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역사

제3장 곡사포의 출현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7. 10. 05:34

3. 곡사포의 출현
(HOWITZERS)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된 후 최초 3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접촉한 전장 어디에서나 이야기는 똑같았다. 프랑스 평사포는 상대방 독일 평사포보다 더 멀리, 더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하게 사격을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가 경우에 따라 상쾌할 정도로 국지적인 승리를 했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승리도 가장 실질적인 목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 확장된 전투에서 독일군 포수는 충격을 최대로 줄이려는 곳에 포탄을 투발하려는 전술적인 감각을 가진 반면, 프랑스군 포수는 효과적으로 보병과 협동할 수 있는 위치에 거의 있지 못했다.
독일군은 우월한 전술 교리와 훈련을 제공받은 장점에 추가하여, 많은 곡사포 재고가 주는 주요한 기술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1914년의 기동전에서, 동일 종류로는 다른 어떤 것으로 도저히 대적할 것이 없던 대포병용 프랑스 75밀리 대포를 더 강력해진 독일 곡사포는 사거리 면에서 능가했다. 심지어 독일 곡사포가 프랑스 평사포의 사격척(firing fan) 내에 위치했을 때에도, 독일 곡사포는 차폐진지를 점령하여 프랑스 포격으로부터 자신을 종종 면역시킬 수 있었다. 평탄도인 75밀리 대포는 모든 종류의 차폐진지에서 사격을 할 수 있었지만, 감사(plunging fire)를 투발하는 능력은 매우 제한받았었다.
1914년 가을 기동전이 참호전으로 변하여 전장이 소강상태가 되자, 곡사포 군수품 저장소(howitzer park)를 더 많이 보유한 쪽은 더 유리해졌다. 더 분명한 이점은 포탄 무게에 대한 곡사포 비율이 평사포 비율보다 양호한 데 있었다. 참호전에서 지배력을 가질 수 있었던 장거리 사격을 하는 곡사포가 표적 형태에 대해 제공했던 매우 높은 정확도는 덜 분명했지만, 역시 중요했다.
통상 평사포를 탑재할 수 있도록 제공된 포가(carriage)는 훨씬 더 큰 포탄을 발사하는 대구경의 곡사포를 탑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16년형 미육군 3인치(76.2밀리) 평사포의 무게는 3.8인치(96밀리) 곡사포 무게와 같았다. 곡사포 포탄 무게는 30파운드인 반면, 평사포 포탄 무게는 15파운드이었다. 미국의 4.7인치 평사포와 6인치 곡사포와의 관계도 이와 비슷했다. 거의 같은 크기의 포가에 탑재된 곡사포는 120파운드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반면, 평사포는 60파운드 포탄만을 발사했다.
곡사포가 크기(부피)가 더 커진 포탄을 사격할 수 있게 되어 폭약(explosive)이 더 많이 들어 있는 포탄을 투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직접 명중(direct hit)은 피해를 더 많이 줄뿐만 아니라, 비록 약간 빗맞더라도 참호를 점령한 인원과 참호 자체의 구조적인 통합에 해로움을 더 많이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속 무게(weight of metal) (폭약 무게(weight of explosive)라고 표현되어야 할)“가 더 무거워질수록,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곡사포에 있던 다소 느린 발사속도(rate of fire)를 더 많이 보상했다.
1916년판 미 포병지(Field Artillery Journal)에 발표된 논문에는 곡사포가 정확할 때 생기는 이점이 잘 설명되어 있다. 미국의 3인치 평사포와 4.7인치(120밀리) 곡사포가 사격한 사거리별 실험 자료를 인용했던 이 논문의 저자인 미육군 스코트(E. D. Scott) 소령은 규격이 일정한 참호지역에서 같은 직접 명중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곡사포 포탄은 평사포 포탄의 반 정도만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2,000~3,000미터에서 곡사포 포탄 1발이 갖는 명중 확률(probability of a hit)을 얻기 위해서 평사포 포탄은 평균적으로 2.5발이 필요하므로 평사포에 대한 곡사포의 장점이 분명했다.
