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역사

제1장 과거의 그림자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7. 8. 10:18

1. 과거의 그림자
(The Shadow of Sedan)



유럽 포병은 1870~18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Franco-Prussian War)의 그림자 아래에서 20세기를 맞이하였다. 전술가들은 이 갈등의 전투에서 현대 대포의 운용에 대한 교훈을 풍부하게 얻었고, 평사포(field gun) 기술에 있어 승자가 패자를 1세대나 완전히 앞섰다는 사실 때문에 무기 제작자들은 반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무기경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무기 경쟁으로 인해 무기 판매상들이 부를 축적한 반면, 전술가들은 생계가 더 어렵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전술적이고 함축적인 포병기술의 내용을 전술가들이 완벽하게 소화하기도 전에, 이 포병기술은 급격하게 변화되어 개화된 주변 세계에서 전투를 할지라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기 전까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사용된 신형 평사포의 위력에 대해 제공되었던 어떠한 정보로부터도 이 포병기술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일치된 교감을 얻지 못했다.
20세기말의 발전된 견해로 보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포병 전투(artillery battle)에 대한 뚜렷한 특징은 기술적인 불균형에 있었다. 독일의 후장식 대포(breech-loading gun)는 사거리(range), 정확도(accuracy), 특히 신관에 대한 신뢰도(reliability of fuse) 면에서 상대방인 프랑스의 전장식 대포(muzzle-loading gun) 보다 훨씬 우월했다. 독일의 표준 평사포인 구경 80밀리 4-파운드 포수들은 이 평사포가 3,800미터까지 포탄(explosive shell)을 투발하여 비행 종말 지점(end of journey)에서 폭발할 수 있다고 온당하게 확신했다. 프랑스군이 무장한 86.5밀리 4-파운드는 3,150미터까지 탄두(projectile)를 투발할 수 있었지만, 1,400미터에서 1,600미터까지와 2,650미터에서 2,950미터까지의 거리에서만 포탄의 신관이 작동했고, 그 밖의 범위에서는 지나치게 비싸면서 속이 비어 있는 함량 미달의 쇳덩이(piece of hollow solid shot)인 비활성 탄두(inert projectile)에 불과했다.
프랑스군 포병이 갖고 있는 이와 같은 결정적인 약점 때문에, 독일군 포병은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많은 대포를 상호 근접되게 집결시킬 수 있었다. 세당(Sedan)에서 독일군 5개 군단은 90문의 대포군(group of guns) 또는 한 지휘관 아래 단일 계통으로 집결된 대형 포대(grand battery)를 운용했다. 1개 전투지점에서 임무수행을 하기 위해 전장에 있던 독일군 대포의 80%에 해당하는 540문의 대포를 1개의 대형 포대로 조직했다.
이러한 기술적인 불균형이 보병무기로 옮겨지자, 프랑스와 독일의 상대적인 지위는 역전되었다. 신뢰할 수 있는 기계구조, 평탄도, 더 연장된 사거리의 특성을 가진 프랑스의 체스포트(Chassepot) 소총은 대부분의 독일 보병이 가지고 있던 드레이서(Dreyse) “다발식 후장총(needle gun)” 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났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즉각 예견된 대로 독일 보병은 프랑스 보병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전진할 수가 없었다. 특히 프랑스 보병이 근거리에서도 유산탄(shrapnel)을 사격할 수 있는 소수의 평사포를 증강받을  때에는 더욱 전진할 수가 없었다.
