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포병전술의 대가
(Bruchmuller)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많은 일을 했던 수십만의 포병 장병 중에서 브루흐뮬러(Georg Bruchmuller)만이 유일하게 영원한 명성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장군들의 많은 공적은 각주로도 취급되지 못했지만, 중령으로 조기 전역한 브루흐뮬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문헌에서 영구적인 자리를 계속 유지했다. 브루흐뮬러의 일부 명성은 작가로서의 기술과 자기 발전을 선호함에 연유했지만, 대부분의 명성은 부동의 업적에 근거를 두었다. 그가 이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포병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년 반동안 보낸 공성포병 대대장과 그 후 포병연대장 직책을 수행했던 브루흐뮬러는 동부 전선의 독일 지도부에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1916년경 그는 전선과 보병에게 매우 높은 포신속도(ratio of tube)의 특징을 가진 짧고 날카로운 공격적인 포격을 조직하기 위해 여기저기로 이동하는 “공중비행”하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예를 들어 비토니츠(Witonitz) 교두보(1916. 11. 1)에서, 제121보병사단 예하의 3개 보병연대는 보병이 공격하기 전에 5시간 15분 동안 포병대포 156문과 참호박격포 49문의 화력지원을 받았다. 5개월 뒤(1917. 4. 3)에는 포병대포 300문과 참호박격포 100문이 토보리(Toboly) 교두보를 공격하는 제1국경수비 보병사단을 지원했다. 이 포격은 5시간 45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사단급 공격에 추가하여, 브루흐뮬러는 더 큰 기획을 했다. 동부 사라시아(Salicia) (1917년 7월)와 나로쯔(Narocz) 호수(1916년 4월)에서 2개의 군단 공격에 참가했던 포병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리가(Riga)(1917년 9월)에서는 후티어(Oskar von Hutier)의 8군단 예하 13개 사단이 승리할 수 있도록 포격을 지원해 주었다. 리가 전투 20일 후, 리가로부터 동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야곱슈타트(Jakobstadt)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승리를 한 적도 있었다.
야곱슈타트 전투 후, 브루흐뮬러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전선을 옮겨 다니면서 주요 공격에 대한 포병지원을 조직하기 위해 “공중비행”하는 사람의 역할을 반복했다. 전쟁 마지막 해, 브루흐뮬러는 독일의 서부전선에서 전술적 승리를 한 캄브라이(Cambrai) 역습 (1917. 11. 30), 피카디(Picardy)에서의 “황제의 전투”(1918. 4. 9~18), 그리고 체밈 더 다임(Chemim des Dames) 공격(1918. 4. 9~18)을 위한 포병준비를 성공적으로 하여 신뢰를 얻었다.
이와 같이 전투에서 브루흐뮬러가 성공한 것은 이동 탄막사격(rolling barrage)을 잘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법은 그의 기교 가방에 있는 확실한 핵심도구였지만, 이 기법의 사용도 브루흐뮬러의 최고 기록을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솜머(1916. 7)에서의 영국과 참파뉴(Champagne) (1917. 4 니벨레 공격)에서의 프랑스는 자신들의 이동 탄막사격을 제대로 못 했다. 마찬가지로, 브루흐뮬러의 상자형 탄막사격(box barrage), 고정 탄막사격(standing barrages) 그리고 그 당시의 다른 표준시간기법(standard technique of time)의 사용도 그를 독일 동료나 동맹국보다 두드려지게 하지 못했다.
적시 적소에 이 기법을 사용할 줄 아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브루흐뮬러는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이 능력은 기계적인 요인보다는 다른 요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예를 들어, 브루흐뮬러는 이동 탄막사격을 사용할 때의 핵심 요소가 이 사격에 후속하는 보병과의 접근 정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간 심리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브루흐뮬러는 포병에 대한 신뢰와 보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서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다. 포병에 대한 신뢰로 모든 포대가 올바른 탄종과 신관이 결합하여 이동 탄막사격에 사용된 것을 확신했고, 근탄은 반드시 최소로 지켜질 것이라는 것을 보장하는 ‘음악의 같은 면’을 읽도록 구성되었다. 보병에 대한 믿음으로 보병은 작렬하는 포탄 차장막(curtain of exploding shell)의 뒤를 50미터 내로 뒤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보병에게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보병의 신뢰를 얻기가 2가지 일 중에서 더 쉬운 일이었다. 기술을 가진 포수라는 평판 때문에 더 쉽게 신뢰를 받았다. 전쟁의 마지막 2년 동안 동부전선 독일군의 사실상 지휘관인 호프만(Max Hoffmann) 장군은 “브루흐뮬러의 지휘하에 포병에 의해 사전에 준비된 공격이 확실한 공격이었고, 동부전선의 부대는 브루흐뮬러와 그의 참모에 의해 준비된 과업은 성공할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서 진군했다.”라고 기록했다.