1916년 가을, 스코트 소령이 참호전에서의 곡사포의 적합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까지는, 유럽 육군은 전쟁 첫해 겨울 어렵게 승리한 경험에서 경평사포의 한계를 실감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도 곡사포를 대규모로 채택하게 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유럽 육군이 포병에 대한 접근을 독일식을 채택하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따르던 지에 대한 결정은 전쟁 이전의 성향과 산업동원의 어려운 현실을 결합하는 기능에 좌우되었다.
예를 들어 1914년 10월 프랑스 육군부는 75밀리 평사포보다 강력한 포병 무기가 필요하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그러나 육군부는 이와 같은 이해를 선도했던 프랑스군에게 독일군 곡사포에 상응하는 무기를 대량생산하도록 명령하기보다는, 19세기말의 "더 방쥬(de Bange)" 체계의 평사포와 곡사포로 구성된 구식 공성무기(siege weapon)로 중포대(heavy battery)를 구성했다. 프랑스군은 유용한 155밀리 곡사포를 이미 생산 중이었고, 슈나이더(Schneider) 공장에서는 불가리아로 수출하기 위해 최초로 설계된 1급 105밀리 곡사포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육군부는 평사포를 대량생산하는데 집중하기를 원했다.
프랑스가 곡사포를 경멸한 이유에는 75밀리 속사기를 도입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 무기의 장점 때문에 75밀리 경평사포가 사단 및 군단포병 연대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학파의 발전에 기여했다. 전쟁 발발 직전 독일에서 경곡사포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었을 때, 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상학파 회원들은 독일도 77밀리 평사포의 열등함을 보상할 수 있는 정도의 곡사포만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에서 반곡사포 학파의 지위는 1911년에 발행된 유명한 소책자에 잘 요약되어 있었다. 포병이 접할 모든 과업에서 75밀리 평사포가 경곡사포를 능가한다는 것이 이 소책자의 핵심 내용이었다. 75밀리 평사포의 빠른 발사속도와 (보다 효율적으로 비행하는 탄도 결과를 가져다주는) 평탄도(flat trajectory) 때문에, 평사포가 곡사포보다 유산탄을 사격하는데 더 좋은 수단이었으며, 심지어 적 포대가 엄폐된 경우에도, 적이 숨어 있는 곳이 9도 이상 급경사진 경우에만 평사포가 곡사포보다 열등했다.
곡사포를 선호하는 원동력은 발칸 전쟁(1912~1913)에 대한 전장 보고서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관찰자가 기록한 첫 번째 사실은 참호를 점령한 포대는 개활지에 설치된 평사포 포대를 파괴할 수 있는 규칙성이었다. 두 번째 사실은 곡사포의 고사계 사격이 탄두의 폭발력보다 너무 평가 절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 도출된 일반적인 교훈 때문에 프랑스 육군이 곡사포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라, 75밀리 평사포가 발사하는 탄두보다도 더 강력한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화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발칸 전쟁 연구결과에 의해 곡사포를 추가적으로 조달한 것이 아니라, 현대식 155밀리 곡사포와 구식무기(120밀리 곡사포와 155밀리 및 120 밀리 평사포)로 혼합되어 장비된 5개 중포병연대를 구성하기로 바로 결정하였다.
종국적으로 경곡사포를 구입하는데 예산 사용을 찬성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 의회도 기술적인 논의에서는 오랫동안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전쟁 직전의 독일 위협과 발칸 군의 경험이 결합되어 육군부가 경곡사포 구입을 위한 예산을 요구했을 때, 대의원들은 곡사포 구입을 반대하는 쪽으로 투표를 했다. 특히 75밀리 포탄에 부착되면 탄도의 효율성이 감소되는 값싼 장비의 재고품을 구매하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개조된 75밀리 포탄도 곡사탄도(curved trajectory)를 가졌기 때문에, 값싼 장비 구입을 주장한 자들은 현대식 경곡사포를 구매하는데 많은 비용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값싼 대안을 주장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제1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병역에 유일하게 있었던 현대식 곡사포는 군급 제대의 중포병 5개 연대중 3개 연대에 할당된 155밀리 중곡사포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동맹국 중에서 이탈리아와 벨기에만이 최소화 정책을 공유했다. 프랑스처럼 이 국가들도 단지 군이 건의한 중곡사포만을 획득하도록 제한했다. (그러나 벨기에의 경우, 이와 같은 결과는 경곡사포의 장점에 대한 평가가 미흡했다기보다는 이상적인 경곡사포의 구경을 결정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이었다.) 프랑스 무기로 무장된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포함하는 모든 1, 2등급 국가들은 구경이 100~122밀리인 경곡사포를 획득하려고 시도했다.