독일은 이 문제를 2단계로 해결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포병 대결(artillery duel)로서, 독일 포병은 프랑스 포가 효과를 줄 수 없는 거리에서도 포격을 할 수 있는 독일 포병의 능력을 유용하게 이용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근접엄호 전투(close-in fight)로서, 독일군은 공격 중인 보병을 즉각 지원하기 위해 “대형 포대(grand batteries)"들을 해체하여 1개 포대(battery), 반(section), 각개포(individual gun)로서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화포를 전방으로 추진하였다. 대부분의 근접전투에서 포병은 피해를 많이 받았다. 더구나 독일이 격멸하지 못했거나 또는 적 포병이 전방으로 이동하기 전에 물리치지 못했을 때에는 특히 손실을 많이 받았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의 군역사 학자와 교리 연구가들은 1870년 독일식 집중의 기초가 되었던 기술적인 불균형을 망각하거나 또는 각주 정도로 분류한 반면, 1871년부터 1914년까지 장기간 평화를 즐겼던 유럽 장병들은 겨우 몇 주만에 유럽을 붕괴시켰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관한 논문 연구에서 도출된 신뢰를 주는 2가지 전쟁 교훈을 배우길 원했다. 첫 번째 교훈으로는 평사포의 집중이 필요했다. 즉 가능한 한 많은 포대를 단일 지휘관의 직접 통제하에 단일 위치에 두어야 했다. 사단장, 군단장, 심지어 군사령관에게 집중 화력(massed fire)을 전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활동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였다. 두 번째 교훈으로 상대방 군의 본대와 전투를 하기 전에 적의 평사포를 적절하게 침묵시킬 필요가 있었다.
2단계 포병 전투의 창도자인 독일 호헨로허-인겔핀건( Hohenlohe -Ingelfingen) 포병 수석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2단계로 전쟁을 하면, 1880년에 개량된 평사포가 사거리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반면, 전투 필수형태는 1870년과 동일하게 존속될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포병 전투가 사거리를 증가한 것을 제외하고는 과거와 동일한 방법으로 전투를 수행할 것이다. 포병 전투는 적의 관심과 적 포병의 화력을 우리 포대로 유인하여 보병의 전진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 다소 비효과적인 (5,000야드가 넘는 거리에서) “포성(cannonade)"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런 다음 지휘관은 자신이 실제로 공격할 장소를 결정할 것이다. 공격할 장소가 결정되면, 포병은 유산탄 사격구역의 첨단(약 3,500야드)까지 전진하여 일반탄으로 전투에서의 이점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이점이 명백하게 될 때가 지휘관이 공격을 개시할 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가장 빠른 시점이다. 또한 이 이점이 포병이 결정적인 포병 대결로서 교전을 먼저 재개할 수 있는 순간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 포병은 사격을 중단하거나 지상이 제공할 수도 있는 엄폐물을 이용하지 않고 계속되는 파편으로 맞서 나갈 것이다. 만일 이 전투의 결과로 방자의 포병이 침묵이 된다면, 지휘관은 보병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는 순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포병 대결이 끝나면, 보병은 반시간 내에 적에게 최초로 도달하게 될 것이다. 적 보병을 격멸하기 위해 포병이 사용하는 유산탄 엄호하에, 보병은 1,500야드 내지 2,000야드까지 성공적으로 전진할 것이다.”


물론 나라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교훈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포병인들은 현대 소총의 살상력을 두려워하여 포수들을 보병의 시야에 두는 어떠한 계획도 반대했지만, 한편 독일은 관심을 적의 소총 사격에 보병을 홀로 방치하는 것보다 포수들의 손실에 적게 두었다. 독일 규정에는 “포병의 지원이 없이 보병만으로 임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설정했다. 또한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에도 포병은 치열한 적 보병 사격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집중된 대형 포대와 포병 대결의 원칙(the principle of massed grand battery and the artillery duel)은 바로 유럽 포병교리의 기둥이 되었다. 독일에서는 이 원칙을 포병 규정(1897년 개정판부터)과 호프바우어(Hoffbauer), 폰 쉘(von Schell), 바론 뜨루하임(Baron Thurheim) 같이 존경을 받는 전문가들의 저서에 공식적으로 기록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 이론을 전후 발간된 야전근무 지침서에 최초로 수록하여 전파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원칙이 1878년에 발간하여 공인된 포병 교범의 기준이 되었고, 실제로 그 당시 4개 대륙의 열강 중에서는 러시아만이 독일식 포병 전술을 수용하는데 실패했다.
이 전환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각국의 공인 및 사적인 책뿐만 아니라, 포병부대의 재편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큰 영구적인 전술부대로 오랫동안 고려되었던 6문 또는 8문 단위 포대는 점차 다른 포대들과 영구적인 집단을 구성하여 규모가 더 커진 전술 조직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군(groupes)", 독일에서는 ”사단(Abteilungen)", 오스트리아에서는 “사단(Divisionen)으로 명명된 2, 3 또는 4개 포대의 결합은 그들의 이름에 나타나는 특성을 잃고서 영구적 대대의 모든 장식을 떠맡았다.