또한 브루흐뮬러는 자신의 기술에 대한 전달자로 역할을 했다. 처음부터 그의 일부 공격에 소대장으로 참가했던 하사관을 포함하는 보병 및 포병장교에게 강의한 경험이 있었다. 이 강의에서 그는 자신이 계획한 포병계획, 적에게 대해 자신이 의도한 포병 화력의 효과, 그리고 신호탄, 연락장교, 전방관측자와 같은 협조수단(coordination measure)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강의 후에는 광대한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만일 브루흐뮬러의 명성이 확고한 능력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은 곧 사라졌을 것이다. “마치 본능에 의한 것인 것처럼, 단일점을 파괴하는데 필요한 탄약의 양을 정확히 알고 있는” 그의 재능은 백치 같은 석학이 준 설명할 수 없는 선물이 아니라, 수년 동안 무시되었던 종말탄도(terminal ballistic)란 군사과학을 연구한 결과이었다. 그가 도보포병(foot artillery)의 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요새에 대한 요망효과(desired effect)를 얻는데 필요한 특정 형태의 포탄량을 알아내는 일을 했다. 이로부터 각종 야전축성을 처리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브루흐뮬러는 자신의 종말탄도에 관한 지식으로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파열하는 210밀리 곡사포탄에서 생긴 파편은 후방으로 날아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210밀리 곡사포 포탄은 아군 보병으로부터 멀리 이격 된 목표에만 발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경평사포는 높은 발사속도 때문에 주어진 시간에 곡사포보다 더 많은 가스탄(gas shell)을 발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평곡사포를 최고의 대포병 무기로 만들었다. 경 및 중곡사포가 평사포보다 근탄(short round)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경 및 중곡사포를 이동 탄막사격을 제공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 당시의 포병 기재(artillery materiel)에 대한 기술적인 특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브루흐뮬러는 독일의 적군에게 신속하게 전승되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과업 편성 포병(task organizing artillery)에 대한 계획을 고안할 수 있었다. 적군은 군단장에게 속한 더 무거운 대포가 대포병전에 집중되어야 하며, 사단포병의 경평사포는 보병의 관심표적(target of interest)에 사격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반면, 브루흐뮬러는 이 관계를 반대로 결론 내렸다. 그는 대부분의 경평사포를 군단장에게 직접 응답하는 대포병 특임부대(counterbattery task force)로 편성하였고, 곡사포는 사단을 책임지는 보병지원 특임부대(infantry support task force)에 포함시켰다.
브루흐뮬러는 독일군 명령체계의 융통성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다. 영구적인 군단포병 편성이 없었기 때문에, “사물의 자연적인 질서(natural order of thing)”에 대한 브루흐뮬러의 반전을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독일 포병은 과업 편성 방법을 사용했다. 특히 3년 동안의 참호전으로, 독일 포병은 작전지역의 사단포병 지휘관에게 공성 포대장, 대대장의 실시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습관을 갖게 했다.
브루흐뮬러가 조직을 위해 더 멀리 둔 디딤돌은 “유동(floating)” 연대본부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1916~1917년 겨울, 보병사단에게 주어진 포병연대본부이었다. 또 다른 것은 포대와 대대의 구성이 상이한 사단, 군단, 군에 배속되었던 공성포병 연대본부이었다. 어느 경우든지, 그것들은 분리된 포대와 대대를 다양한 크기의 집단으로 집결시킬 수 있는 틀을 브루흐뮬러에게 제공했다.
이 집단들이 실제로 했던 일은 브루흐뮬러의 포격에 참가했던 한 독일 군단(바바리아 1군단)의 포병 편성 예에서 알 수 있었다. 공격 시, 바바리아 1군단은 2개 사단(제1, 2 보병사단)을 제1선에, 3번째 사단(제30 보병사단)은 제2선에 배치한 3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포병 자산은 4명의 사단포병 지휘관과 참모, 11명의 (야전 및 공성) 포병연대 참모, 40명의 포병대대 참모, 126개 사격포대로 구성되었다.
제30 보병사단의 포병지휘관은 대포병 특임부대를 지휘하여 보고를 군단장에게 직접 했다. 바바리아 1, 2사단의 포병지휘관은 보병지원 특임부대 중 1개 부대를 지휘하여 보고는 각 사단장에게 했다. 연대장중 1명은 장거리 특임부대(long-range task force)를 지휘했다. 그도 대포병 특임부대장처럼 군단장에게 직접적으로 귀속되었다.
장거리 특임부대를 제외한, 이와 같은 특임부대는 연대본부 예하에 2개 집단과 대대본부 예하에 소집단으로 세분화되었다. 세분화 정도는 군단지역을 나눈 구역과 일치했다. 소집단이 주로 1가지 형태의 무기로 구성된 반면, 집단은 다양한 무기로 구성되었다. 집단 크기인 장거리 특임부대는 2개의 소집단으로 나뉘어졌다.