1904~1905년의 러일전쟁을 경험한 러시아는 독특한 경곡사포의  장점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경평사포 포대의 재조직을 방해했던 재정 문제로 상당히 많은 곡사포를 획득하려던 계획은 방해를 받았다. 러시아만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각 군단에게 12문 단위 122밀리 경곡사포 대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경우가 빈번히 발생됨에 따라, 더욱 완벽한 곡사포의 부활은 곡사포를 결코 사장시킨 적이 없었던 군으로부터 나왔다. 1911년경 남아프리카에서 5인치(127밀리) 곡사포를 많이 사용하였던 영국 육군은 각 원정군 사단에 4.5인치(114밀리) 곡사포 16문을 제공했다. 그러나 영국 병역에는 군단포병이 없었고, 6개 사단의 원정군에는 군포병은 독점적으로 왕실 수비대 포병(Royal Garrison artillery)의 60파운드(127밀리) 평사포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쟁이 발발되었을 때, 영국의 야전부대 중 사단급 제대에만 유일하게 곡사포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주요 주력군중에서, 오로지 독일만이 현대식 곡사포를 사단과 군단의 편제의 일부로 보유했다. 제1차 세계 전야, 독일 상비 사단의 포병중 대략 1/4 정도(3,300문 중 954문)가 105밀리 경곡사포로 구성되었다. 근무 중인 현대식 포병 대포와 비례되는 증가 없이, 독일 육군의 사단 수를 증가시킨 동원 때문에 다소 높았던 경곡사포의 집중은 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독일이 개전한 1914년 경평사포 5문당 경곡사포 1문이 있었다.
1914년 독일은 경곡사포를 보강하기 위해 (프랑스의 155밀리 곡사포와 수행 능력이 동등한)  150밀리 중곡사포 416문을 배치할 수 있었다. 비록 중곡사포가 공성 포병(siege artillery) 병과에 속했을지라도, 중곡사포는 4개의 완전 기동 포대로서 각 상비 사단에 배속되어 대대를 구성하는 포대로 편성되었다. (1914년 독일 육군에는 군단급 제대의 포병 지휘관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각 군단의 중곡사포 대대는 2개 구성 사단 중 1개 포병여단에 배속되었다.)
독일군이 경곡사포를 보유한 이유는 급조 야전축성에 의해 방호를 받고 있는 적 포병 및 보병과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경곡사포가 필요하다는 포병장교와의 교감 때문이었다. 1878년 루쏘-터키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 관측자들은 평사포가 유산탄 대신에 고폭탄을 사격할지라도 야전축성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평사포와 120밀리 곡사포로 감소-장약 포탄(reduced-charge shell)을 실험한 후에, 1898년 독일 육군은 105밀리 곡사포로 결정했다. 1909년 현대적 반동 구조로 개선된 곡사포를 도입했다.
처음 경곡사포가 독일 포병에 도입되었을 때, 육군부는 군단에 할당되었던 8개 평사포 대대 중 1개 대대를 경곡사포로 대체하려고 했다. 1905년 육군부는 그레코-터키 전쟁(1897년), 2차 앵글로-보어전쟁, 의화단 폭도, 그리고 러일전쟁에 대한 보고서를 분석하여 독일 당국에게 증가된 중곡사포의 가치를 확신시켰다. 그래서 경곡사포의 수(와 경곡사포 대대의 수)는 2배로 증대되었다. 이와 같이 독일 상비사단은 자신의 18문 단위 경곡사포 대대를 가지고서 전쟁에 참가했다.