포대를 영구적 대대(permanent battalion)로 집단화를 먼저 시도한 독일 포병은 한층 더 발전했다. 대대들을 짝지어 연대(regiment)를 형성했고, 그 뒤 연대를 짝지어 여단(brigade)을 형성했다. 이들로 군단 포병을 만들었다. 포병 연대와 여단 대형을 기관으로서 독일 포병의 관점에서 보면, 포병 장교에게 높은 수준의 직무를 제공했고, 또한 이것을 전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대형으로 인해 자신의 평사포를 집중시킬 책임이 있는 1명의 포병인 뿐만 아니라 필요시 사단에 배속시킬 수 있는 2개의 주요 예하부대를 군단장에게 제공했다.
편성표와 전술 서적의 작가들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교훈을 소화하는 동안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들은 포수들에게 유용할 병기류를 계속 변화시켰다. 야금술(metallurgy) 발전으로 주어진 무게를 가진 포들은 더 커진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흑색 장약(black powder)을 무연 장약(smokeless powder)으로 대체하여 사거리를 증가시켰고, 사격 중인 포대를 쌍안경을 사용하는 적으로부터 더 쉽게 숨길 수 있었다. (금속 용기에 들어 있는 추진제(propellant)와 장전하기 전에 용기에 탄두(projectile)를 부착한) 혼합 포탄은 사격 속도(rate of fire)를 증가시키기 위해 3 내지 4가지 요인이 개선된 포미구조(breech mechanism)와 결합되었다.
이 모든 변화의 결과로 “신속장전기(quick-loader)”로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무기류가 나타났다. 신속장전기는 이들이 대체했던 무기보다 70kg 이상 더 가벼워 과거처럼 육마조(six-horse teams)로 이동할 수 있고, 또한 그 이전 세대의 평사포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었다. 대포의 구경은 (87밀리에서 75밀리로) 작아졌지만, 사거리는 (4,000미터에서 5,000~8,000미터로) 연장되었다. 분당 2 발정도로 사격하던 무기를 대체했던 이 새로운 평사포는 분당 6~7발을 발사했다.
이 신속장전기용으로 채택된 포탄은 19세기 초에 발명되어 그 말에서야 비로소 인정받은 유산탄이었다. 비교적 얇은 용기에 8~10g의 금속탄과 소형 작약(bursting charge)으로 채워진 유산탄은 적 보병으로부터 수 미터 이격되어 폭발된 후 거대한 산탄총(shotgun)이 작용하는 것처럼 소탄두가 적 보병들에게 퍼붓도록 만들어졌다. 유산탄에 채택된 신관은 포수가 파편을 폭파시키기 원하는 거리에 따라 간단히 절단할 수 있는 연소 시한신관(bursting time fuse)이었다.
신속장전기 (또는 적어도 신속장전기의 장점을 갖도록 유사하게 개량된 평사포)의 보편적인 사용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로써 태동된 교리적인 일치를 훼손하지 않은 증거로는 그 당시 장병들의 타성에 젖은 군인정신보다는 신기술의 함축된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에 있었다. 특히 적 포병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거리(2,000미터 이상)에 떨어져 있는 우군 보병을 유산탄 사용을 증가하여 더욱 위협했다. 이 때문에 보병을 전방으로 보내기 전에 적 평사포를 침묵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동시대 대부분의 평사포가 보통탄보다 유산탄을 1,500~3,000미터 정도 더 멀리 투발 할 수 있다는 사실(보통탄은 5,000~5,500미터, 유산탄은 6,500~8,000미터까지)은 포병에게 가장 강력한 적의 인마 살상무기의 사거리 밖에서 기동 할 수 있는 지역이 있고, 많은 보통탄을 집중하여 소모한다는 것은 포병이 방열된 포대에 결정적인 효과를 여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 세대의 무기용으로 설계된 전술을 보존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공헌자는 무연 화약의 사용에 의해 생긴 부산물이었다. 흑색 화약을 사용하던 시대에서 사격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하게 방해한 실질적인 요소는 대포 진지를 빠르게 둘러싸는 연기이었다. 연기가 많이 발생할수록 포대 장교들은 목표를 보고, 사거리를 판단하고, 낙탄을 조정하고, 피해를 평가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많은 포대를 동일 장소에 위치시키는 것이야말로 이와 같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흑색 화약이 무연 화약으로 대체되자, 타 포대들과 집단을 이룬 포대들도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포대처럼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교훈에 대한 기술적인 토대는 변했을지라도, 이 교훈으로부터 도출된 내용은 1875년 또는 1890년보다도 더욱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훈도 변화하는 기술 앞에서는 영원할 수 없었다. 유럽군은 신형 신속장전기에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에, 무기 제작자들도 차세대 야포를 위한 작업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포병으로 사용될 수 있는 충분히 작은 무기에 대한 화학, 야금술, 포탄 설계, 심지어 장전 인간공학(ergonomics of loading)의 실제적인 한계가 신속발사기(quick-firer)까지 도달했다. 반동을 감소시키는(reduction of recoil) 분야에는 여전히 개선시킬 여지가 남아 있었다.
