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역사

제5장 보병과 포병의 분리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7. 10. 05:36

5. 보병과 포병의 분리
(THE GREAT DIVORCE)



모든 주요 교전국이 포병 창설을 크게 확대했던 참호전의 첫 2년 동안, 이러한 성장은 협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포병과 보병 간의 증가된 분리(공간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모습에서)와 일치했다. 일부 발전(전화기, 섬광신호, 전방관측자)은 이러한 추세를 완화시켰다. 대포병사격의 문제에 대한 증가된 관심도 이 분리를 증가시켰다. 참호 포병(trench artillery)으로 언급되었던 3번째 개발품은 그 당시의 “진정한” 포병이 최전방 참호로부터 행군을 용이하게 계속하는 동안에, 보병과 “수하(hip pocket)" 화력지원수단 사이에 있던 간격을 좁히는 일을 하였다.
분리 과정은 간접사격기법의 도입과 함께 전쟁 이전에 시작되었다. 전장에서 보병과 포병을 협조시키는 어려운 과업을 해결했던 개발품의 강타는 전술 상황에 대한 감각을 가진 관측장교와 이 강타에 영향을 주기 위해 포병이 할 수 있는 것을 사용했던 경험으로 다소 완화되었다. 즉, 전화로 자신의 포대와 연결된 포병지휘관이 있다는 것은 보병과 함께 전방에 있다는 것이 사선(firing line) 가까이 자신의 기관총이 있다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험은 처음부터 포병지휘관을 보병과 함께 전방에 두지 않았다. 그 대신에 포대장, 대대장, (그리고 독일의 경우) 연대장, 그리고 여단장은 대포와 피지원부대의 대략 중간지점에 있는 고지대에 위치한 관측소에서 지휘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러일전쟁 동안, 언덕에 앉아 전화기로 자신의 3개 포대 사격을 지휘했던 러시아군 포병대대장의 경우가 최초의 예이다.) 실제 보병과 함께 있는 포병 장병은 비교적 계급이 낮아서 전술적인 결심자라기 보다는 종종 기술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로 제한되었던 중위(프랑스, 영국)나 하사관(독일)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후자의 과업을 위해, 독일과 프랑스는 결국에는 포병 연락장교(artillery liaison officer) 제도를 도입했다. 이 포병 중위는 특정한 포병부대보다는 피지원 보병대대와 영구적인 관계가 있었다. 다양한 통신수단(전화, 전령, 통신용 비둘기, 신호용, 그리고 전쟁 말의 무전기)을 제공받았던 포병 연락장교는 특정 포대를 위해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원부대가 요구하는 포병을 “모아야” 했다.  즉, 연락장교는 지역 내에 있는 많은 포병과 연결한 후 보병 지휘관과 협조하여 가장 적합한 화력을 다양한 종류의 화력수단에게 요청했다.
독일 육군에 있어서 포병 연락장교의 지위는 진지를 점령한 사단이 전투부대장(battle troop commander) 제도를 채택한 1917년에 강화되었다. 전투부대장은 통상 자신의 특정 지역 내에 있는 모든 지원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은 전선의 보병대대를 지휘하는 대위급 장교이었다. 즉, 그는 자신의 대대와 다양한 참호 박격포, 중기관총, 보병 소총, 자신의 지역에 머물고 있는 타 부대에 추가하여 자신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지역으로 보내어진 포병을 포함한 모든 부대를 지휘했다. 이 때문에 포병 연락장교의 요청이 지시로 변환되는 효과가 있었다.
반면에, 독일군도 역시 1918년 공격에서 동일한 자원을 제공받았고, 유사한 권한을 부여받은 기동포병 연락장교(mobile artillery liaison officer)를 운용한 반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공격하는 보병과 지원포병 간의 협동을 보장하는 주요 수단으로 시간계획표(timetable)가 있었다. 1914년 10월 벨리에서 사용되었던 간단한 시간계획표에서 예정표(schedule)는 사격시기(timing of fire) 뿐만 아니라 위치까지 통제하는 복합문서로 곧 발전되었다.  공자의 과업이 단일 방어 참호에서 연속된 참호와 그 뒤에 방어지역으로 대체됨에 따라 복잡하게 되었을 때, 전방 참호의 정상에서 그 후 적 1 참호 후방선까지 전방 이동된 고정 탄막사격은 사전에 설정된 속도로 전방 이동하는 고정 탄막사격의 연속인 “기어 돌아다니는(creeping)" 또는 ”이동(rolling)" 탄막사격으로 변화되었다.