대부분의 대포병 특임부대는 포병 포대로 구성되었다. 일부 100밀리 평사포와 중곡사포 포대가 추가로 제공되었다. 보병지원 특임부대는 기본적으로 중곡사포로 구성되었으며, 약간의 포병포대와 경우에 따라 210밀리 곡사포가 추가되었다. 장거리 특임부대는 장거리 무기(일부 평사포와 150밀리, 100밀리 중평사포)로 구성되었다. (일반적인 모양이 주어지면, 대포병 특임부대에 배속된 포대는 대부분 구형 평사포(M1896n/A)이었고, 보병지원 특임부대에 배속된 포대는 경곡사포, 그리고 장거리 특임부대에는 사거리가 연장된 M1916 평사포로 구성되었다.)
6개의 평사포 포대에는 이와 같은 특수임무가 부여되지 않았다. 대신에, 공격 제1선에 있는 6개 보병연대 중 1개 연대를 호송포대(accompany battery)로 지원했다. 그들은 보병 평사포의 2개 포대로 보강되었으며, 이중 1개 포대는 제1선 사단에 배속되었다. 호송포대는 구형인(그러나 가벼운) M1896n/A 평사포로 장비되었다. 보병 평사포 포대는 특수한 보병 평사포(목적용 독일무기와 러시아 개량 평사포)로 장비되었다.
그들의 기능적인 이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특임부대의 포병 대포는 단일 임무로 제한되지 않았다. 주어진 임무에 할당된 대포의 수는 화력계획의 특정 단계에 따라 상이했다. 즉 대포병 특임부대의 평사포와 곡사포는 독점적이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대포병 노력과 관련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보병지원 특임부대의 곡사포, 공성 박격포, 그리고 평사포는 전부는 아니지만 통상 보병을 직접지원했다.
1918년 7월 15일 공격에서, 바바리아 1군단 포병은 3시간 40분간의 공격준비사격(preparatory fire)을 5단계로 구성된다. 10분 동안 지속된 1단계는 참호 박격포에 의해 증원을 받던 보병지원 특임부대는, 대포병 특임부대가 예상되는 적 포대 위치에 공격하는 동안, 전방진지를 포격하였다. 선택된 포탄은 고폭탄과 최루탄이 혼합된 “청십자(blue cross)”이었다. 청십자가 제공되지 않은 무기는 고폭탄으로 사격을 했다.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장거리 특임부대는 지휘소, 교환대, 본부, 막사를 공격했다.
75분간 지속된 2단계에서는 보병지원 특임부대와 대포병 특임부대는 적 포대진지에 평균적으로 독일군 2개 포대가 적 1개 포대를 동시에 포격하는 정도로 화력을 집중했다. 이 임무를 위한 주요 포탄은 “청십자”와 높은 독성가스인 디포스겔들(diphosgenedls)을 포함하는 “녹십자(green cross)”이었다. 적 포대에 사격하기에는 사거리가 미달하는 참호박격포는 전방 보병진지에 포격을 계속하면서 적 철조망의 간격을 제거했다. 장거리 특임부대는 멀리 있는 표적을 공격했다.
90분간의 3단계에서는, 보병지원 특임부대는 보병이 관심을 갖고 있는 전방 표적을 재차 공격했다. 곡사포, 공성 박격포, 그리고 평사포는 방어거점과 방어 진지에 고폭탄을 사용하여 집중했다. 적 포수들이 2단계의 가스 집중공격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하도록, 대포병 특임부대는 가스탄으로 적 포대에 계속 사격을 했다.
4단계는 75분이 아닌 15분 만을 유지한 점을 제외하고는 2단계의 반복이다. 이 반복의 미세한 결과는 적 포대 주변에 있는 가스를 재보충하는 것이다. 그러나 4단계 사격의 주목적은 적으로 하여금 아군이 공격을 하려고 한다고 기만하는 것이었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된다면, 적은 대피호에서 참호로 이동하여 전방 진지에 대한 사격을 멈추도록 대응할 것이다.
이 때문에, 5단계에서는 30분 동안 집중된 고폭탄으로 적 보병을 공격했다. 적군이 미끼에 걸리지 않았을지라도, 적 전방 진지에 대한 보병지원 특임부대와 참호 박격포의 포격으로 독일 보병이 출발 진지(jumping-off position)로 이동할 수 있게 폭발의 벽(wall of explosion)을 제공했다. 적이 임박한 보병의 공격을 관측하지 못하게, 일부 중곡사포(독일 대포만이 연막탄을 제공받음)는 연막탄(smoke shell)을 발사했다. 대포병 특임부대는 장거리 특임부대가 오전 내내 공격을 했던 원거리 표적에 사격을 하는 동안, 적 포대에 대한 가스량을 유지했다.
