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속한 사격으로 발전
(the quick-firing revolution)
영국이 보어 전쟁의 교훈을 책으로 편찬했을지라도, 러일 전쟁(1904~1905)의 사태에 이 교훈을 보편적으로 적용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 전쟁이 아시아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규모나 군의 특성은 통상 유럽의 일반 전쟁에 참전했던 것과 흡사했다. 남아프리카 전투에서 진영은 통상 사단급이하 규모로 교전을 했으나, 일본과 러시아는 보어 공화국의 합동 시민집단보다 몇 배나 규모가 큰 부대를 작전지역에 유지했으며. 또한 보어 전쟁에서의 양 진영 군사 지도자들은 아마추어 수준에 쉽게 포함시킬 수 있지만, 러시아와 일본에서는 소대 또는 분대급까지 전문적인 군인들이 지휘를 했다.
비록 한국과 만주에 있던 포병 군수품 저장소(artillery park)는 주목을 받을 만큼 불균형을 이루었지만, 영국과 보어의 병기고(arsenal) 간 격차보다는 적었다. 일본 주 대포는 경량성과 기동력이 최적화된 75밀리 신속 장전포인 아리사카(Arisaka)이었다. 반동을 거의 흡수할 수 있는 포가와 사격 후 2명의 장정이 포를 포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아리사카는 분당 6~7발을 사격할 수 있었다. 상대방인 러시아는 반동 체계가 불완전하여 빠른 사격이나 정확한 사격 중 한 가지만 할 수 있는 76.2밀리 속사포인 1900년형 푸티로브(Putilov)이었다. 비록 푸티로브가 아리사카보다는 무거웠지만, 분당 20발을 퍼부을 수 있었다.
또한 푸티로브는 아리사카보다 사거리 면에서 상당히 이점이 많았다. 푸티로브는 고폭탄을 6,400미터, 유산탄은 5,600미터까지 사격할 수 있는 반면, 아리시카는 포탄을 5,500미터, 유산탄은 4,500미터까지만 사격할 수 있었다. 푸티로브는 더 무거운 포탄(일본 포탄 무게보다 2kg 더 무거운 7kg 포탄까지)에서도 사거리에서 더 많은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격차는 러시아가 고폭탄을 평사포 포대에 제공하지 못하게 되자 다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대부분의 관찰자(노획한 푸티로브를 광범위하게 즉각 이용한 일본을 포함하는)들은 러시아 대포가 성능이 훨씬 뛰어난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성능이 뛰어난 무기를 보유하고서도 승리를 보장하지 못했고, 또한 성능이 뛰어난 무기의 수적인 우세도 빈약한 전술을 보상하지 못한 이유는 비록 러시아가 일본보다 전역에서 더 많은 포병과 전장의 대부분 교전에서 더 많은 대포를 갖고 있었지만, 일본이 중요한 시간과 장소에 포병 화력을 항상 압도적으로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상 일본군이 공격을 했기 때문에, 포병 화력을 집중하는 일본의 능력은 매우 향상되었다. 일본은 전투할 시간과 장소를 선정한 다음 선정된 결과에 따라 대포를 할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의 확장은 그들의 교리에 연유했음이 틀림없다. 고대 무사도 전통과 독일 스승의 최근 가르침에 따라 1904~1905년의 일본 군인들은 전투에서 결판을 내는 데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 전투에서 적을 쫓아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드시 전멸시켜야 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빈번하게 많은 포대의 화력을 집중했다. 일본군은 단일 표적에 화력의 결합된 무게를 집중할 수 있도록 각 사단마다 6개 포대(36문)를 틀에 박힌 듯이 집단을 구성했다. 그래서 돌파를 원하는 곳에는 2개 여단 규모(각각 18개 포대)의 일반 예비대(general reserve)에서 동원된 대포로 더 큰 대형 포대를 만들었다. 보병사단 포병의 집중된 대포처럼, 이 거대한 대포집단(assemblage of gun)도 종종 러시아 단일포대처럼 작은 표적을 공격하기도 했다.
포병을 집중하려는 일본의 의지는 공인된 교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다른 1급 군대처럼 일본 군대도 일반적으로 채택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교훈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군으로 하여금 일본을 두려워하게 한 그 당시 일본 특유의 조직문화 때문에 이와 같이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 가능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당시 집중된 포병 화력은 전환기 동안 특징이 있는 훈련을 받은 일본 장교들의 진취성(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려는 개인의 확고함) 때문이었다.