중세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포병 사격 속도의 한계에 대한 주요 원인은 뉴턴의 운동 제3법칙 외에 탄두를 무기에 장전하는 방식에 있었다. 포가 발사될 때마다 추진 폭발하는 “작용과 반작용(equal and opposite reaction)"으로 포는 몇 인치씩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정확도가 요구된다는 것은 발사하기 전에 사람의 조종에 의해 포의 앞쪽이 재 겨냥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무기를 장전하는 과정보다는 재 겨냥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880년대 포 제작자들은 포신(barrel)이 움직이는 동안 포가(carriage)는 제자리를 유지되도록 포의 반동을 흡수할 수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가진 화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초기 단계의 ”반동 흡수(recoil-absorbing)“ 구조는 포병에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크거나 작았다. (함정이나 요새 같은) 고정된 장소에 설치된 대포는 크고 (무거운) 충격 흡수 구조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소구경의 평사포는 사격을 하는 동안 완충기(spring)와 가신 발톱(spade), 그리고 포수가 자신의 가신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간단한 장치를 부착함으로써 대포의 반동을 흡수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불행히도 포병의 경우, 요새 무기류가 말로는 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무거웠고, 더구나 소구경 무기류 중 가장 큰 무기(8파운드 대포)도 4kg이 되지 않는 포탄을 3,500미터 이상 투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포의 반동 문제는 시간이 해결하였다. 많은 나라의 발명가와 기술자들은 자동차나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기구 연구와 함께 이 반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를 하였다. 1896년 최초의 독일 회사인 하인리 에르하르트(Heinrich Ehrhardt)가 속사포(quick-firing gun)를 군에 제공하였고, 러시아에서는 푸티로브(Putilov : 러시아 대포) 공장에서 전혀 새로운 모양의 속사포를 제작하였지만, 속사포를 최초로 실용화한 나라는 프랑스이었다. 독일군이 1896년형 77밀리 평사포를 보급받은 1년 뒤에, 프랑스 육군은 프랑스 병기장교가 설계한 75밀리 속사포를 채택했다.
독일의 77밀리 평사포가 6.85kg 포탄을 분당 8발로 사격하는 동안, 상대방인 프랑스는 더 무거운 탄두(7.2kg)를 분당 20~30발로 내뱉을 수 있었다. ”긴 반동(Long recoil)“ 구조 때문에, 1897년형 프랑스 평사포의 가신은 장전과 발사 주기 동안 포가를 완벽하게 유지했다. 매 발사시마다 포신이 받는 반동이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이 대포는 너무 안정되어 사수는 다음 포탄을 위해 단지 미세한 조정만 해도 되었다.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독일(과 기타 유럽 국가)은 대포분야에서 그들이 프랑스보다 열세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완벽한 보안 때문에 첩자들은 설계도와 수행 제원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이 개발한 대포와 비슷한 ”짧은 반동(short recoil)“ 구조를 사용하는 실제 대포 조립을 포함하는 정교한 역정보 때문에, 독일 당국은 자신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계속 믿었다. 중국에서 퇴각하는 의화단의 무리를 추격하는 전투에서 프랑스가 75밀리 대포를 사용한 뒤에야, 독일은 과거와 미래의 적들이 어떻게 무장할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통상 겁이 없는 많은 의화단의 무리를 75밀리 대포 2문 중 1문의 화력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 사건 후에, 2,000명이 방어 중인 중국 축성 마을에 대한 정밀 강습에서 이 신무기에 대한 사격을 실험했다. 2개 중대의 경보병과 75밀리 대포 2문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은 경보병중대가 1,500미터까지 전진을 하게 되자, 2문의 대포는 교대로 사격과 전진을 하였다. 프랑스 포수들은 600미터에서 전진을 멈추고서 착검을 하고서 돌격하는 경보병에게 화력을 최대로 집중하여 지원하였다. 2문의 대포 화력에 의해 완전히 제압당한 중국군은 저항조차도 할 수 없었다. 프랑스군은 단 1명만이 부상을 입고서 마을을 점령하였다.