5단계(공격준비사격 10분과 “H시”이전 10분)의 마지막 10분 동안, 독일 포병은 이동 탄막사격의 초탄을 사격했다. 중간 및 중포, 참호 박격포와 함께 공성박격포는 적의 전방참호 뒤에 있는 표적으로 전이했다. 대포병 특임부대의 평사포의 반정도는 이동 탄막사격에 참가하기 위해 대포병 사격임무를 중단했다. (이때 적 포대진지에 사격할 2문 정도의 평사포는 남겨 두었다.)
이동 탄막사격의 주요 부분은 고폭탄으로 구성되었다. 공격하는 독일 보병은 가능한 한 폭파벽 뒤에 근접해 있었다. 때때로, 이 두 번째 탄막이 독일 보병으로부터 600미터 이상 이격되면, 2번째 탄막을 “청십자”와 고폭탄으로 혼합했다. 독일 보병이 600미터 이내에 있으면, 2번째 탄막은 고폭탄만으로 구성했다.
이동 탄막사격이나 보병 무기가 전진 간 부딪친 모든 문제를 처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동 탄막사격은 임시 포병사격(ad hoc artillery fire)에 의해 보강되었다. 이 사격은 보병과 같이 이동하는(배속이 아닌) 기동 전방관측자(mobile forward observer)나 보병연대에 배속된 포병 연락장교에 의해 조직되었다. 전자는 소집단의 고정된 관측소에 전화로 연결된 포병 하사관이었고, 후자는 전방지역 관측자를 보병연대에 연결하기 위해 보병연대가 발전시킨 통신망을 자신들의 전화를 사용하는 초급장교이었다.
이동 탄막사격으로 공격 중인 보병은 적 진지를 통과하여 6~7㎞(대부분의 적 포병에 의해 점령된 지역뿐만 아니라, 1 혹은 2개의 적 보병진지를 뚫고서) 전진했다. 일단 독일 평사포는 사거리가 미달되면, 일부를 전방으로 추진했다. (바바리아 1군단의 경우, 126개 포대 중 41개 포대가 공격하는 2개 사단과 함께 전방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포대는 예비로서 군단, 군, 그리고 집단군에 남아 있거나, 또는 다른 대형에 재배속되었다.)
일단 과정이 이와 같이 진행되면, 독일은 그들 자신이 참호전에서 기동전으로 복귀한 것으로 간주했다. 결국에는 보병지원 특임부대, 대포병 특임부대, 장거리 특임부대는 해산되었고, 포대들은 그들의 모체 대대로 복귀되었다. 대대는 집단구성을 각 사단이 직면한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한 새로운 집단을 형성했다. 예로서, 군사령관은 1개 공격에 증원된 각 보병사단의 포병을 3개 집단으로 나누도록 제안했다. 2개의 포병대대와 중간 곡사포를 가진 수개의 포대로 구성된 직접지원 집단은 2개 전방 보병연대에 각각 배속되었다. 100밀리 및 150밀리 장거리 평사포, 그리고 210밀리 중곡사포와 함께 기타 포대로 구성된 3번째 집단을 사단장의 직접지휘하에 남겨 두었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었다면, 브루흐뮬러의 폭격 효과는 무력화(neutralization), 기만(deception), 물리적 파괴(physical destruction)의 혼합이었다. 단독으로 처리하면, 완벽한 효과가 없었다. 독일 포병이 결함이 없이 브루흐뮬러의 계획을 수행했을지라도, 계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적 포대와 기관총, 바보가 아닌 적 지휘관, 그리고 특히 손상을 입지 않은 적 시설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다양한 브루흐뮬러 포격의 불완전한 결과는 견딜 수 없는 전체 효과를 만들기 위해 상호 간 그리고 잘 훈련된 보병의 일과 결합했다.
공격 후 몇 시간 만에 적 포병 진지에 도달(그래서 격멸하는)할 수 있기 때문에, 적 포병을 무력화하는 것이 대포병 노력에 요구되는 전부이었다. 비슷하게도 자신의 무기(수류탄, 화염방사기, 유탄발사기, 경기관총, 중기관총, 보병 평사포)로서 고립된 기관총을 파괴할 수 있던 독일 보병의 능력은 이 위험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을 (이동 탄막사격으로) 무력화시켰다.
기만 노력은 적군의 포수와 보병 모두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대피호에 머물도록 “훈련시킴”으로서 이 무력화 효과에 기여했다. 자신의 평사포에 뛰어가 최초 10분간 사격으로 대응하려던 적 포병은 2단계 사격(대부분 독일 포신이 적 포대 진 지를 사격하는)이 명중되는 바로 그 시간 평사포에 도달했다. (4단계) 포격의 허위 “목적”에 의해 사격 진지로 이동하여 대응하려던 적 보병도 비슷하게 대피호를 떠나는 순간 집중사격에 노출될 것이다. 생존자들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피호로부터 정열적으로 뛰어옴으로써 실제 포격에 덜 대응할 것 같았다.
