은 유산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에 의하면, 적어도 독일 당국이 흡족할 정도로 엄폐된 부대를 공격하는 데는 유산탄이 고폭탄(high explosive) 보다 열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폭탄 설계에 있어서 2차 개선은 보다 효율적인 파편(splintering) 형태로 총신을 짧게 자른 산탄총 효과(sawed-off shortgun effect)에 대한 적절한 모방을 제공하므로 유산탄의 마지막 수명을 단축했다. 개활지에 있는 부대에 대해 적절하게 신관이 장입 된 유산탄의 종말효과를 개선하기 위해 전자식 접근신관(variable-time fuse)을 도입하는 동안, 개선된 고폭탄의 파편효과는 그것을 독일 포병의 신형 통일대포(Einheitsgeschor)로 만들 만큼 충분히 좋았다.
유산탄 다음으로 경평사포 사격용으로 만든 무기가 있었다. 만능인 (대전차포, 야전대포, 그리고 심지어 반공포) 사단 대포로서 역할을 지원할 수 있는 무기를 설계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지만, 독일 당국은 포병의 효과적인 작업을 위해 요구되는 폭발의 비중(과 결과로 나타나는 분산효과)은 진정한 대전차포 또는 방공포가 요구하는 높은 포구초속과 비교할 수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독일 육군은 개선된 105밀리 곡사포를 표준 경대포로 결정했다.
휘발유 부족이 예상되기 때문에, 독일 육군은 105밀리 곡사포를 견인하는 기본 수단으로 말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었다. 차량화 포병부대(일부 105밀리 곡사포, 100밀리 및 150밀리 평사포, 그리고 210밀리 곡사포)만은 말 또는 차량 또는 기갑사단에 배속된 것으로는 효율적으로 끌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프랑스에 비해, 독일 차량화 포병은 야지를 횡단할 수 있는 차량을 제공받았다. 이 차량은 독일 동부 국경에 있는 열악한 도로상태를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속도전을 하는 동안 중포병부대의 신속한 전개를 용이하게 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양대전동안 독일도 사단에 중곡사포 형태의 중포병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일을 했던 150밀리 곡사포와 유사할지라도 훨씬 가벼운 150밀리 곡사포를 제공했다. 비사단의 중포병은 과거 전투에서 독일 포병에게 친숙한 개선된 무기인 100밀리 평사포, 210밀리 곡사포, 그리고 150밀리 평사포의 형태를 취해야만 했다. 실제, 중포병의 주요한 수정은 이것을 이동시키기 위해 훨씬 많은 수송차량의 사용과 그들이 사용했던 화기의 구경과는 상관없이, 모든 독일 포병인은 현재와 같은 병과에 속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만일 연대에 대한 개수화 계획이 지침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독일 계획은 각 보병사단에게 2개 연대(경연대 : 1, 중연대 :1)의 사단포병을 준 것처럼 보였다. 경연대는 105밀리 경곡사포 3개 대대로 구성되었고, 중연대는 105밀리 중곡사포 2개 대대를 가지도록 되어 있었다. 각 4문 단위 3개 포대로 구성되어야 하는 대대가 주어졌다면, 그 당시의 프랑스 사단포병 편성과 표면상 닮은 점이 있었다. 양 연대를 지휘하기 위해 소규모 참모를 가진 포병지휘관의 제공도 그 당시 프랑스의 실시와 비슷했다.