“Miss 75”에 대한 비밀이 5년 만에 이 프랑스 75밀리 대포로 인해 알려지자, 각국의 군대들은 자신들의 속사포를 갖기 위해 달려들었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위스, 네덜란드 그리고 미국 등의 국가들은 프랑스 75밀리 대포와 비슷한 모양의 75, 76.2, 77밀리 대포를 채택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추세와는 달리, 영국은 오직 구경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83.8밀리 무기(18-파운드로 명명된)가 분당 20발 이상 발사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속사포이었다.
발칸 반도, 남미, 그리고 아시아의 미개발 국가들도 그들의 주변국가보다도 먼저 속사포를 획득하기 위해 자금을 사용했고, 무기상들은 이 혁명적인 무기를 적국에게 제공하여 엄청난 부를 쌓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05년경 독일군은 모든 북부 유럽의 군대보다도 능력이 뒤떨어진 대포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포병 연대에는 크룹(Krupp)과 에르하르트(Ehrhardt)가 해외에 판매한 무기보다도 성능이 뒤떨어진 무기로 가득 찼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일단 자각하게 되자, 독일은 96년형 대포를 광범위하게 개조하여 이와 같은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였다. 대부분의 신무기는 에르하르트가 수출한 분당 20발을 사격하는 96년형 신형 대포(Feldkanone 96 neuer Art)이었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독일도 마침내 늦게나마 속사화기를 가진 국가들의 일원이 되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일 군사전문가들은 이 신무기가 전장에서 바로 영향을 줄 수 있게 했다.
대부분의 전술 작가들은 속사포가 강판(steel shield)으로 곧 무장될 것이란 사실에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동의했다. 포술이 시작되면서 사수들은 매 발사마다 포, 포가, 그리고 바퀴를 깨끗하게 유지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이와 같은 조언을 무시했던 포수들은 대포가 뒤로 반동되는 힘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조언을 재차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말할 필요로 없이 이와 같은 무기에 장갑(armored shield)을 입힌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이로 인해 포수들은 반동되는 포가에 차이는 것은 무릅쓸 정도로 용감하게 되었다. 일단 사격 시 대포가 후진하던 것이 중단되자, 유산탄과 소총사격으로부터 포수를 보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 장갑의 효력은 시험 사격과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1909년 덴마크 포병은 2,000미터 떨어진 거리에 설치된 속사포 포대에 대해 유산탄을 270발 사격했다. 빈번하게 장갑을 타격하였지만, 단지 5개의 포탄 파편과 불발탄만이 장갑을 간신히 뚫었을 뿐이었다. 같은 해 콘스탄티노플 시가전에서 속사포 포대가 500~600미터 떨어져 있는 반군 보병에게 행동을 취하였다. 반군의 매서운 소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장갑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 머리에 총을 맞은 하사관이 포수중 유일한 사상자이었다
쿠토만(Qttoman) 제국은 덴마크 사격 시험과 내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형 대포에 대한 신속 사격과 신속 장전(quick-firing and quick-loading) 시험을 2차 앵글로-보어 전쟁(1889~1902), 러-일 전쟁(1904~1905), 발칸 전쟁(1912~1913)의 전장에서 하였다. 신무기 운용 방법에 대한 최선의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한 이유로는 전쟁을 보고하는 자와 그 보고를 받는 자의 편견에 일부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 교훈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쟁에서 도출된 교훈의 추세에 신뢰를 많이 두어야 했다.