브루흐뮬러의 포격 과정에서 발생한 파괴도 표면상으로는 다른 유사한 규모의 포격 결과와 다르지 않았다. 1916년 2월 베르던에서 독일군의 포격, 동년 7월 솜머에서 영국군의 포격, 또는 1917년 4월 캄파뉴에서 프랑스군의 포격과 같은 다른 포격도 보병이 공격한 땅을 점령하여 역습에 대비할 수 있도록 중요지형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주로 몇 정의 기관총만이 살아남을 정도로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전체 계획은 실패하게 되었다.
반면에 브루흐뮬러는 완전한 파괴에 목표를 두지 않았다. 즉, 적 시설에 대한 불완전한 파괴도 그의 목적을 충족했다. 많은 적 기관총 진지, 피난처, 참호 박격포, 보병 평사포, 포병 대포는 브루흐뮬러의 포격 중 직접타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런 파괴도 적 방어의 허점, 화력에 의해 노출된 접근로와 다른 벙커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 면이 노출된 벙커와 박격포 사격을 할 수 없는 계곡이 남게 된다. 이 허점만이 독일 보병이 전체 방어체계를 처리하는 과정을 시작하는 데 필요했다.
이율배반적으로, 모든 관심표적을 파괴하지 못하는 독일의 능력도 그들의 전체 노력을 도울 수 있었다. 장거리 특임부대가 모든 지휘소, 본부, 교환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면, 독일군 보병이 적 후방지역으로 빠르게 밀고 들어갈 때 종종 발생하는 공황도 이렇게 빨리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적 지휘기구가 본래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와 같은 혼란에서도 더 좋은 상태로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일군 보병의 침투전술(돌풍부대)과 결합된 브루흐뮬러 기법은 독일에게 서부전선에서와 비슷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분리된 5단계 포격으로 지원을 받은 독일군 사단은 참호전이 시작된 후 3년 동안 그 어느 군도 서부전선에서 해내지 못한 일(적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전체 사단을 격멸하며, “초원지대 너머로”로 눈을 돌리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브루흐뮬러의 기술은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 모든 기동에는 대기동이 있듯이, 브루흐뮬러의 포병연합(orchestration of artillery)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8년 7월, 고대도시 레임의 동쪽에 위치한 포도 재배 마을에서, 프랑스 제4군단은 브루흐뮬러의 최종 포격에 의해 개방된 독일의 “침투”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독일 공격의 실패는 공격 그 자체만큼이나 희가극적이었다. 브루흐뮬러의 방법은 면밀한 시간 사용, 독일 보병이 이동하는 동안 적 포병의 무력화, 이동 탄막사격 바로 뒤에 후속하는 독일 보병, 그리고 충격과 혼란으로부터 적 체계가 회복하기 전에 처음 몇 시간의 공격으로 독일 보병이 적 평사포에 도달하는 것에 기초를 두었다. 프랑스의 대기동은 이와 같은 리듬을 깨뜨려 독일의 공격력을 빼앗아 버렸다.
프랑스가 방어를 하기 위해 땅을 점령하는 방식을 극단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이처럼 할 수 있었고 또한 이와 같은 성공이 가능했다. 전쟁 첫날부터, 지금도 인접한(레임 서쪽의) 5군이 사용한 표준적인 접근은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는 영토의 최전방 가장자리에 주저항선을 만들기 위해 보병 집단을 사용했다. 4군이 사용한 접근은 최전방 프랑스 참호후방 4~5㎞ 떨어진 곳에 주저항선이 위치하는 당시의 독일 방어배치와 비슷했다.
최근 영국에서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던 그와 같은 침투 형태를 막기 위해 연속적으로 주저항선을 만들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주전선이 독일 참호 박격포와 포병의 최대 사거리를 벗어나는 후사면에 주로 위치했기 때문에 포격에 취약하지 않았다. (후사면 진지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베르던에서 프랑스군 후사면 진지를 타격한 경험이 있는 독일군에게 어려움을 상기시키고 후사면에 주저항선을 두는 정책에 대한 연속적인 변환만을 요구했다.)
프랑스 제4군단 예하 전방사단들은 중대의 반과 기관총 사수를 배치시킨 주방어선 전방 약 3,000미터(최전방 참호 후방 1,000~2,000미터)에 방어거점을 설치했다. 이 지형에 파급하는 효과 때문에(주어진 프랑스 진지지역은 프랑스 전선과 평행한 2~3개의 연속적인 능선 정상에 있었다.), 방어거점을 북쪽(전방)과 남쪽(후방) 경사면에 위치시켰다. 주저항선과는 달리, 방어지역의 방어거점은 뚫을 수 없는 장벽을 형성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라, 독일 공격을 격퇴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수백 미터 북쪽에는 “전초선”이라 알려진 제2방어지대가 있었다. 방어지역의 방어거점보다는 작지만 전초선의 방어거점에는 보병 1개 소대 또는 감편된 보병소대와 한 무리의 기관총 사수가 배치되었다. 그들의 더 큰 상대처럼, 전초에도 독일군 공격을 저지하고, 주저항선에 대해 잘 준비된 공격을 실시하는데 필요한 독일군의 행동의 자유를 막는 임무가 있었다.