이 닮음은 군단급 제대에서 깨어졌다. 이런 경우가 대부분의 대부분의 제1차 세계대전동안에 있었기 때문에, 1930년대 말의 독일 육군에는 포병군단 편성이 없었다. 대신에 사단의 일부가 아닌 대대는 상황에 의거 군, 군단, 그리고 사단에 배속될 수 있도록 일반예비대로 유지되었다. 사단에 배속될 때, 이 대대들은 연대 중의 하나에 배속되거나, 다른 대대의 예하로 배속되거나 또는 포병지휘관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도록 만들어졌다. 만일 군단 또는 군 포병을 즉흥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면, 사단에서 차출할 포병 지휘관으로부터 지휘를 받거나 독일 편제표나 규정에서 제공된 “유동적인” 포병 지휘관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독일 보병은 프랑스 보병보다 훨씬 큰 정도까지 자신의 “수하포병(hip pocket artillery)”을 제공받았다. 중박격포(81밀리), 75밀리 밀 150밀리 보병 평사포, 벙커나 다른 점표적에 사용할 수 있는 37밀리 대전차포, 그리고 중기관총은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독일 보병연대가 많은 전투에서 싸울 수 있는 능력에 기여할 수 있는 장거리 조준기(long-range sight)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 독일 보병에게 부족했던 유일한 형태의 수하포병은 그 당시 프랑스 기갑교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껍게 장갑화된 “움직이는 토치카(moving pillbox)"인 보병전차이었다. 다른 보병 중화기가 공급받았던 풍부함과 그들이 사용하였던 공격 방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 무기의 부족으로 제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 보병은 피해를 많이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독일 보병과 포병은 “위대한 분리”의 영향으로부터 상대방인 프랑스보다는 고통을 적게 받았다. 그 당시 독일 군사신문에서 발행되었던 1939~41년간 전역의 일화가 대표적이었다면, 독일군 포대장과 대대장은 자신들의 지휘를 더 멀리 보내고서 보병 대대 및 연대와 함께 직접 일을 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사격이 사용되었던 사건이 규칙이었다기보다는 심지어 매우 높은 속도로 실시되었던 작전동안 협동에는 예외적으로 근접과 융통성이 모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에 대한 신뢰의 일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까지의 독일 포병이 가지고 있던 “말을 좋아하는” 전통의 부활에 속했다. 일부는 포대장이 보병전투를 직접 관측할 수 있는 전방 관측소에서 지휘하거나 또는 이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최전방 보병만큼 전방으로 이동하는 자신의 전방관측자로서 지원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신뢰의 많은 부분을 독일 육군의 편성문화에 더 두어야 했다. 테일러주의의 유혹에 완전하게 면역되지 않는 동안, 구성원(특히 장교) 간 그리고 구성원과 조직과의 관계는 명시된 규칙을 전형적으로 고수하는 것보다 자발적인 협조에 있었다.
이것은 1939년 (또는 그 문제에 대해 1914년)의 독일 육군이 “신사회주의자”가 강압적인 행위 속에 자유정신으로 가득한 일종의 공동생활체인 종합적인 이상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군사훈련 형식과 세부 본질에 대한 고수는 그 당시의 어떤 군대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다른 부대와 특히 그 당시의 프랑스 육군과 구별시키는 것은 군기의 근원에 있었다.  대부분의 군인에게는 군기는 행동이 상급자의 말보다는 의지에 적게 순응하도록 개인의 의지를 굽히도록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었다.  독일에 있어서 군기의 원천은 전투 그 자체이었다.
이 차이에는 의미하는 바가 많았다. 독일 포병에 있어서, 이것은 포대는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개별 포대는 소규모의 매우 반응성이 있는 화력을 제공하기 위해 보병을 후속할 수 있었다. 사태가 약간 늦어지면, 자신의 포대 화력을 집중하거나 또는 자신의 화력을 타 대대와 결합하는 다양한 기법에 잘 훈련된 대대로 포대를 재편성하였다. 저항이 매우 강력한 경우에는 대대와 연대는 포병지휘관의 지휘하에 큰 집단으로 편성할 수 있었다. 브루흐뮬러에 의해 유명하게 된 역할을 하는 이 후자의 거장은 저항을 뚫고 나가는데 필요했던 체계적인 포격의 종류를 종합하고, 재차 자신의 포대가 놓여 있는 상황에 재저장할 수 있었다.
독일 포병 편성의 장점은 1939년 9월에 시작된 폴란드 침공에서 명백하게 나타났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독일 경포대는 나이가 많은 독일 포병인에게 경평사포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게 했던 열악한 도로상태에도 불구하고, 강행군하는 보병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상급 조직과 비슷한 것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전투를 계속했던 많은 폴란드의 소규모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주로 “소매”전투로 이루어졌던 전역의 대부분의 전투 성질은 이 근접한 협동을 특히 중요하게 했다. 폴란드 대형이 협조한 저항을 해결할 수 있었던 몇 개의 경우에서 많은 포대의 화력을 결합하는 독일의 능력이 폴란드군 포병의 프랑스식 화력통제(fire control)보다도 우월하다고 판명되었다.
포병 지휘 통제에 대한 프랑스 접근의 순비용은 작전제대보다는 전술제대에서 덜 소요했다. 이것이 전장에서 덜 효율적인 반면, 이것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기 위해 전체 사단, 군단, 그리고 군의 속도 저하는 전역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것은 1939년 3월 프랑스와 폴란드 일반 참모 간 이끌어 낸 협정과 1939년 7월에 서명된 프랑스 우발계획에 의거 1939년 9월 독일에 대한 침공을 착수함으로써 폴란드의 도움이 되려던 육군의 시도가 방해받았다.