이와 같은 탄막에 대한 이상적인 진행속도(rate of progress)를 계산하는데 심각한 고통이 자주 뒤따랐을지라도, 호기는 보병의 보조와 일치하지 않았다. 1916년 7월 프랑스가 솜머를 공격하던 중 자주 발생했던 것처럼, 만일 보병 공격이  초기에 돈좌되었다면, 탄막은 보병도 없이 이동을 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탄막이 제공하려고 설정했던 “제병 효과(combined arms effect)"는 유효하게 파괴되었다. 한편, 독일 알파인 군단이 프러리(Fleury) 계곡에 대한 공격처럼, 보병이 베르던 주변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예상보다 빠르게 전방으로 이동했다면, 자신들의 포병에 의해 자신의 진로가 차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동 탄막사격은 많은 포대의 과업이었기 때문에, 이동 탄막사격은 포선(gun line)과 가장 안전한 통신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고정 관측소를 가지고 있는 비교적 상급제대(사단이나 군단)의 포병장교의 창작품이었다. (신호수단이 허용되는 경우) 탄막이 너무 늦거나 또는 너무 빠르다고 관측소에게 신호할 수 있도록, 보병 대대장과 연대장에게 다양한 섬광신호와 봉화가 제공되었다.
역시 방어 탄막사격(defensive barrage)을 요청하기 위해서 참호전에서도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다. 이 고정 탄막사격은 적의 공격을 중단시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부차적으로 개활지로 이동하는 많은 적 보병을 고착시키기 위해 공격을 받고 있는 참호전방에 즉각 실시되었다. 특히 참호전의 많은 소규모 작전(습격대, 정찰조, 소규모 공격과 같은)이 야간에 발생하는 경우에는, 꽃불 신호(pyrotechnic signal)가 일을 꽤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간에 수행되었던 대공격에서 봉화(rocket)는 햇빛과 수 없이 폭발하는 포탄과 경쟁을 해야 했다.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우군에 의한 사격(friendly fire) 현상에 관해 가장  유명한 연구가인 프랑스 펄신(Alexandre Percin) 장군에 의하면, 참호전의 출현도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군 포병에 의해 죽은 프랑스 병사의 수를 감소시키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는 진지전이 우군 영토가 끝나는 곳과 적 영토가 시작되는 곳에 관한 확실성을 증가시켰다. 또 한편으로 소규모 지역에 투발 될 수 있는 복합 연막합성, 먼지, 화재, 소음(전화선 절단을 언급하지 않은)과 함께 투발 되는 많은 순수한 화력의 량은 명확한 피아 식별과 신호 인식을 자주 못하게 했다.
보병전투에 포병을 동시에 개입시키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때, 기술적인 발전은 효과적인 대포병전 참가를 보다 쉽게 했다. 다른 많은 기술적인 발전처럼,  개척자는 이전세대 공성포병 병과장교의 다양한 일을 구축할 수 있었다. 작금의  전문가에게는, 자신의 평사포를 말조(team of horse)나 휘발유 동력을 사용하는 경운기에 부착시키려는 생각은 간접사격보다도 더 신기했다.  실제로 요새전에서 차폐물 뒤에 위치한 대포의 간접사격은 현대시 초부터 사용되었다. 상대적으로 장거리인 중대포와 요새에 인접한 지형이 공성대포를 은폐할 수 있는 많은 장소를 제공하는 경향과 결합되어 요새에 있던 방자는 보이지 않는 포병으로부터 포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방법은 각 요새 주변에 대한 광범위한 청음 연구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식으로 무장된 요새의 포병장교는 상대적인 힘 또는 약점에 따라 불가사의 한 화포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것은 지형에 대한 특별한 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법은 야전포병이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였다.
참호전이 시작되면 포병부대(특히, 중포병부대)는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머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실험은 영국에서 음향에 의한 거리측정으로 알려진 - 보완되었다.
진지전이 서부로 전환된 이후, 새로운 기법이, 즉 섬광에 의한 거리측정, 소개되었다.  이 기법은 지도 제작자의 삼각측지기법에 기초를 두었다. 알고 있는 거리에 있는 관측자는 진지와 화포의 섬광을 연결하는 방위각을 기록할 것이다.  그다음 기록을 비교하고 기저와 정점으로서의 섬광의 위치와의 거리를 가지고서 삼각형을 작도할 것이다.  이 삼각형은 관측자에게 지도상에 공격 중인 화포의 표정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적 포병 화포의 위치를 표정하는데 사용되는 세 번째 방법은 공중관측이었다.  비행기보다 무거운 물체와 중선에서 관측자는 방해하는 지형의 특징을 볼 수 있고,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풍선의 장점은 한 장소에 머물 수 있어 관측자는 오랫동안 지형의 구석구석까지 연구할 수 있었다. 한편 비행기는 적 영토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1914~1915년 겨울 동안 이 세 가지 기법이 사용되는 동안 문제점들이 바로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두 가지 주요 범주로 구분되었다.