이를 위해, 전초선의 방어거점은 국지지형을 지배하는 동-서 능선의 후사면에 위치했다. 이렇게 위치했기 때문에, 전초선의 방어거점은 독일군의 관측과 화력에 취약하지 않았다. 특히 독일 포병이 그들을 찾아내거나 파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이러한 후사면의 입지는 전진하는 독일군을 측면과 후방에서 기습적인 집중공격(hail of bullet)으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증가시켰다. 이 방어선을 설계한 프랑스 공병은 프랑스군의 상호지원이 보장되도록 관리했다. 즉 방어거점을 공격하려고 시도하는 독일군은 다른 방어거점에 있는 프랑스 기관총의 사격권 내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위치했었다.
전초선 전방의 전방참호는 2~3인용 관측소로 대체되었다. 결정적인 공격인 경우, 이 관측소에는 단지 (신호탄이나 전서구(전령용 비둘기) 또는 전화로) 경보를 전파하는 임무만이 주어졌다. 일단 이 임무를 완료하면, 그들은 가용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관측소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프랑스 제4군의 새로운 방어전술은 또한 프랑스 포병의 위치를 변경시켰다. 표준적인 경험에서는 포병을 프랑스 최전방 진지 3~4km 이내에 두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대포는 독일군 진지 안으로 4km 이상 종심 깊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4군은 포병을 주저항선 후방에 위치시켰기 때문에, 대부분의 프랑스 평사포는 무인지대로부터 5km 이상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전개 형태에는 독일군 진지에 대한 사격효과가 감소되는 손실이 있었다. 극소수 대포만이 1km 후방에 있는 표적을 사격할 수 있었다. 혜택으로는 대부분의 프랑스 대포가 독일 경평사포와 곡사포의 사거리를 능가하는 데 있었다. 프랑스 평사포와 독일 기구관측자, 지상관측자, 그리고 음향 및 섬광거리측정 분견대간 이격거리는 과거보다도 더 늘어났었다. 더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평사포를 독일 대포병 조직으로 분리하는 2 또는 3개의 낮은 능선의 좋은 기회가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독일도 이와 같은 기법을 배웠고,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전술에 적절하게 적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전방전선보다는 주저항선에 최소한 그들의 포격을 집중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방어의 성공은 프랑스 제4군이 평소처럼 일을 수행한다고 독일에게 확신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즉, 프랑스군은 거의 4년 동안 참호전을 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역을 포기하기보다는 인원과 평사포가 피해받더라도 싸우는 쪽을 택했다.
형세를 유지시키는 많은 일들이 한 포병부대 집단에게 주어졌다. 새로운 포대가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것처럼, 프랑스 최전방 전선 후방에 위치한 많은 포대가 새로운 주저항선 또는 저항선 후방에 진지를 재배치하는 동안, 전방지역에 위치한 남아 있던 대포는 평상시와 같은 요란사격 발수, 참호습격 지원사격, 그리고 적 습격에 대한 “보복” 사격을 유지해야만 했다. 독일 음향 및 섬광거리측정 분견대를 기만하기 위해, 이 대포는 (단일, 쌍, 또는 완편 포대로) 버려진 각 포대진지에서 사격을 보장하는 사격 진지로 이동할 것이다.
프랑스 기만계획의 2번째 핵심 요소는 마치 전술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전방참호에 병력을 계속적으로 배치시켜야만 했다. 실행하기는 쉬웠지만, 이것이 프랑스에게 중요한 2가지 제한사항을 주었다. 첫째, 독일군 포격이 시작되기 전에, 전선참호로부터 보병이 충분히 철수할 수 있도록 독일 공격에 대한 경보체계를 유지해야 했다. 둘째, 주방어선은 임박한 공격에 대한 경보를 보병이 받아 전선으로부터 철수하여 당야에 전선으로 복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전선에 근접해야 한다. 이 2가지 제한사항 때문에, 바로 프랑스군이 주저항선을 독일 포병의 사거리 너머에 위치시키려던 최초 계획의 시행은 방해를 받았다.