포대 결집(massing of battery)을 조직했던 상급 포병 지휘관들은 무전기, 심지어 전화기조차 없어 세부적인 명령을 하달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사격진지를 적당히 제공할 수 있는 일반적인 지역을 선정하거나, 차후 수행 개념만을 간략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나머지 명령은 예하 대대장이나 포대장이 해야만 했다. 그러면 예하 장교들은 먼저 상급 지휘관의 의도를 이해한 후, 최소한 실제 통신으로 자신이 이해한 의도를 수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동하는 것이 그들의 과업이었다.
이 조용한 협동(silent cooperation)의 장점은 일본이 다수 포대를 집결하지 않고서도 다수 포대의 화력을 집중할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었다. 어떤 경우 (다수 포대가 단일 표적에 사격하는) 집중은 보통 집중(garden variety concentration)이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서로 다른 진지에서 사격하는 2개 이상의 포대가 러시아 진지를 교차 포화(crossfire)에 놓기도 했다. 유산탄을 사용하는 교차 포화에는 다양한 형태의 엄폐물의 가치를 상당히 격감시키는 파괴효과가 있었다.
그 반면에, 러시아 포병은 통상 포대 단위로 전투를 했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한 첫 번째 이유는 러시아 포대 규모가 상대방인 일본 보다 더 컸고(8문 대 6문), 또한 더 많은 포탄(분당 60발 대 30발)을 사격할 수 있는 데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러시아에는 자신들의 모든 힘을 한 지점에 사용하기보다는 우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견인포를 예비로 남겨 두는 것을 선호하는 독일의 집중 화력 교리가 미흡한 데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된 이유는 러시아에는 조용한 협조에 대한 일본과 같은 숙련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각 포대에 보급된 전화기와 수 마일의 전화선 같은 기술로 일부 해결하였다. 러시아 여단장은 3~6개 포대의 화력을 전화기를 사용하여 소규모 단위로 관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러시아는 30~60문의 포를 가진 거대한 규모의 포대를 형성하였지만, 그들은 전역이 끝날 때까지 포를 동시에 운용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처럼 적시 적소에 많은 포병 화력을 집중하지 못했다.
이 모든 요인 때문에, 일본은 전역 전반에 걸쳐 포병 우세를 점했다. 반면에 러시아는 대포로 일본에게 항상 피해를 줄 수 있었고, 종종 특정 돌격을 격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러나 러시아 포병은 일본 포병이나 보병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포병이 러시아 포대를 성공적으로 침묵시켰다고는 할 수 없다. 반대로 일본군이 사용할 수 없게 만든 대부분의 러시아 포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처럼 포격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것이 아니라 보병에 의해 전멸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완전히 엄폐된 곳에 포대를 위치시켜 간접 사격이 제공하는 방호를 얻기 위해 직접 사격의 편리함을 포기하려는 경향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야전 축성에 의해 방호를 받을지라도, 개활지에 위치한 러시아 평사포는 30문이 넘는 일본 평사포의 집중 화력에 의해 쉽게 평정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자신의 평사포를 산등성이나 노출된 장소에 위치시키려는 습관을 교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수만 평방미터의 지면을 덮는 언덕의 그림자 아래에 위치한 러시아 포대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교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러시아 포병을 공격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의 해결책이었다. (러시아 평사포를 결코 침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장교가 지휘하는) 러시아 평사포는 일본 평사포를 침묵시키기 위해 정신이 없는 동안 일본 보병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즉, 일본 포병에게 주어진 주임무는 러시아 포병의 화력을 유인하는 데 있었다.
만주에서는 이것이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러시아는 가용한 모든 포병 화력을 일본 보병에게 집중하기 위해 포병 대결을 포기하는 논리적인 대응 했다. 하여튼 러시아는 준비된 진지에서 개활지로 전진하는 일본 보병을 방어했다. 따라서 갑작스럽게 늘어난 러시아 평사포의 가용성에 대해 일본군이 느꼈던 두려움보다도 러시아군은 포병 대결에서 해방되어 일본군 포병이 주는 두려움을 훨씬 적게 느꼈다.
각국의 군 지휘부는 통찰력으로 최근 전투에서 얻은 지식에 의거 속사포가 주는 충격을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었다. 만주 전장의 소식에 대한 국지적인 해석에 의해 받은 영향에 추가하여 이러한 견해들은 각 군대가 스스로 알게 된 특별한 상황의 부산물이었다. 지리전략학적 위치의 특수성이 이와 같은 의견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안, 군이 속사포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영향을 가장 많이 준 것은 내부(신사고와 기존 교리 간 상호작용의 결과)에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20세기 초 가장 강력한 포병의 힘을 가졌던 독일 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의 예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속사무기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프랑스와 독일군 포병 교리가 매우 유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여 과거와 미래의 적으로부터 많은 개념과 경험을 얻었다. 가장 평범한 수준에서, 프랑스는 협차 사격으로 화력을 조정하는(adjustment of fire by bracketing) 기술인 독일군 개념을 받아들였다. 더 높은 수준에서, 프랑스는 포병 대결을 위해 포대집중을 한 다음, 보병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포병을 전방에 두는 독일의 경험을 받아들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신속장전분야 교리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는 독일이 그들의 포수를 보병사격에 노출시키는 것을 프랑스보다 조금 더 꺼려한 데 있다.