첫 번째는 “혼란”이다.  포병 화포가 동시에 사격을 할 때, 기록은 어느 화포에 해당되는지 결정하는 것이 어렵다.  두 번째는 “통신”이었다. 음향 및 섬광거리측정 진지에 위치한 관측자는 그들이 섬광과 기록물을 볼 때, 서로 이야기하는 수단을 발견해야 하였다.  항공기에 있는 관측자는 지상에 있는 인원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종류의 관측자는 상호 간, 그리고 그들의 자료를 활용할 포병과의 통화할 때 사용할 언어를 개발해야 했다.
1917년 중간 무렵, 친숙한 통신수단(무선과 전화)의 결합은 전쟁무기라기보다는 9단계 과학과제와 유사한 다양한 장차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1915년 가을과 같이 이 문제가 풀리기 전에 서부전선의 육군은 대포병전 사격을 위하여 포병의 일부를 남겨 두었다. 1916년 초기, 베르던에서 독일군은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프랑스군 포대 위치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화력의 집중을 좋아하고 미리 제공된 곡사포로서 독일군은 그들이 위치를 탐지한 많은 포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적 포대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은 사격하지 않은 포대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포대의 대량학살로 이어지지 않았었다. 한꺼번에 모든 포대가 사격을 할 때에는 어느 특정 집단의 화포의 특성을 분별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포병지휘관들은 두 가지의 간단한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대포병전의 위협을 많이 감소시킬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일상적인 작전을 하는 동안 대부분의 화포는 침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규칙적인 방식으로 사격하는 화포는 동시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한 유일한 결점은 보병과 협조를 할 때 이것 때문에 포병은 융통성이 많이 줄어졌다는 것이었다.
많은 수로서 사격하는 포대(방어시 탄막사격과 같은 임무)는 적이 공격할 때 유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공격을 방해하고 있는 기관총을 파괴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대포병전투는 보병지원으로부터 자원을 뽑고, 공식적으로 보병과 협조하도록 배당된 것에 대한 완전한 사용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실패에 대한 보상하기 위해 나타난 무기들은 매우 다양하였다.
그것들은 기존의 장비를 보완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고물 수집상에 수집되어 있는 조잡한 발명품으로부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장비까지, 세련되지 않은 꼭지형 박격포로부터 매끄럽게 고속 화포까지 포함되었다. 그것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자신의 포병을 가지고 있는 전방에 배치된 보병에게 제공되었고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참호형 포병(trench artillery)”라고 불리었다.
당시의 분쟁에 대하여 대개 가까이 에서 관찰하는 습관과 그들로부터 배우려는 의지 덕택에, 프랑스 북동쪽에 있는 울창한 수목지역인 알고네(Argonne)는 프랑스군과 독일군 모두가 궁지에 빠진 첫 번째 지역이었다. 단거리 전투에서는 독일군 포병은 독일군 보병과 적절하게 협조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져왔다. 단거리에서는 상대적으로 평탄도를 가진 독일군 야전포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는 계곡에 그것들이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장거리에서는 독일군 포병은 프랑스군의 75밀리 야포를 능가하였다. 알고네에서 독일군 보병은 이 새로운 무기의 가치를 알게 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고사계 사격이 제공하는 장점에 추가하여 지뢰살포기는 보병들이 그들과 직접적으로 통화할 수 있도록 근집해 있다는데 가치가 있었다. 전통적인 포병 화포가 후방으로 이동할수록 이러한 연락의 용이성은 높게 평가받았다. 이러한 평가는 알고네에 있는 독일군 지역 지휘관인 제5군의 빌헬럼 황태자와 베를린에 있는 군사산업 집합체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독일군 육군의 지뢰살포기의 숫자를 대단히 증가시키는 계획으로 발전되었다. 황태자는 부왕인 카이져에게 특별하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의 참모는 중포와 다른 포위전 장비를 가지고 일을 하는 일반참모장교인 맥스 바우(Max Bauer) 중령과 매우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바우는 추가적인 지뢰살포기를 설계하고 만드는 회사인 Krup과 Rheinmetall과 매우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종말에 도달한 프랑스군에게도 역시 지뢰살포기는 신속하게 평가되었다. 1914년 9월 초에, 프랑스 당국은 독일군 무기에 대한 그들의 자신의 복제품을 얻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었다. 필요할 만큼 이상적은 아니지만 중간의 해답을 박물관과 프랑스 육군의 병기창에서 찾을 수 있었다.