한편 중곡사포 사용자로서의 독일의 선도적인 지위는 독일의 다양한 기관과 교리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한 결과로부터 나왔다. 1891년 총참모장이 되었던 쉬리에펀(Count Alfred von Schlieffendms)은 프랑스와 전쟁을 하기 위한 자신의 전역 계획에서 프랑스 또는(와) 벨기에 요새의 신속한 감소를 요구했기 때문에, 야전군을 중포병으로 무장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일련의 역동적인 검열관이 이끄는 공성포병 병과는 쉬리에펜과 활발하게 협조했다. 본래 요새에 설치하기 위한 중곡사포와 장거리 평사포의 포가를 변경하는데 그들에게 허락된 노력을 집중하였다. 승인을 덜 받은 방법으로서 야지 기동작전에서 거대한 무기를 이동할 수 있도록 민간 기술자를 고용했으며, 개인 소유의 말을 빌리는 것도 포함했다. (본래 요새 또는 공성훈련에 할당된 많은 독일 중포대에는 편제상 수송수단이 없었다.)
군단장은 독일 야전군이 중포병으로 장비되는 것에 대한 반대를 선도했다. 황제로부터 평시 훈련과 전시 운용의 직접적인 책임을 부여받은 군단의 장교들은 작전 속도를 유지하는데 관심이 대단히 많았다. 1866년(오스트리아)과 1970년(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육군이 승리한 이유는 대체로 그들의 우세한 작전적 기동성에 있었다. 이 장점의 일부는 독일의 철도망과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일반참모 대몰트케(Elder Moltke)의 능숙한 전과확대에 공을 돌려야만 했다. 군단장의 심정에 가장 비슷한 다른 측면은 가능한 한 방해를 받지 않고서 사단이 철도수송 종점에서 하차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독일 군단장이 많다고 느끼는 중포병 대포문수 때문에 행군종대는 연장되었고, 병목지점에서 교통문제가 야기되었다. 중평사포를 끄는데 필요한 중말 때문에 포병과 기병대에게 급속도로 증가된 말을 먹이는데 필요한 목초의 공급에 대한 긴장감이 더욱 증가되었다. 심지어 말이 느끼는 심한 갈증도 문제가 되었다. 야전훈련 간 군단장은 큰 대포를 끄는 코끼리에게 줄 식수를 얻기 위해 마을마다 행군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조직 전체가 방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결국에는 중포병 집단은 교통 혼잡보다도 축성 때문에 이동이 더 위협을 받았다고 황제를 확신시켰다. 1900년대 야지연습에 대한 훈시에서, 황제는 장차 포병에 속하게 될 105밀리 곡사포를 “경곡사포(light field howitzer)"라고 명명했고, 공성포병 요원이 운용 및 지휘하는 150밀리 곡사포를 ”중곡사포(heavy field howitzer)"로 명명하도록 지시하여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독일 중곡사포는 공성포병의 원조로서 충실하게 고폭탄을 제공받았다. 지연신관을 사용할 때에는 이 신관이 폭발하기 전에 고폭탄이 영구요새의 콘크리트 지붕을 관통하도록 설계되었다. 비록 물자 표적을 폭파하는 것이 주목적일지라도, 고폭탄의 폭파 효과는 제한된 공간 내에 갇힐 정도로 운이 없었던 군인을 황폐화시켰다.
독일은 개활지에 있는 부대에 사용하기 위한 유산탄을 경 및 중곡사포에 최초로 제공했다. 이것에 추가하여 경곡사포는 소량의 유산탄을 넣기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고폭탄의 충전물 일부가 희생된 “단위탄(unitary shell)"을 사용했다. 1905년에 도입된 이 탄두에는 공중 파열(air burst)을 제공하는 장약 도화선 시한신관(a powder-train time fuse)과 표면파열을 위한 충격신관(surface burst impact fuse), 그리고 표면하 파열(subsurface burst)을 위한 지연신관(delay fuse)이 장착되었다. 1905년에 도입된 ”단위탄“은 1914년의 전역을 시작하는 대부분의 독일 경곡사포 포대에게 탄약상자로 운반된 유일한 포탄류이었다.