포병의 관점에서 볼 때, 제2차 보어 전쟁의 뚜렷한 특징은 불균형에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영국군은 보어군보다 훨씬 많은 대포를 전장에 대동했다. 콜렌소(1899. 12. 15)에서 보어군에게는 5문의 대포만이 있은 반면, 영국군에게는 44문의 대포가 있었다. 피터스(Pieters) 언덕에서 영국군은 10문의 보어군을 70문으로 상대했고, 파르데브르그(Paardeberg 1900. 2. 19~27)에서는 그 비율이 96 대 6이었다.
이와 같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포병 비율이 암시하듯이 보어 전쟁의 전투는 ”움직이는 표적에 사격하는 소총 사격(turkey shoot)"하고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일부 문제는 장비에 있었다. 보어군은 포병 대포를 1896년 이후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 등의 다양한 무기밀매상으로부터 구입하였다. 이 대포들은 프랑스의 1898년형 75밀리 대포만큼 사격은 불안정하였지만, 고정탄약(fixed ammunition)의 덕택으로 영국의 15파운드 대포보다는 훨씬 빠른 신속장전기의 변형이었다.
이러한 불균형 때문에, 소수의 속사포를 가진 보어군은 영국군의 많은 구형 대포를 압도할 수 있었다. 1900년 2월 5일 브락폰타인(Brakfontaine)의 스피온 쿱(Spion Koop) 북쪽 언덕에서 3문의 75밀리 대포를 가진 보어군은 36문의 대포를 가진 영국군 보병 여단을 제압했고, 화력지원을 받은 보어 여단은 하루 동안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그러나 영국군 평사포는 사거리 열세로 응전도 하지 못했다. 비록 이 전투에서 영국군의 기동은 공격보다는 기만을 하고 사고로 인해 단지 3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분명히 보어군 포병의 전투력은 영국군 지휘관의 교전 의지를 빼앗기에 충분했다. 그다음 날 영국군 지휘관은 자신의 포병은 보어군 평사포에 압도를 당했고, 보어군의 진지는 너무나 견고하여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다고 상급자에게 불평을 하면서 공격을 중지시켰다.
영국군이 보어군 포병에게 어떠한 종류의 어려움도 주지 못한 채 완패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이었다. 통상 영국군은 보병이 공격을 하기 전에 분리된 대포병전(counterbattery battle)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군이 포격을 할 때, 대부분의 보어군은 포격을 받는 동안 하던 대로 대포를 은밀하게 숨기기로 선택만 한다면, 야지에 떨어진 영국군 포탄은 보어군에게 피해를 거의 줄 수 없었다. 보어군은 대포를 완편 된 중대에는 거의 조직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유산탄이 장거리에서 기능하지 않아 영국군의 폭격으로부터의 받을 피해가 줄어들었다.
영국군 보병과 포병의 협동작전이 실패했기 때문에, 보어군 보병은 생존하기가 더욱 쉬웠다. 영국군이 멀리서 중화기로 포격을 하면, 보어군은 가까이에 있는 참호 지면에 엎드렸다. 포탄이 폭발하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대피호 속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보어군에게는 영국군의 고폭탄은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리다이트(lyddite)가 가득 차 있는 이 폭약의 위력은 너무나 미약하여 포격 중에도 일부 용감한 보어군들이 참호 밖으로 나와 커피를 끓여 먹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일 영국군의 대포가 유산탄을 사격할 수 있는 거리까지 충분히 근접하게 되면, 보어군은 대피호 속으로 몸을 구부려 숨었다. 더 이상 커피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몇 인치 상공에서 빠르게 비행하는 유산탄의 파편에는 여전히 안전했다.