루이스 필리페(Louis phillippe)의 통치기간(1830~1848)과 근접한 직후에 프랑스 주물공장에서는 수많은 소형의 동으로 만든 총구로 탄약을 장전하는 박격포를 생산하였다. 흑색 장약주머니가 제공된다면, 이러한 매끄러운 총구멍을 가진 무기는 개선된 탄두를 적 참호에 손쉽게 그리고 적절한 방법으로 던질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사실상 더 벤지(De Bange) 체제의 80밀리 산악포의 야간 현대화된 화포로의 개선은 무거운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운반대(수레바퀴 포함)를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 폐물이 된 무기는 오늘날 “주둥이형 박격포(spigot mortar)”라고 불리게 될 무기의 기초가 되었다. 이 화기는 포신 안에 포탄이 장전되기보다는 포신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부산물인 새로운 장치는 창안물과 이 창안물을 고무시킨 참호 박격포로 명명된 창-지뢰 창안물(lance-mines Gatard)로 알려졌다. 포신의 크기는 더 이상 제한요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창-지뢰 창안물은 다양한 크기의 탄두를 제공할 수 있었다. 표준화된 포탄 무게는 58, 78, 또는 102kg으로서 각각 18, 25, 또는 30kg의 폭약으로 충전되었다.
이와 같은 즉석에서 만든 작품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참호박격포에 의해 프랑스를 여전히 앞서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당국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참호 박격포를 만든 다소 알려지지 않은 공병장교 두첸(Duchene) 소령에게 문의했다. 두첸이 만든 이 무기는 6kg의 폭약으로 충전된 날개가 달린 포탄을 발사하는 주둥이형 박격포 58T이었다.
58T는 “진정한 포병(real artillery)"의 생산에서 절약된 부품으로 만들어졌다.  장비의 포신(barrel)을 형성하고 있는 58밀리 직경의 강철 몸통은 105밀리 화포의 반동 구조(recoil mechanism)를 위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며, 발사체(projectile)의 몸체를 형성하고 있는 150밀리 직경의 용기는 구형 150밀리 공성 박격포의 포탄을 위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던 폭약인 암모니아 과염화물(perchlorate of ammonia)로 충전된 포탄은 전통적인 포병 화기에서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했다.
대개 가용했던 부품을 사용했기 때문에, 1915년 1월 18일 58T의 첫 번째 70개 시제품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이 무기에 대한 전투 시험을 위해 선정된 장소는 독일군 참호 박격포의 위협이 가장 클 것으로 고려했던 알곤네(Argonne) 수목지역이었다.  이 시험 보고서에 의하면 58T를 그 당시(1915년 2월)에 제기된 “공식적인” 참호박격포의 표준형 장비로 만드는 것을 찬성했다. 포병의 “잉여” 부품으로 창안했다는 즉석 제품의 중심사상을 견지한 채, 비공식적으로 만든 부대는 75밀리 포대에서 절약할 수 있던 인원들로 구성되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들은 1915년 프랑스군 포대장에 의해 진가가 인정된 군인의 미덕을 일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러한 급진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독일보다 여전히 뒤떨어져 있었다.  1914년 12월, 독일의 개척 공병 군단(pioneer corps)은 요새 개척공병(fortress pioneer) 대대와 독립적인 참호박격포 분견대를 조직했다. 1915년 봄, 각 군단에 6문의 중간(170밀리) 박격포로 구성된 1개의 중간분견대와 2문의 중(250밀리) 박격포로 구성된 중 분견대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다. 1916년 중반까지 대부분의 사단에는 3문의 중박격포아 6문의 중간형 참호박격포로 편제된 그들 자신의 박격포 중대가 있었다. 같은 시기에, 반동체계를 가진 76밀리 무기인 경참호박격포가 설계되어 생산에 들어갔다. 개척공병이 그들의 이동 작업장에서 만든 많은 “수제품의” 경폭탄투척기를 이것으로 처음으로 보충한 후 모두 교체했다. 1916년 말경, 대부분 사단의 참호박격포 중대는 12문의 무기를 보유했다.
이렇게 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참호 박격포는 그 당시 제한 목표를 공격하던 독일의 필수전투기법이 되었다. 속도체계(framework of the tempo)와 더 커진 전투의 결합구조 내에서 적 부대 격멸에 조정된 독일 보병의 전통적인 공격과는 달리, 제한 목표에 대한 공격은 작은 지역을 탈취하는 단일 목표가 주어졌다. 대부분의 경우, 제한 목표에 대한 공격은 전장의 중요 부분을 관측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100미터 또는 200미터 전진하는 것을 의미했다.
보병 대대, 연대, 또는 여단들이 실시했던 제한 목표에 대한 공격은 대포, 곡사포, 그리고 문제가 있는 일부 지형을 유지하기 위해 화력을 제공할 수 있는 참호 박격포의 지원을 받았다. 보병과의 통신 능력이 제한을 받은 먼 거리에서 포병은 목표에 있던 표적(기관총, 예비대의 집결지, 지휘소)을 적절하게 사격함으로써 제한 목표에 대한 공격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한편, 참호박격포는 자신의 보병에 가장 근접해 있는 표적에게 사격을 했다.