침공의 공격개시점은 중립 룩셈부르크(Luxemborg)와 알삭스(Alsace) 산맥 사이에 있는 사르(Sarre) 강 계곡이었다. 목표는 함부르크(Hamburg)이었다. 독일에 해로움을 주는 수단은 제2집 단군의 3개 군사이에 분리된 30여 개의 사단의 조직적인 전진이 되어야만 했었다. 
이 작전은 곧 알려졌지만, 사르 공격의 1단계는 시에그프리드(Siegfired)와 마지노(Maginot) 선 사이에 있는 무인지대의 일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2단계 공격을 실시하는 대형의 우측방을 방호하는 수단으로써 지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3단계의 말에서 프랑스는 시에그프리드선 20km 후방에 있는 딜린겐(Dillingen)과 홈버그(Hombrug)를 향해 10km 정도 돌진하는 계속적인 전진을 허용하기 충분할 정도의 폭으로 시에그프리드선의 돌파구를 포병이 사격할 수 있는 작전의 기지를 가졌을 것이었다.
관련된 상대적인 전투력이 주어지면, 이것은 어렵다고 판단되어서는 안 되었다.  반정도 끝난 시에그프리드(siegfried)선 후방에 얇게 퍼진 독일은 수개의 국경수비대, 그리고 더욱 새로워진 프랑스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는 쇠퇴된 37밀리 대포로 무장된 약간의 대전차 중대, 그리고 고속기동 전역에 참가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거나 또는 열악하게 훈련받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로 주로 구성된 소수의 도보이동하는 보병사단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한 날인 1939년 9월 3일에 하달된 공격명령은 처음에는 잘 진행되었다. 9월 4일부터 9월 12일까지 프레터라트(Gaston Pretelat)가 지휘하는 제2집 단군의 부대들은 시에그프리드 선으로 서서히 초월했다. 각 사단은 축차적으로 전진했다. 측방은 인접사단의 존재에 의해 확보되었고, 정면은 사격 진지에 있는 20문의 75밀리 평사포와 12문의 155밀리 곡사포에 의해 엄호를 받았다. 이 방법으로 일부 프랑스 사단은 단 하루 만에 8km를 전진했다. 그러나 전체 부대는 포복으로 일일 1km 내지 2km 속도로 전진했다.
독일의 저항은 미약했다. 대부분의 순찰대는 프랑스의 침략자에게 사격도 하지 못하고 도주를 했다. 대부분의 지상지뢰와 부비츄렙에 의해 발생된 프랑스 사상자도 마찬가지로 경미했다. 이와 같이 전진속도의 주 결정요소는 모든 고려사항보다도 두꺼운 포병사격의 탄막(a curtain of artillery fire)으로 전체 보병을 방호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시하는 질서 정연한 전투교리이었다.
때때로 9월 10일 또는 11일 최전방 프랑스군은 시에그프리드 선의 전방 외부작업 중 하나인 155밀리 곡사포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다. 80발이 사격되었으나 피해는 탐지되지 않았다. 폴란드에서 온 소식이 희망을 주는 원인이 되지 않았을 때, 이것은 프랑스에게는 나쁜 소식이었다. 사르 공격이 기초로 하였던 2개의 주요 가정사항(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전진은 늦을 것이며, 시에그프리드 선을 통과하는 프랑스의 전진은 빠를 것이라는)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9월 12일, 프랑스 최고사령부는 공격을 중단시켰다. 10월 4일, 마지노선에 대한 독일 공격의 위험을 확신한 프랑스 최고사령부는 점령한 독일 영토로부터 완전히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프랑스 제2집 단군은 진입했던 독일로부터 철수를 했다. 11일 동안 프랑스군은 매 순간 측방이 확보되고 마지노선의 대피호에 도달할 때까지 자신의 포병 엄호하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조심스럽게 후퇴했다. 독일군은 프랑스의 시간계획표를 전복하지 못하는 약간 산만한 공격을 착수했다. 6주 동안 약 1,800명 정도의 사상자(사망, 부상, 포로)가 발생했다. 그러나 단 1명의 독일 병사도 폴란드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독일 보병사단 및 군단의 성공과 상대방인 프랑스의 실패가 폴란드의 몰락에 많은 영향을 준 반면, 공적의 최대 몫은 관례대로 독일 기갑사단의 공으로 돌려졌다. 이로 인해 다른 도구와 훨씬 빠른 작전 속도를 가진 다른 전쟁에서 전투를 했던 육군 내의 많은 전통과 강력한 힘을 가진 경력으로 만들어진 진정한 군을 형성했다. 독일 기갑부대가 창조자의 눈에는 단지 번득임이었던 폴란드 전역이전연도에, 포병은 이 새로운 조직이 필요했을 포병형태에 대해 논의를 많이 했다.