75밀리 속사기가 출현하자, 프랑스는 냉담한 태도를 보다 호전적인 자세로 바꾸는 것으로 최초 대응을 했다. 높은 발사율과 장갑화된 포의 방호 이점의 한계까지 매진을 시도한 포병 이론가 집단은 4문 단위 포대로 보병대대, 연대, 그리고 여단을 직접 지원하고, 중간거리(1,000미터)까지 사격할 수 있는 진지를 신속하게 찾을 수 있도록 전방으로 이동하여 전장을 가시화했다. 포대의 임무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포미(breech)에 밀어 넣는 사격으로 (소총수 집단이나 노출된 적 포병 같은) 표적을 3발 이상의 75밀리 포탄의 “돌풍(rafale = whirlwind)"으로 압도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와 같은 돌풍 효과로 보병의 돌격에 저항하려는 적의 능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격 시 속사포가 직사화기보다 튀지 않게 개선을 했고, 또한 간접사격을 효과적으로 하는데 필요한 풍향(windage)과 고각(elevation)에 대한 미세한 수정을 보다 간편하게 할 수 있게 했다. 프랑스는 1897년 차폐된 곳에서 75밀리 평사포 사격을 실험하여 속사기 시대의 시작을 현실화했다. 그러나 확실히 러일전쟁에 관한 보고서로부터 영향을 받은 프랑스 포병의 의견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0년 전까지 재차 변경되었다. 포병을 12문 단위 대대나 4문 단위 포대와 같은 소단위로 운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적에게 근접하는 것을 강조하여 차폐 또는 엄폐된 위치에서 사격하려는 관심은 증가했다. 프랑스는 1910년 포병규정에 “예외규정”으로 직접사격 사용을 언급했고, 또한 돌풍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것도 사격속도(rate of fire)를 임박한 과업에 조절하는 보다 개선된 방법으로 바꾸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포병 교리 간 차이점은 양국의 기본적인 포병부대를 조직했던 방식에 반영되어 있다. 프랑스군 포대는 4문의 포를 보유한 반면, 독일군 포대는 6문의 포를 보유했다. 프랑스군 포대는 상대적으로 은폐하기는 쉬웠지만, 비교적 쉽게 파괴되었다. 사용이 불가능한 1문의 포는 부대의 전체 화력을 크게 저하시켰다. 독일군 포대는 프랑스군 포대가 필요로 했던 공간보다도 반이상 더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적당하게 차폐된 위치를 제공받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더 컸기 때문에 프랑스군 포대보다 강력했다.
각국 교리는 포병 장교들이 훈련 방식과 관련이 있었다. 프랑스군 포대장은 MIT와 미 육군사관학교(West Point)가 결합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종합 기술 전문학교(Ecole Polytechnique)를 졸업한 반면, 독일군 포대장은 각종 사관학교(Cadet) 또는 짐나지움(Gymnasium) 출신이었다. 이와 같이 독일군 포병 장교에는 수학에 대한 무식쟁이가 없었던 반면, 프랑스 포수들은 다른 일반요원보다 안정되었다. 보통 수적인 면에서 더욱 편안하였다. 한편 독일 포병장교는 기술자가 되기도 전에 이미 전술가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포병 교리 간 핵심적인 차이점은 프랑스와 독일장교들이 자신들의 부대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었다. 프랑스 직업군인들은 장병들의 의욕과 창의력을 (다소 두려움을 갖고서) 확신하면서 전장 고유의 혼돈을 바로 잡기 위한 구조와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장교들은 이러한 혼돈을 아주 편안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일부 인원은 혼돈을 한가로이 즐기기까지 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하들이 전장에서 실제 역할을 하지 않으려는데 있었다.
이 기본적인 이견은 다른 지휘 통제 철학 속에 아주 명백하게 반영되었다. 자율적인 군기에 대한 프랑스 군인들의 과장에도 불구하고, 포병 지휘 통제에 대한 프랑스식 접근은 포병 지휘관에게 재량권을 거의 제공하지 못했다. 프랑스 교리에는 포병이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보병 지휘관이 포병을 직접 통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독일의 지휘통제 철학은 포병 지휘관에게 아주 많은 재량권을 부여했다. 보병에 대한 포병의 관계는 종속이 아니라 협동이었다.