일반적으로, 참호 박격포는 2가지 형태로 사격을 했다.  공격하기 전에 특정 시설(관측소, 거점, 기관총 진지 등)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박격포는 천천히  사격을 했다. 공격 수분 전에는, 일부 독일군이 “화력경종(fire bell)"이라고 불려졌던 고정 탄막사격을 최전방 참호 정상에 제공하기 위해 사격속도를 증가시켰다. 독일군 보병이 정상에 도달하여 적 참호로 돌진하기 시작하면, 이 사격은 전방참호 후방에 있던 표적으로 전환되었다.
철저하게 준비(탈취해야 할 참호의 분리, 보병 계획의 예행연습, 탄약의 퇴적)가 된 경우, 독일군은 제한된 목표에 대해 통상 성공적인 공격 했다. 이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일부 신뢰는 보병과 개척 공병의 돌격기법에 있었다. 많은 보병들이 동시에 전진하여 일제히 적의 전체 참호를 탈취하려고 시도하는 선형전투를 적 참호에 대한 “돌파지점”에 이르는 제한된 수의 엄폐된 접근로를 사용하여 일단 참호에 진입하면 좌우로 전개하는 보병전술로 대체한 것이 여기서의 주요한 변혁이었다.
이렇게 대체된 기법은 공격 중인 독일군이 적의 화력에 취약한 것을 대단히 감소시켰다. 또한 철조망과 다른 장애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많이 감소시켰다. 즉, 독일은 적의 전체 참호를 상대하기보다는, 참호에 이르는 특정한 좁은 길을 상대했다. 결과적으로 소량의 폭약통(Bangalore torpedo)과 참호 박격포용 포탄으로 철조망을 개척할 수 있었다. 유사하게 공격하는 독일군은 적의 사격진지를 모두 제압하기보다는, 선정된 접근로에 사격할 수 있는 진지만을 제압했다.
1915년 제한된 목표에 대한 독일군 공격의 성공에 대한 나머지 공적은 참호 박격포에 있었다. 참호박격포가 없었다면, 독일군은 대비가 안 된 공격을 방해하기 위해 무인지역에 종사(enfilade)로 퍼부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수의 기관총도 파괴할 수 없었다. 피아가 100미터 내에서 서로 참호에 둘려 싸여 있는 시간이 많을 때, 중곡사포와 공성박격포는 최전방의 독일군이 위험을 받는 것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전선에 있는 적에게 사격할 수 없었다. 경곡사포가 발사한 포탄은 기관총이 숨어 있는 엄페물을 관통할 수 없을 정도로 늘 미약했다. 단지 참호박격포만이 이 엄폐된 기관총을 신속한 파괴를 보장하는 정확도와 폭발력이 결합되었다.
독일군은 박격포에 너무 의존했기 때문에, 제한 목표에 대한 공격은 또한 이로 인해 제한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초기 참호 박격포는 장거리 사격을 할 수 없었다. 중형(250밀리)은 476미터까지 도달할 수 있었고, 중간형(170밀리)은 750미터에 있는 표적을 맞출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첫 번째 적 참호 너머로 전진한 독일군 보병은 참호박격포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다. 또한 참호박격포가 신속한 전개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참호박격포의 무게와 탄약은 성공한 공격을 전과확대로 지원할 수 있는 시간 안에 참호박격포를 신속하게 적절히 전방 이동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1914~1915년 겨울 동안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호박격포를 대폭 개선했던 바우어 중령은 독일군 보병이 적 제1참호를 일단 통과하면, 그들과 동행할 수 있는 소형 포병대포를 독일군 보병에게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바우어 중령의 첫 번째 해법은 부포(secondary armament)로서 크럽이 설계한 비교적 운반이 가능한 37밀리 평사포를 개척공병 실험부대에 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평사포가 쓸모가 없다기보다는 상태가 나쁘다고 판명될 때까지(포탄이 비효과적이고, 총구에서 나오는 섬광 때문에 쉽게 표적이 되는), 돌격 중인 보병과 동행할 수 있는 운반이 가능한 대포(portable cannon)의 개념은 존속했다. 1915-1916년 겨울까지, 바우어 실험부대의 직계인 “로어” 돌격대대는 전술의 통합분야에서 이와 같은 무기를 사용했다. 그들이 정착시킨  특정무기는 포신을 절단하여 조정되고, 포가를 낮추고, 장거리 조준경을 제거한  러시아 76.2밀리 표준 평사포이었다.