전격전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는 현상에 대한 가장 두각적으로 앞선 2명인 풀러(J. F. C Fuller)와 리델하트(Basil Liddell Hart)는 보병이 점령(occupy)을 할 수 있도록 포병은 공격(conquer)을 하는 영국의 시도가 실패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그들에 대한 많은 청중들도 마찬가지로 솜머 대전투와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유사한 큰 실패를 보았다. 이와 같이 그들이 통상 전차를 포병대포를 옆에서 지원하기보다는 대체하는 무기로서 제시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미래전에 대한 풀러와 리델하트의 전망에 대한 보다 완전한 해석은 어떤 형태의 야전 및 중포병의 보유를 제공토록 했다. 풀러보다는 덜 극단적인 리델하트는 주포탄(배타적이 아닐지라도)이 연막을 방출하는 자주무기(self-propelled weapon)로 기본적으로 구성된 포병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는 야전군에 소규모 비율의 견인포병(towed artillery) 대포를 유지하는 것을 계획했다. 반대로 풀러는 견인포병을 도시 또는 광범하게 축성된 지역에 대한 포위자에게만 유용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후자가 지원을 제공하는 동안 대전차무기로서 기본적으로 지원하는 야전군의 평사포와 곡사포는 자주가 되어야만 했다. 이것의 지원은 기본적으로는 적의 눈을 멀게 하는 연막탄 사격과 부가적으로 건물지역에 제공하는 엄폐를 적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한 고폭탄 사격으로 구성될 것이다.
영국의 전차광은 포병이 기갑전에서 수행할 훼손 역할을 혼자 하도록 하지 않았다. 유럽의 다른 한편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상대방 퇴역 오스트리아 장군인 아이만스베르거(Ludwig Ritter Von Eimannsberger)도 필연적으로 결론을 같이 내렸다. 1934년, 그는 전차전(Tank Warfare)란 책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1878년에 태어난 아이만스베르거는 합스버그(Hapsburg) 제국에서 포병장교로서 대부분의 직업군인의 생활을 보냈다. 이 제국이 1918년 말 몰락했을 때, 그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전차전이란 책이 지침은 될지라도, 그를 매혹시켰던 전투는 도불(Double) 전제국 군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서 대단한 돌파전투에 있었다. 이 전투의 하나인 1918년 8월 8일 아미언(Amiens)에서의 영국의 전차공격은 아이만스베르거가 설계한 이상적인 전차와 차량화 사단작전을 위한 각본을 제공했다.
양 사단형태에는 아이만베르거가 “보병 평사포”(동시대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보병에게 직접 화력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47밀리 무기)라고 명명했던 것을 충분하게 제공받았다. 각 차량화 보병 또는 전투공병대대는 6문의 이 무기를 가진 1개 중대가 있었다. 추가적인 연대(각 6문의 평사포를 가진 9개 중대) 또는 이 평사포 2문이 각 차량화 보병여단에게 제공되었다. 차량화 사단의 각 소중중대에게 47밀리 대전차포 1개 중대와 전차사단의 각 소총중대에게 47밀리 대전차포 4개 중대의 비율로 결론이 났었다.
대전차포의 관대한 할당은 보병여단으로 끝나지 않았다. 각 사단의 포병연대는 “3중 목적 평사포(triple purpose gun)"로 불려졌던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후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88밀리 대공포로 널리 알려졌던 십자형 발사대 (cruciform platform)에 탑재된 75밀리 견인 평사포이었다. 360도 회전과 90도에 가까운 수직각으로 포신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 포가(mount)는 전차 및 항공기에 사용될 고속 평사포(high velocity gun)를 허용했다. 포수와 부대 참모는 전통적인 포병의 부분적인 대체로서 고속 평사포를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포병절차로 훈련을 받았다.