만약 영국군이 보병과 포병으로 동시에 공격했더라면, 보어군은 이와 다른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즉, 보어군 포수는 영국 포병의 화력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거나 또는 침묵 속에 있으면서 침략을 당할 가능성이 증가되므로 노출되는 것을 각오하고 보병에게 사격을 해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보병도 홉손(Hobson)의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만약 사격을 하기 위해 참호에서 일어선다면, 그들은 유산탄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반대로 참호 속에 계속해서 깊숙이 숨어 있는 다면, 영국군 보병은 방해를 받지 않고서 사격지대(field of fire)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코렌손(Colenson) 전투(1899. 11. 15)에서도 이와 같은 전형적인 면이 있었다. 보어군의 전투력(75밀리 평사포 5문, 120밀리 곡사포 1문, 소총 4,300정)은 투거라(Tugela) 강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소산 되어 있었다. 약 18,000명의 영국군(4개 보병여단과 5개 포대(15파운드 평사포 30문), 급조 포가(improvised carriage)를 가진 장거리 함포 14문, 소수의 산악부대)은 철도를 따라 투거라강으로 이동했다. 보어군은 통과를 강행하는 영국군을 저지해야 했다.
보어 진영에 대한 6문의 장거리 함포 포격으로 전투는 시작되었다. 4,000미터 거리에서의 리라이트탄 사격은 보어군이 숨어 있는 언덕을 별 어려움도 없이 명중했다. 쌍안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영국군 장교의 눈에는 이 포격이 무서울 정도로 효과가 있었다. 너무나 효과적인 포격에 인해 전날 그 언덕에서 관찰되었던 보어군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보어군은 그들의 진지에서 철수를 해야 하는 걱정과 보병의 행군을 엄호해야 하는 고민을 동시에 했다. 주위 3방향에서 쏟아지는 소총탄과 유산탄 공격 때문에, 2문의 평사포와 함께 전진하던 영국군 포병 지휘관은 보어군 참호 1,000미터 전방에서 저지를 당했다. 이 장거리 사격도 보어군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심지어 이 자극은 보어군의 사격통제(fire discipline)도 무너뜨리지 못할 정도로 미흡했다.
영국군 포수들은 보어군을 타격하기 위해, 1분 30초마다 1명씩 타격하는 빗발치는 소형 탄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포를 침착하게 조작하면서 1시간 동안이나 용감하게 싸웠다. 보어군이 다음과 같이 발표하지 않았지만, 영국군은 보어군 진지 위에 일부 유산탄을 방출할 수 있는 사거리에 도달하여 포탄을 조정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타당했다. 이와 같은 대응 사격(counterfire)으로 인해 개활지에서 방호를 받지 않고 서 있는 포수들의 사상자가 비교적으로 적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포탄이 바닥나자, 보어군 포수들은 근처에 있던 움푹 패인 대피호로 철수했다. 몇 분 후에 수명의 영국군 보병이 시야에 들어오자, 보어군은 새로 출현한 위협자에게 집중사격을 했다. 대포(와 전체 지휘)를 포기한 영국군 포수들은 적의 수중에 대포를 넘겼다는 불명예를 피하는 것보다는 보어군을 물리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함포의 사격은 계속되었다. 보어군 진지 후방으로 발사된 고폭탄은 후방에 위치한 보어군이 내선의 이점을 갖지 못하게 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전술적 예비대를 신속하게 전환하는 것이 보어군의 각본은 아니었지만, 전환하기에 가장 적합한 통로가 퍼 붇는 포탄에 의해 차단되어 보병이 대형을 갖추고 기동 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이와 같이 유치한 차단사격(interdiction fire)은 보어군 후방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려는 영국군의 어떠한 시도도 방해하는 양쪽에 날이 선 칼과도 같았다.
물론 함포를 지휘하는 장교가 피아를 식별할 수 있었더라면,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4,000미터 거리에서 누가 제국의 카키색 옷을 입었고 누가 보어군의 골덴복을 입었는지 구별하기는 어려웠다. 이와 같이 영국군 보병이 일부 보어군을 그들의 참호로부터 끌어낼 수 있었다 하더라도, 함포는 개활지를 천천히 이동하는 보어군이 제공한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다. 유리한 지점에서 장거리 포수는 사격지대(field of fire) 내에서 이동하는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표적의 국적을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거리 포수들은 사격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은 코렌소(Colenso)에서의 호기를 잡지 못했다. 영국군 포대가 포대 상호 간 또는 보병과의 협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전투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어군의 대포도 지극히 국지적인 효과밖에 만들지 못했다. 대포가 소산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영국군 포병에게는 단일 표적에 그들의 화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게 했던 분산 배치이며, 또한 보어군에게는 노출된 단일 목표에 대해 5문의 대포와 1문의 포병이 동시사격하여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사거리(코렌소에서 전장의 폭은 5,000미터 정도이었고, 보어군의 무기의 사거리는 6,000~7,000미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리와 지휘 정렬(command arrangement)에 있었다.