독일군도 방어를 위해 보병 평사포(infantry gun)를 역시 사용했다. 참호전이 시작되자, 각 사단의 일부 평사포가 37밀리 "자동 평사포(pom-pom gun)“와 요새와 해상용으로 설계된 소구경 대포와 함께 전선에 배치되어 측면 평사포(flanking gun)로 사용했다. 즉, 이 무기들은 측면에서 공격하는 보병을 사격하기 위해 위치시킨 단도대포(single piece)로 사용되었다. 측면 평사포는 공자 포병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언덕 후사면 또는 다른 지형지물 후사면에 숨겨 있었다. 이 위치에서는 사격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에, 측면 평사포는 통상 단거리 사격을 했다. 따라서 독일도 자신들의 평사포가 이와 같이 사격을 할 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짧아진 포신, 더 낮아진 포가, 그리고 간단한 조준장치(sighting equipment)를 갖춘 훨씬 작은 무기는 측면대포에 요구되는 사항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더욱 쉽게 숨길 수 있었다. 즉, ”로어“ 돌격대대가 사용했던 무기류는 성능이 우수한 측면 대포이었다.
이 실현의 결과로, 독일 육군은 1915년, 1916년, 그리고 1917년에 보병 평사포로 이름이 알려졌던 50개의 포대를 창설했다. 이 포는 너무나 부정확하여 포병대포로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닳은 포신을 가진 77밀리 대포,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제공한 75밀리 스코다(Skoda) 산악 평사포, 전쟁 말기에 보병 대포로 설계되었던 무기인 18-보병화기와 같은 경평사포에서 유래된 다양한 무기로 장비되었다. 기관총이 측면 평사포로서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독일군들은 자신들의 보병 평사포를 쇠로 덮여진 고폭탄으로 점표적(point target)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에는 가장 중요한 표적(prime target)으로 철 방패와 모래주머니로 보호를 받던 기관총이 있었고, 후에는 보병 평사포가 1916년, 1917년, 그리고 1918년의 조잡한 전차를 파괴하는 수단으로써 유용했다고 판명되었다.
독일 보병 평사포부대는 경참호박격포와 주로 비교가 된 연유로 제1차 세계대전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중간 및 중형 개선 장비보다 이동 및 은폐가 더  용이한 기판에 탑재된 무기(baseplate-mounted weapon)로 도입된 75밀리 무기는 같은 종류의 큰 무기보다는 융통성이 많다고 입증되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포탄 무게(4.6kg), 낮은 포구초속(muzzle velocity), 반동흡수(recoil absorption) 체계 때문에, 경참호 박격포는 간접사격과 직접사격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1917년 독일군은 작은 포가에 탑재된 경참호박격포에 장갑-관통탄(armor-piercing round)을 제공하여 이것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투자를 했다. 독일은 상황에 따라 보병 대포, 경박격포, 또는 대전차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소형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평사포의 구경을 가진 보병 대포를 정착시킨 독일과 이와 같은 생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영국에 비해, 1916년 프랑스 육군은 훨씬 가벼운 삼각대에 탑재된 37밀리 구경을 보병 대포로 채택했다. 전쟁초 독일이 무시했던 37밀리 크럽보다 설계가 훨씬 잘된 푸토(Puteau) 평사포는 단거리에서 직접사격으로 독일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서부 동맹군에게는 독일 경참호박격포와 마찬가지로 독일 보병 대포에 대한 주 해법은 스토크(Stokes)  박격포이었다.
거의 모든 현대 박격포의 직접적인 해법인 81밀리 스토크는 그 당시 단순성에 있어서 과히 혁명적이었다. 속사포 시대에서, 스토크에는 반동을 흡수하기 위한 장비가 전혀 없었다. 방아쇠(trigger) 대신에, 포신 밑바닥을 타격함으로써 포탄을 발사하는 고정된 사격핀(firing pin)에 의존했다. 바퀴가 달린 기계를 싫어하기보다는 이 무기는 보병이 어디를 가던 동행할 수 있도록 사람이 운반할 수 있는 무게(가장 무거운 것이 23kg)로 분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런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또는 이것 때문에) 스토크 박격포는 75밀리 평사포 포탄과 같은 폭발성을 가진 포탄을 분당 30발로 450미터까지 사격할 수 있었다.
1915년 12월 최초 도입된 후 종전이 될 때까지, 스토크 박격포는 프랑스 참호 포병의 대들보이었다. 프랑스 참호 포병의 장병처럼, 스토크 박격포에 근무 중인 장병들은 정상적인 부대에서 방출된 인원이었다.  영국 박격포의 대부분 포수는 참호 박격포 부대로 차출되기 전까지는 포병 장병으로 훈련을 받지 못했다. 동시대 영국 지휘통제의 관료적인 성격과 결합된 이 사실 때문에, 이 무기의 특별한 장점을 활용하기는 고사하고, 거의 평가도 받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스토크는 프랑스의 수중에서는 더 잘되는 것처럼 보였다. 매우 증가된 돌격부대 전술의 사용과 현재 도처에 편제되어 있는 참호 박격포의 지속적인 전투력은 프랑스 당국에게 프랑스 보병도 총류탄보다 더 위력이 있고 58T보다 이동이 용이한 무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켰다. 이 과업을 위해 지명된 첫 번째 무기는 품질관리에서 불합격된 75밀리 평사포 포탄을 사격할 수 있게 설계된 75밀리 재래식 박격포이었다. 니벨레(Nivelle) 공격에서, 사단당 16문의 이 무기가 제공되었다. 사단예하 보병 4개 연대에 4문으로 편성된 반으로 각각 배속된 이 박격포는 기관총 진지를 공격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밝혀졌다.