이렇게 판명됨에 따라, 이 정책은 고통을 받아도 될 만큼 가치가 있었다. 독일군이 전방참호를 통과할 때까지 프랑스 보병의 배치는 비밀로 남아 있었던 반면, 프랑스군은 포병부대를 후방으로 전환하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독일군 항공기 조종사, 기구 조종사, 음향 및 섬광부대, 심문자, 그리고 첩자들은 레임지역의 프랑스 포병부대를 평소보다 더 후방에 배치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움직임을 독일군은 방어전술에서의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독일군은 그들의 장사정거리 평사포(100밀리 중평사포와 1916형 사거리-연장 77밀리 평사포)의 일부만을 프랑스 전선에 더 가깝게 이동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프랑스 전략첩보 기관에서 나온 독일군 공격에 대한 사전경고와 일상적인 요란사격(harassing fire)은 수개의 독일군 임시 탄약집적소에 (상당한 성과를 주는) 타격을 했다. 1918년 7월 7일, 프랑스 제4군 사령관인 고라우드(Henri Gouraud) 장군은 자신의 부대에게 임박한 공격을 경고하고, 임무를 상기시키며, 신속하게 참가하도록 독려하는 일일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전혀 실현되지 못했다. 7월 14일 오후 8시, 프랑스 습격반은 26명의 독일군 포로를 포획했으며, 7월 15일 12시 10분부터 독일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돌격부대는 4시간 20분 후에 출발 진지(jumping-off position)를 떠날 것이라는 소식을 가지고서 복귀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고라우드 장군은 “적 공격준비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오후 11시 30분, 침묵으로 시야로부터 숨겨져 있던 포대가 행동으로 들어갔다. 고라우드 장군은 독일군 공격이 이날 아침에 정말로 예정되어 있었는지 또는 조그만 이익을 위해 “전력을 다했는지”를 궁금해하는 동안, 약 40분간에 걸쳐 프랑스군의 포탄은 독일군 진지 전방에 떨어졌고, 자정이 10분 지나서 독일군은 포격을 시작했다. 첫 번째 일제사격 간 장거리 중평사포의 포탄이 고라우드의 지휘소에 전력을 공급하는 동력실에 명중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고라우드는 기운을 내어 배짱을 부렸다. 그는 참모장에게 “나는 대포사격에서 이렇게 많은 즐거움을 결코 누리지 못했다.”라고 털어놓았다.
50km가 넘는 전선에 대한 300개 이상의 프랑스 포대가 참가한 공격준비 파괴사격의 효과는 다양했다. 일부 사단은 상당히 고전했으나, 어떤 사단은 교전이 거의 없었다. 독일 탄약창의 폭발이 가장 큰 피해이었다. 관측소에서 볼 때, 프랑스군의 사격이 독일군의 사기에 충격을 주었다는 증거가 별로 없었다. 경험 많은 모든 장병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단지 포격의 규모만으로도 통상적인 요란사격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지식으로부터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기습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프랑스가 독일을 기습했다는 인식이 오직 유일한 논리적인 단계이었다.
아마도 독일 보병부대의 출발진지에 떨어진 진 것이 공자에게는 가장 큰 피해이었다. 이전의 공격에서, 적 전선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 이 전방참호는 독일 보병에게 비교적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적에게 가까이 갈수록, 결국에는 적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강렬한 대구경의 포격에 빠뜨릴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레임 동부의 프랑스군 전선참호는 비어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군 포격은 우군사격에 의한 피해의 두려움으로부터 제한을 받지 않았다.
프랑스군 공격준비 파괴사격의 효과는 독일군 포격의 비효과와 비례했다. 가장 근접한 프랑스 표적에 할당된 참호 박격포 포탄은 비어 있는 참호에 떨어졌다. 대포병 임무가 부여된 평사포와 중대포에 의해 사격된 가스탄과 고폭탄은 오랫동안 비어 있던 적 포대진지에서 폭발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바람의 영향으로 철수하는 프랑스군보다도 전진하는 독일군이 가스를 더 많이 마셨다.) 공성박격포의 사격으로 파괴해야 할 점 표적도 마찬가지로 포기했다.
오전 3시 50분, 독일 포병의 노력의 중심(the focus of effort)을 대포병 노력에서 이동 탄막사격으로 전환했다. 처음에는 사전에 설정된 속도로 이동하는 이 거대한 화력의 장막(curtain of fire) 때문에 그들이 사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 보병은 프랑스 1 참호를 돌파하는데 분명히 어려움을 거의 겪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그곳에 진입하게 되면, 자신들은 곤경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참호를 대피호로 사용했다면, 그 대피호에 남아있는 겨자탄 가스(mustard gas)와 교통호를 차단하는 철조망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리나 일단 개활지로 이동하면, 독일군은 전방으로 갈수록 더 강력해지는 프랑스군 포병 화력에 취약해졌다.
독일군은 제1참호선을 넘어 프랑스 전초선을 돌파했다. 약하게 설치된 장벽의 주성과는 독일 보병부대를 방호 탄막(protective barrage)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있었다. 독일 보병연대가 프랑스군 방어거점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풍부한 화력(보병 평사포 소대, 호송 평사포 포대, 경 참호 박격포, 총류탄, 기관총, 그리고 소수의 화염방사기)을 사용했기 때문에, 탄막은 습관적인 속도로 이동했다. 그 결과 이동 탄막사격을 보강하도록 계획된 화력이 공격 중인 독일군을 지원하는 주 화력이 되었다.