보어군도 그들 삶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방어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방어 지향적인 성향 때문에 그들은 그저 영국군을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곳에 붙잡아 두는데 만족하여 영국의 대군을 섬멸하겠다는 관점으로 이점을 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약하게 무장된 주루(Zulu) 및 마타벨(Matabel)과 소규모 근접 전투를 하는 동안 발전된 사고 습관에 의해서 보어군은 전투를 시야에 있는 병력으로부터 현실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국 보어군은 평사포를 전쟁의 전체 흐름에 영향을 주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어군의 주력 무기인 연발총(magazine)의 변형으로 운용했다. 보어군의 포수들은 분리된 지휘체계로 구성된 포대임에도 불구하고, 각 대포들이 일단 분리가 되면 그 인접 지역을 점령한 선정된 보어군 소총 지휘자의 효과적인 지휘하에 들어갔다. 코렌소에서 보어군 지휘관의 지휘하에 있던 1문의 포는 지휘소 옆에서 사격개시 신호를 직접 하달하는 용도의 화포이었다.
영국군은 무장 병력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이 영국군의 결함을 충분하게 이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보어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 그러나 모두가 기대했던 대로 영국군이 전쟁에서 완승하지 못한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영국의 군사 전문가주의 번창과 일치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곧 업무에 대한 철저한 재검토를 착수했다. 이는 보병에게는 소총 사격술과 야전 기술(field craft)에 대한 강조가 매우 증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포병에게는 완전한 재무장이었으며 규정에 대한 완전 개정이었다.
1914년의 영국군 포병은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된 포병 중의 하나였다. 영국군 포병의 주장비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대다수의 군이 채택했던 구경이 가장 큰 18파운드 속사포이었다. 이와 같이 일반적인 상식으로부터 정상에서의 이탈한 이유는 (이 무기에서 발사된 포탄은 그다음으로 큰 대포인 프랑스 75밀리에서 발사되는 탄두보다 2파운드 정도 더 무거웠다.) 참호 속의 소총수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무기에 대한 보어 전쟁에 참전한 예비역들의 바램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더구나 영국군 포병은 교리를 편찬하는 데 있어 보어군과의 전투에서 도출한 교훈에 크게 의존했다. 영국 방어 규정은 보어군을 완전히 모방했다. 적군이 우세한 포병을 가졌다면, 포는 보병의 사격선(firing line)을 따라 포대(6문)나 반(2문) 단위로 분산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 또한 측면공격의 이점을 이용하고 전진하는 전위에게 종사(enfilade)를 하거나, 또는 공자에게 교차사격(cross fire)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우세한 포병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대포를 집결했을 것이다. 공격 시 집결된 대포는 보병이 공격하려는 적 전선에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화력은 적이 전선을 보강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적진지 후방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적 포병은 더 이상 사격 중인 대포의 주요 표적 목표가 될 수 없었다. 보병 공격보다 선행하는 포병 대결은 없었다. 만일 적 포병이 보병 공격에 위협을 준다면, 적 포병을 사격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 적 포병이 영국군 포병을 사격한다면, 영국 포병은 숨기지 않고 오히려 공격 중인 보병에 대한 압박을 제거하기 위해 사격을 계속해야 한다.
영국만큼 포병은 지원 병과이며 보병의 보조자로서의 역할만이 정당하다는 가장 보편화된 교리를 받아들인 나라는 없었다. 소총 사격에 의해 혼비백산된 전체 대대의 기억이 이 교리를 수용하는 장교들의 머리를 선도하는 지와는 관계없이 남아프리카의 가정에 전적으로 근거를 둔다. 공격 중인 보병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적 보병이다. 포병의 궁극적인 주임무는 보병에게 상대방보다 화력의 우세(fire superiority)를 갖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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