무게가 105kg인 75밀리 박격포는 너무 무거워서 신속하게 전진하는 보병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더구나 1917년경 완전 가동상태에 있던 프랑스 병기공장으로는 “불규칙적인” 75밀리 평사포 포탄을 사용하는 이 무기의 능력은 지난날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이 박격포가 사격할 수 있는 비교적 장거리(포탄에 따라 1,700~2,000미터)에 위치한 표적은 근접한 전술 상황에서는 별로 유용하지 않았다. (독일이 기관총과 보병 거점을 후사면에 설치하기를 점차 선호하여, 상대적으로 프랑스군이 표적에 스스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박격포에 적합한  표적을 발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스토크의 낯선 출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제 박격포에 대한 대체물로서 스토크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말메이손(La Malmaison) 전투(1917년 10월 23~25일)는 스토크에 대한 열광자의 의견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 이 공격에서 스토크 박격포로 무장된 크라폴리로토(Crapouilloteurs)의 12개 포대는 독일군 진지의 5km 종심까지 돌파한 보병부대와 동행하며 협동할 수 있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까지, 스토크는 표준형 프랑스 보병연대의 일부가 되었다.
동행하는 무기로 선택된 스토크(대부분의 현대 보병박격포가 이것의 직계인)의  최종 승리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동전의 중심 무기로서 참호 박격포의 진전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쟁에서, 참호박격포는 보병의 “수하(hip pocket)" 포병으로서가 아니라, 적 요새의 문을 개방하기 위해 성을 공격하는 망치의 형태로서 대규모 공격에 기여하였다.
1915년에 시작된 대규모 공격에서, 시합의 명목은 가능한 한 많은 대포가 적 평사포를 압도할 수 있는 행동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화력의 우세(fire superiority)에 있었다. 이와 같이 참호 박격포가 보병과 협동할 때 가지는 장점을 이해하지도 못한 장군들까지도 참호박격포를 그들의 가장 제한된 자산을 지정한 포병으로 만드는 것을 허용하는 무기로서 인정했다.
이러한 단거리에도 불구하고, 방어진지를 편성하는 방법 때문에, 참호 박격포는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1917년(독일의 경우), 또는 1918년(프랑스와 영국의 경우)까지, 대부분의 사단은 전방 전선에 있는 보병 집단으로 방어를 했다. 이것은 참호와 철조망이 있는 첫 번째 적의 진지는 공자가 극복해야 하는 첫 번째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장애물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가장 많은 수의 참호박격포로 첫 번째 적진지를 가장 가능성 있는 매서운 사격의 목표로 만든다는 것이 분별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통스럽게 중포병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프랑스가 참호 박격포로 구성된 대형 포대를 처음 사용하였다. 1916년 8월까지, 그들은 사단에 예속된 190개 포대에 추가하여 집단군 포병 예비대의 직접 통제하에 있던 125개 참호박격포 포대를 보유했다. 이것들이 1916년 7월 솜머를 공격하는 프랑스 부대를 지원했던 천 개가 넘는 참호박격포의 원천과 1917년 4월 니벨레 공격에 참가했던 1,922개 참호박격포로서 기여했다.
전개되었던 나머지 포병과 함께 솜머와 니벨레 공격에 참가했던 프랑스 참호 포병은 여러 날 동안 실시되었던 체계적인 화력수단으로써, 독일군 야전축성과 축성에 있던 병력을 파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경평사포 및 중곡사포와 비교를 하면, 프랑스 참호박격포는 그들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크라포이롤쯔(Crapouillots) 집중을 방해하던 독일 진지의 관측자들은 가해진 파괴의 정도에 대한 전율과 참호박격포의 효율성에 대한 찬사에 대해 이의가 없었다.
짧고 날카로운 포격을 오랫동안 계속하면서, 독일군은 전방 진지의 완전한 파괴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의 참호 박격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이 요구될 때에는 참호박격포를 집중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결과를 위해, 독일은 최고사령부의 직접 통제하에 참호박격포를 위한 “공중비행(flying circus)"을 조직했다. 이 참호박격포 조직의 예비대는 주둥이형 박격포와 폭발성 추진제보다는 압축된 공기를 사용하는 실험적이고 ”제한된 개선형 “ 무기로 무장된 소수 부대와 표준형 참호박격포로 편성된 독립대대를 많이 포함했다.