독일군들은 방어지역에 있는 강력한 거점을 많이 직면했다. 이 때문에 많은 독일군 부대는 계획보다 1시간이 늦은 오전 8시 30분까지도 프랑스군 주저항선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정오까지, 독일군은 우군 포병의 중요한 화력지원도 받지 않고 프랑스군 주방어선을 강습하는 국지적인 시도를 수 없이 감행했다.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적 화력에 대한 노출을 최소화하면서 소부대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새로운 침투전술을 가진 독일군 공자도 극도로 불리하게 전투를 했다. 참호 박격포의 화력, 기관총, 자동소총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 포병의 완벽한 힘에 종속된 독일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벙커, 대피호, 프랑스 진지를 광활하게 구성하는 일부 참호체계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각적인 돌파는 전혀 불가능했다.
매 시간이 지나가며 따라, 최초 돌파를 확장하기 위해 예비로 보유했던 독일군 부대(포병, 보병)는 프랑스군 진지로 근접 이동했다. 근접 이동하며 따라, 예비대의 손실은 프랑스 포병의 화력에 의해 점차로 증가했다. 이런 손실은 그들 앞에 있는 통로는 비교적 깨끗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전과확대 부대가 밀집대형으로 전방 이동했다는 사실에 의해 분명해졌다.
프랑스 주저항선에 대한 최초 공격이 실패하자, 독일군은 수십 미터를 후퇴하여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독일군 사령관은 정오 경에 새로운 공격을 결심했다. 그러나 일부 독일 포병만이 공격준비사격에 참가했다. 따라서 공격하던 보병부대는 아침나절의 전투에서 상당히 많은 피해를 입었다. 완강한 프랑스군 방어체계와 4군 지역의 거의 모든 프랑스 평사포가 사격에 참가했던 방어탄막(defensive barrage)을 접하게 된 2차 공격은 조금도 전진할 수 없었다.
오후 7시에 시작된 3차 공격도 프랑스의 역습에 의해 선수를 당했다. 비록 이 전투가 단지 국지적인 승리에도 불구했지만, 독일 당국에게는 동부 레임에 대한 공격이 끝났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소수의 독일군 부대는 계속 전진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임무는 공격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급조된 독일군 진지를 적합한 방어체계로 전환시키는 데 있었다.
서부 레임에서 프랑스 제5군을 공격한 독일군은 상당히 진출을 했다. 브루흐뮬러의 포격과 침투전술을 결합한 덕택으로, 그들은 재빨리 프랑스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했으며, 프랑스군 포대진지를 사정없이 파괴했으며, 그들의 전술적인 승리를 작전적 승리로 전환하기 위해 위협을 했다. 그러나 제4군의 승리는 너무나 완벽하여 이 지역에 있던 연합국의 모든 예비사단을 이 위협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무너진 전선 후방에 강력한 방어전선을 재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공격해 오는 독일 제7군의 우측방에 강력한 역습을 할 수 있는 부대를 충분하게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5달 뒤 독일 최고사령부에게 평화제의를 결심하도록 한 제1차 대연합 공세의 시작이었다. 레임에서 독일군이 공격개시를 한 지 3일 후, 프랑스군과 미군은 이 지역 전체를 공격했다. 며칠 후, 독일군이 공격을 재개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해 오늘날의 일반 공격에 영국군이 분명하게 참전했다.
몇 년전 러시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그들 스스로 기동전의 대가라고 입증을 받았던 독일군은 기동전의 복귀로 많은 이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1918년 여름, 독일군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다. 장교단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중대를 예비역 소위가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부족한 식량, 감기, 저질의 보충, 진급의 불만 등이 그들을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들었던 4년 전의 독일군 사기와 물자 품질을 저하시켰다.
포병의 관점에서 볼 때, 개활지에서 승리를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방해물은 말의 부족에 있었다. 심지어 레임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일부 포대는 포대 대포를 동시에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부족했다. 많은 부대를 평시 기존인 포대당 6문의 대포로 복원할 수 있는 평사포의 재고와 경곡사포를 끌 수 있는 팀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량 수송도 많은 원조를 제공하는데 실패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완전 차량화 포병부대(motorized artillery unit)의 실험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트럭으로 끌거나 운반된 대포는 완벽한 도로에서만 이동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독일군은 서구 연합군보다 훨씬 적은 트럭과 운전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독일군은 차량화된 중포대로 보충된 6개의 완전 차량화 포병연대에 가끔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약점이 견인 수단의 부족 또는 의지의 부족이던 간에, 독일 육군은 1918년 11월 11일 전쟁을 중단했다. 전투가 중단되어, 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적에게 지난 4년 동안 배웠던 것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예측 한대로, 도달된 결론은 조사되었던 사실만큼 사실을 탐구하는 사람들과 많은 관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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