아이만베르거 차량화 사단의 전차 및 항공기 연대는 75밀리 전차와 항공기 평사포 3개 대대 (3개 포대로 이루어진), 중전차 및 항공기 평사포(85~100밀리) 1개 대대, 그리고 관측파견대로 구성되었다. 전차사단의 전차 및 항공기 연대에는 더 소규모이며 이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중대대 및 관측파견대가 결여된 자주 장갑포가를 가진 평사포로 장치된 75밀리 전차 및 항공기 3개 대대가 있었다.
자신의 관측파견대와 중대대를 보유한 차량화 사단의 전차 및 항공기 연대는 전차사단의 포병연대보다 집중된 간접화력을 제공하도록 준비가 잘 되었다. 그러나 양개 편성은 직접사격 형태에 더 적합하게 설계되었다. 심지어 아이만스베르거는 “포수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전방으로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찬사를 받는다.”라고 기록까지 했다. 아이만스베르거는 전차와 포병을 단일 병과로 통합하는데 대하여 잠시 생각에 잠김으로써 전차 및 차량화 사단의 포병 구성분야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끝내었다. 전차에 대한 직접사격을 하기 위해 최적화된 자주 평사포와 대전차포를 제공받은 전차간 차이는 타 전차형태보다는 항상 크기가 작은데 있었다.
짧은 기간(1942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동안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독일 실험부대는 훌러와 아이만스베르거의 작품 속에서 설명되었던 대형과 현저한 닮음을 가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개전했던 결정적인 병과(보병과 포병)는 거의 사라졌다. 보병은 전차와 교전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 보병대대는 특수 대전차 대대보다도 대전차포를 더 많이 보유했다. 포병은 상당히 수적으로 감소되었고, 전차의 기타 수단으로써 직접사격을 지원하는 추가적인 과업에 의해 오늘날의 전통적인 간접사격 임무가 없어지게 되었다. 사실, 훌러가 예견한 대로 공성포병만이 제1차 세계대전의 상대방의 것과 닮음을 유지했다.
훌러가 아프리카 군단에서 정립한 생각의 정도는 독일 제90 경사단의 기동분야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942년 5월 롬멜(Rommel)의 공격부터 (6월 21일) 토브럭(Tobruk) 함락 후 대형을 확대할 때까지, 제90 경사단은 7개 트럭화 대대로 구성되었다. 이중 4개는 보병대대, 2개는 대전차대대, 그리고 1개는 포병대대이었다.
제90 보병 사단장이 “완전 병기창(entire arsenal)"로 묘사했던 4개 보병대대는 재래식 차량화 보병이나 혹은 대전차부대로서 근무하도록 간주되었다. 이전 과업을 위해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 그리고 보병 평사포가 완전하게 보충되었다. 차후 임무를 위해 각 분대는 1941년 러시아로부터 노획한 많은 7.62밀리 평사포 중 1개를 제공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푸티로브 평사포의 직계인 러시아 7.62밀리 평사포는 높은 포구초속, 평탄도, 그리고 탄두를 선택할 수 있었다. 전차격멸기(tank killer)로서 대전차탄 사격시에는 88밀리 대공포보다는 부차적이었다. 고폭탄 사격시에는 1급 보병 평사포와 약간 퇴물이 된 평사포로서 지원을 했다. 사실 제90 경사단의 특수 대전차대대 중 1개 대대를 무장하는데 충분한 좋은 대포이었다. (대전차 대대는 독일이 제작한 50밀리 대전차포를 제공받았다.). 즉 7.62밀리 평사포는 제90 경사단의 7개 전투대대 중 6개 대대의 기본무기가 되었다.
물론 무장, 훈련, 그리고 편성면에서 3개 부대형태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보병부대는 대전차 및 포병대대가 결코 가지지 못했던 근접전투에서 교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마찬가지로 포병대대에는 간접사격을 조직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유일한 부대란 고유의 특징이 조금 있었다.
이런 편성에 대한 독일당국의 선호도는 북아프리카 근무를 위해 (함께 수선한 것과 상반되는) “주문 설계된” 독일 대형에서만 볼 수가 있었다. 이것이 제90 경사단이나 훌러와 아이만베르거의 환상적인 대형같이 대전차포를 충분하게 보급받았던 차량화 보병집단인 제164경 사단이었다. 그러나 이 사단의 포병은 얼마 되지 않는 5개 포대(105밀리 곡사포 3문과 75밀리 산악포 2문)로 구성되었다. 