1910년의 프랑스 포병 규정에는 포병 화력을 통제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보병 중대, 대대, 연대 또는 여단 예하에 포병의 포대, 대대, 연대를 두는 “상급 관계(high-level connection : liaison par le haut)"이고, 두 번째 방법은 보병 지휘관이 자신의 포병 지휘관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하급 관계(low-level connection : liaison par le bas)"이다. 이 후자관계는 보병 지휘관이나 포병 지휘관이 특별한 상황에서 각 군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비공식적으로 논의할 수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보병 지휘관이 포병 지휘관보다 공식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전쟁 이전의 프랑스는 그들의 포병을 특정 임무에 특정 부대를 할당함으로써 분할하였다. 따라서 특정 포대는 보병 포대(infantry battery)로서 지명되었고, 그들은 보병이 원하는 표적을 선정해야 하는 종속적인 임무를 부여받았다. 대포병 전담포대(counterbattery)에게는 적 포병에게 사격하는 임무 외에는 다른 어떠한 임무도 부여되지 않았다. 노동의 분업은 프랑스 선호에 따라 연대 예하 포대가 상호 근접하여 단일 지휘관의 직접 통제하에 있을 때 일어났었다.
독일에는 이와 같은 제도가 없었다. 독일에는 독립 전쟁(1813~1815)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Napoleon)에 대항하여 싸웠던 프로이센 개혁가의 전술학에 대한 “예술적인” 접근을 유지하면서, 군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지휘자의 재량권을 제한하는 위험이 있었다. 이와 같이 독일 포병인은 프랑스 포병이 임무에 따라 분리된다는 사실과 과거 그들이 했던 강직성의 정도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독일 포병인은 포대를 집결시켰지만, 밀집된 화력면에서는 화력을 분리시켰던 프랑스에 비해 가능한 한 많은 포대의 화력을 단일 표적에 집중할 수 있는 데까지 포대를 점차 분리시키려고 했다. (보병이 전투하기 전) 장거리 표적은 통상 프랑스 포병이었고, 더 근거리 표적은 독일 보병의 전진을 가로막는 프랑스 보병인 경우가 많았다. 표적 선정 기준은 통상 거리보다는 전투 행동에 더 좌우되었다.
여기에서 활동했던 핵심 생각은 결정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지휘관이 자신의 노력을 집중시켰던 공간과 시간에서의 결정적인 지점(decisive point : Schwerpunkt)이었다. 전장이 발달할수록 사단장은 자신의 결정적인 지점을 지시해야만 했다. 사단장이 자신의 결정적인 지점을 지시하면, 사단포병 선임장교(포병 여단장)는 승리하기 위해 사단장의 노력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포병 화력을 집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즉, 포병의 결정적인 지점은 보병사단의 결정적인 지점과 일치해야 했다. 1910년에 퇴역한 독일장군은 “결정적인 공격을 지시받은 곳에 결정적인 지점을 잘 결정했으면, 포병은 그 지점에 대량의 화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라고 기록을 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1910년 2개 전투 병과 간의 협조를 제공하는 독일의 주수단으로 “시각에 의한 연결(connection by sight : liaison par la vue)”이라고 불려졌던 프랑스 포병 규정이 발행되었다. 집중된 사단포병의 지휘관은 전장을 관찰하여 진행할 대상을 결정한 후, 이 사태에 영향을 주기 위해 자신의 포대가 수행해야 할 대상을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포병연대, 대대, 포대, 그리고 심지어 단일 분과 또는 포를 사격선까지 전진 배치시킨 지휘자에게는 좀 더 확장된 규모의 전술 상황을 이해하고 요구되는 일을 수행할 책임이 있었다.
1914년 이전 10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 간의 중요한 협약에는 포병 대결의 우유부단함이 있었다. 1890년 프랑스와 독일 당국자들은 크기와 구성이 같은 2개의 포병이 차폐된 곳에 위치하여 대결을 한다면 1개 포병은 파괴되고 다른 1개 포병은 승리한다는 결과가 좀처럼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논란이 분분했다. 1905년까지 상당히 많은 탄약을 소모하면서도 평사포로는 상대방 평사포를 적절하게 굴복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프랑스와 독일 양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 1910년경 이와 같은 내용이 군사 전문잡지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
이 논제에 대한 추론은 차폐된 포대를 물리적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공자 포병에게는 방자 포병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필요가 여전히 있고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다. 적 포수들이 사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한 많은 과업(탄약 운반, 포 이동, 명령하달, 적 관찰)을 더욱 곤란하게 하기 위해 적 포대가 쏟아지는 유산탄 속에 위치하도록 강요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했다. 만약 이와 같은 사격으로 장교, 말 또는 운전병이 죽거나 부상을 입게 된다면, 상황은 보다 더 호전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격의 주목적은 보병전투가 정착될 때까지, 적 포병의 전투력을 최소화시키는 데 있었다.