가장 극적인 참호 박격포의 집중이 1917년 12월 리가(Riga) 전투에서 일어났다. 리가전투에서 독일 작전의 주 노력은 서부전선의 기준에 의거 비교적 넓은 강을 도하하여 견고하게 축성되지 않았던 반도까지 진출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러시아군이 독일군 배와 부교에 사격할 수 있는 진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것보다도 적 진지에 진입한 보병을 지원하는 것이 적은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공격하는 사단으로 배속된 많은 수의 박격포가 참호박격포 독립부대의 무기에 추가되었고, 100문의 중, 130문의 중간, 그리고 320문의 경참호 박격포가 참호박격포 여단에 집결되었다.
집중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일선을 따라 참호 박격포를 운용하는 것이 선형표적(linear target)에 기초를 두었다. 방어하는 사단의 보병집단이 전방 진지에 밀집하는 동안, 그들은 가장 쉽고 수지타산이 맞는 표적을 참호박격포에 제공하였다. 1917년 독일군 방어전술의 개정과 1918년 독일의 개정을 프랑스와 영국이 복제하려고 시도하면서 보병의 역할이 변화되었다. 방어하는 보병들은 소수의 전방참호를 보강하기보다는 3, 4 또는 심지어 5km 종심으로 소산 되어 있는 다양한 크기의 거점에 점차적으로 분배되었다. 이것은 방자의 소총, 기관총, 참호박격포의 집단이 공자의 참호박격포가 사거리에서 최소한 초과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동맹국은 공격의 보조를 둔화시키는 방법으로 대응(4장에서의 설명과 같이)했다. 반대로, 독일군은 그들의 참호 포병을 가능한 한 기동성이 있게 만들었다. 바퀴가 달린 포가에 탑재된 경참호박격포가 보병부대에 대대당 8문이 제공되었다. 각 사단의 중간형 참호박격포 4문은 말 및 마차와 함께 제공되어 보병 여단장의 직할부대가 되었다. 평사포 포대는 사단포병으로부터 배속되어 보병연대에 예속되었다. 결국 자신의 것은 전환시키지 않고서 전쟁에  참가했던 보병평사포 포대는 말과 탄약차를 제공받아서 사단에 배속되었다.
어떤 관점에서는 보병 여단, 연대, 심지어 대대에 모든 종류의 단거리 포병이 제공되는 것을 보면서 보병을 직접 지원하는 좋은 포병을 갖도록 하여 독일 육군을 1914년의 시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보병 포병(infantry artillery)"의 발전이 단순히 퇴보된 것은 아니라, 대신에 본질까지 뜨거워진 전장을 분리하여 이제까지 있었던 경우보다는 훨씬 많은 수의 비교적 소규모 전투를 구성한 전술적인 특정 영역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경기관총, 수류탄, 1개 분대 또는 소대의 총류탄에 의해 해결되었다. 일부는 대대의 기관총과 경박격포, 연대에게 속한 동반하는 보병포대, 또는 보병 여단장 수하에 있는 중간 박격포와 같은 중무기의 중재를 요구했다. 이 중재는 2가지 형태 중 1개를 취할 수 있었다. 중무기가 소규모 교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거나, 또는 화력으로서 측면을 엄호하고 적의 증원부대에 사격하거나 또는 적의 중무기와 전투를 하여 교전 중인 부대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이러한 중무기가 각 전투에 이상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과정은 확실한 논리를 따랐다. 부대는 자기 자신의 수단이 충분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상급제대의 자산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렬의 허약성은 분명했다. 일단 전투에 투입되면, 박격포 또는 보병대포의 포수도 다른 보병 분대 또는 소대처럼 전투원이었다. 이와 같은 포수가 타 부대와 함께 작전하는 방법은 자신이 속한 지휘제대처럼 인접한 환경의 기능과 같았다.
1914년 경우처럼, 독일군 보병과 근접하여 활동했던 평사포와 박격포는 적 진영의 반대쪽 너머에 상당한 주변을 제공했다. 그들은 진지를 설치하고 유지해야 하는 문제(개활지를 이동하는 부대의 취약성, 야전축성의 능력, 공자가 확장한 것보다는 방자가 더 신속하게 포미를 장전하는 능력)를 직접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무기는 “참호의 어려운 문제(riddle of the trench)”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독일군 보병의 새로운 전술의 다른 면과 일치하기 위해, 그들은 “진정한” 포병이 수행할 일을 대폭 감소시켰다. 이로서 성공적인 돌파를 위한 전제조건인 적 포병을 침묵, 작전적인 기습 달성, 공격속도의 유지를 위한 자산 운용이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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