아이만스베르거와 훌러에 비해, 양대전동안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졌던 독일 전차 이론가인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전통적인 포병이 기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믿었다. 이 견해는 2개의 통찰력 추세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첫째, 단조로움에 있었다. 구데리안은 포병으로 임무를 최상으로 완수하였던 기갑전장에 관한 많은 과업을 예견했다. 둘째, 숭고함을 싫어했다. 기갑사단에 포병을 존속시키려는 것이 일반적인 군사문제에 대한 구데리안의 접근법과 일치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구데리안은 기갑사단의 차량화 포병은 차량화 보병과 협동하기 위해서 운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적 관측자의 눈을 멀게 하고, 적 대전차포의 활동을 방해하며, 그리고 전차의 접촉 단절을 지원하기 위해 연막탄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적 대전차포와 포병진지를 고폭탄으로 공격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이것은 마을, 숲, 반사면, 그리고 적이 숨길 수 있는 기타 장소를 포격할 수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야전포병은 제한된 목표와 유사하게 부여된 과업을 공격하는 동안, 선정된 전장의 일부를 분리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철학적인 면에서 보면, 포병은 기갑사단에 소속해야 한다는 구데리안의 믿음은 군사이론에 대한 그의 경험적인 접근을 반영했다. 소수의 핵심 원리로부터 유도하여 자신의 견해와 설계에 도달했던 그들에(훌러와 아이만스베르거)에 비해, 구데리안은 구성원 각자가 가장 빛나는 이론을 거부할 만큼 충분히 복잡한 실질적인 사업에 자신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근접 지형 또는 인공 장애물 때문에, 기갑사단의 보병이 기갑사단의 전차보다 앞서 공격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포병지원은 다른 종류의 보병이 원했던 포병지원과는 약간 달랐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데리안의 생각대로 설계된 사단의 포병분야는 훌러와 아이만스베르거가 설계한 사단포병보다는 보병사단의 포병에 더 근접하게 닮음을 유지했다. 실제 1930년 말 독일 기갑사단의 포병연대와 동일 기간의 독일 보병사단의 포병연대와의 주요한 차이는 기갑사단 포병이 완전히 차량화되었다는 데 있었다.
제7펜져 사단의 105밀리 곡사포 대대장의 상세한 사후보고가 지침이 된다면, 1940년도 가솔린 차량을 사용하는 독일 포병은 1914년의 말이 끄는 상대방의 포병과 밀접한 닮음을 간직했다. 벨지움부터 프랑스 해협까지의 독일 국경선에서 대대를 차출했던 6주의 전역동안 이 장교는 광범위한 최소기법을 사용했다. 그는 무제(Meuse)를 감제하는 고지대에서 차폐된 포대에게 사격을 명령했고, 개인적으로는 빌레(Ville) 근처에 있던 산업 쓰레기 더미에서 대포병 사격을 지시했으며, 차량화 보병사단에 배속된 포병 연락반의 사격요구에 응했고, 그 당시 독일 전차가 사용했던 쐐기대형으로 전개하여 개활지 너머로 대대 접적행군을 수행했다. 이 대형으로 대대장(독일 전차를 공격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던)은 영국 전차의 공격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전차 15대를 파괴시켰다. 다른 시간에 프랑스 전차 집단군에 대한 역습을 하기 위해 105밀리 곡사포 4문을 끄는 4대의 1/2톤 견인차로 구성된 사격여단(firing brigade)을 편성했다.
마치 목록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처럼, 롬멜 장군은 같은 사단에서 사단장과 포병 전방관측자로서 근무를 했었다. 그가 사단의 본대 전방에서 지휘용 전차를 타고 있었다면, 포병 화력(또는 경우에 따라 스투카스(Stukas)에서 투하된 폭탄)이 도상에 있는 정확한 지점에 놓여지도록 무선 전문으로 지시를 자주 했을 것이다. 이 지시에 대한 암호화 요구를 제거하기 위해, 그는 돌격선(관련된 참가자의 지도에 2개의 동일한 경계 표시사이에 그려진 선)으로 알려진 기법(trust line)을 사용했다. 일단 설정이 되면, 돌격선은 지도상에 있는 어떠한 지점도 지시할 수 있는 참조점으로 제공되었다.

'포병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장 전 후 발 전  (0) 2007.07.10
제8장 포병 단독으로  (0) 2007.07.10
제6장 포병전술의 대가  (0) 2007.07.10
제5장 보병과 포병의 분리  (0) 2007.07.10
제4장 포병과 보병의 역할  (0) 2007.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