이와 같은 사격에 적용되던 용어는 변했다. 1910년 프랑스는 요망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무력화(neutralization)란 용어를 포병 규정에 사용했다. 심지어 2년 뒤 가치가 있는 포병전술을 출판한 파로큐( Paloque) 대령도 대포병 사격(counterbattery fire)의 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확신이 없었다. 그는 “괴롭히기 위해(to bother)"와 ”방해하기 위해(to obstruct)"란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요망효과에 대해 독일은 프랑스보다 애매한 전투(combat)와 과력(overpower)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프랑스 당국자들은 적 사격에 대한 최선의 방해는 대포병 사격 전담임무를 부여받은 다수포대가 계속적으로 사격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독일에는 이와 같은 고정된 노력의 분할을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독일은 적 포병을 무력화하는 과업을 다른 과업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보고, 요구되는 상황에 따라 대포병 사격에 할당되는 포병의 수를 증가 또는 감소시켰다.
교리와 포대편성의 관계처럼, 프랑스와 독일은 지휘 통제 철학을 상급제대 포병부대를 편성하는데 반영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프랑스에는 2가지 형태의 포병연대가 있었다. 4개 대대(48문)로 편성된 연대는 상비군단에 할당했고, 3개 대대(36문)로 편성된 연대는 상비사단에 할당했다. 이러한 연대를 구성하는 대대는 같은 장비와 훈련을 받았다. 각 대대는 각각 75밀리 평사포 4문의 3개 포대로 이루어졌다. 양 포병연대 간 주요한 차이는 기능에 있었다. 3개 대대형 연대는 사단과 함께 행동하면서 사단장에게 직접 반응했고, 종종 포대 또는 군예비의 중곡사포 2문과 결합된 4개 대대형 연대는 군단의 예비포병으로서 지원되었다.
또한 독일에도 군단 포병과 사단 포병 간에 차이가 있었다. 1914년에 상비사단 포병여단은 77밀리 경평사포 3개 대대와 105밀리 경곡사포 1개 대대로 이루어졌다. 군단 포병대대는 150밀리 중곡사포 4개 포대로 구성되었다. 군단장은 이렇게 강력한 군단 포병대대를 자신이 직접 통제하기보다는 변경이 없이 사단포병 여단장이 직접 명령을 하는 사단에 할당했다.
이처럼 독일에는 포병 운용과 관련이 있는 오직 1개의 지휘제대(사단)만 있었다. 적어도 이 지휘제대는 포병의 결정적인 지점을 형성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반면에 프랑스는 포병에 대한 책임을 포병연대 “보유 조정권을 가진” 군단장과 사단장에게 분담했다. 이 체계에는 양 제대 지휘관이 전투 간 조정 수단을 갖도록 보장하는 장점이 있었다.
이러한 문서상의 정리도 대부분, 또는 심지어 모든 포병을 집중시킬 수 있는 프랑스 군단장의 권한을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비록 이것이 포병 운용과 관련된 제대가 군단이었던 19세기말의 흔적처럼 보일지라도, 프랑스 군단에는 포병여단장이 있었다. 규정상 포병 여단장의 권한을 사단장보다 다소 감소시키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군단포병 여단장은 여전히 모든 군단 내 포병에 대한 공인받은 수장이었다. 또한 연대보다 더 큰 규모의 포병집단도 지휘할 수 있는 논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포병 편성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유래되어 천천히 교리로 발전시켜서 보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독일과 능력 범위 내에서 신기술의 함축적인 의미를 추진하는 부대로써 지원하려는 프랑스 간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볼 수 있었다. 즉 그들의 역할이 상호 뒤바뀌었다. 독일은 곡사포와 기동 중포병(mobile heavy artillery)으로써 적극적으로 실험하려는 반면, 프랑스는 일단 만들어지면 더 이상의 혁신을 배제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단일 혁신만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진공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양 경우가 다른 것은 클라우제비쯔(Clausewitz)와 죠미니(Jomini)가 다르고, 공황과 공포가 다른 것처럼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있었다. 포병을 다르게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2개의 위대한 교리가 전투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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