서로 상이한 특성을 가진 무기를 표준화하려던 평소의 많은 시도처럼, 독일 ”단위탄“은 실패할 것이 자명했다. 고폭탄의 충전물로부터 공간을 확보하여, 추가된 탄약은 유산탄만큼 비싸게 만들어졌다. 그 결과 이 단위탄은 고폭탄으로서 역할을 더 이상하지 못했다. 1914년 8월 전역이 실제로 시작되자, 이 결점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단위탄“은 기존의 고폭탄과 유산탄으로 바로 대체되었다.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곡사포(105밀리와 150밀리)는 참호전 초기에 독일에게 많은 이점을 제공했다. 오스트리아와 매우 분주한 러시아, 남아 있는 영토 조각을 방어하느라 감소된 벨기에, 소부대를 다시 만들려고 정열적으로 시도하는 영국처럼, 프랑스에게 무인지대를 통과하여 독일의 참호를 점령하라는 과업이 하달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독일이 곡사포 사용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곡사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프랑스 포병이 독일 야전축성 점령자를 교란시키지 못하는 동안, 독일군은 참호에 둘러싸인 프랑스군에게 심각한 손실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불균형이 주는 최초 충격은 대단했다. 독일 곡사포의 체계적인 포격(systematic bombardment)에 타격을 받은 프랑스군은 빈발하게 자신의 좁은 참호를 포기하곤 했다. 프랑스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탄약과 예비대가 부족한 독일에게는 원하는 횟수만큼 포격을 할 수 있거나 또는 국지적인 성공을 더 중요한 승리로 전환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독일 지도부는 곡사포에 대한 실질적 가치가 담긴 교훈을 놓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후 독일 육군이 양성한 첫 번째 사단(1914년 10월에 만든 예비사단)은 기병, 기관총, 수송 수단, 그리고 포병이 부족했다. 그러나 평사포와 경곡사포의 비율이 전쟁 이전의 3대 1에서 2대 1로 높아졌다. 1914년 12월 양성된 일련의 사단들은 평사포에 대해 더 높은 곡사포 비율을 갖게 되었다. 평사포당 경곡사포 1문을 보유하는 것에 추가하여, 독일 군역사상 처음으로 이 사단들에는 150밀리 8문의 중곡사포 대대가 할당되었다. 1915년 3월경, 독일 육군부는 2개 평사포 대대와 1개 경곡사포 대대로 구성된 포병연대로서 이상적인 사단 포병을 정착시켰다. 예비사단에는 경곡사포 대대를 더하고 오래된 상비 사단으로부터 평사포 대대를 빼는데 2년이 소요되었지만, 결국에는 평사포 2문당 경곡사포 1문의 표준비율로서 결론이 났었다.
1917년 말까지 중곡사포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중포병은 독일군 사단의 영구적인 부분으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후 달이 지날 때마다, 독일 사단에는 일시적으로 배속시킬 수 있는 더 많은 포병이 가용했다. 독일 야전군에는 148개의 중포병 포대를 가지고서 전쟁을 시작했다. 이들 중 104개 포대는 상비군단에 배속된 중곡사포 포대이었고, 나머지는 210밀리 중곡사포, 공성 박격포(280밀리, 305밀리, 420밀리), 그리고 중요한 적의 축성을 처리하도록 원래부터 군에 배속되었던 100밀리 중평사포 대대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2년 뒤, 전선에 있는 독일 중포병 포대의 수는 1,380개로 증가했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증가된 독일군 중포병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은 자신들의 중포병 부대를 만드는 일련의 계획을 착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최초 2년 동안, 프랑스 자신의 중포병 부대를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창고에 방치되었던 노후된 무기를 꺼내어 이것으로 포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 대포들은 중포병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검증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포탄(95~155밀리)을 사격할 수 있은 반면, 2가지 논점에서 독일 중포병 집단보다 열세했다. 첫째, 현대식 반동 구조가 미흡했다. 이 때문에 발사속도가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둘째, 곡사포라기보다는 평사포이 었다.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무기의 성능을 개선하려는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1914년, 1915년 그리고 1916년의 프랑스 중포병은 상대방 독일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항상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만약 프랑스가 전쟁 이전의 교리대로 평사포를 가능한 한 전방으로 더 멀리 위치시키려고 했더라면, 이 시도는 참사로 결론이 났을 것이다. 참사의 정도는 독일의 공성포병병과 장교들이 프랑스 모의 평사포 포대를 4문 단위 중곡사포(150밀리) 포대로 80에서 100발을 사격하여 활동을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쟁이전 실험에서 측정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폭 100미터와 종심 400미터의 직사각형 내에 위치한 표적인 포대는 30~50%의 인원과 60~65%의 평사포, 포차, 탄약상자 그리고 기타 물자를 잃게 될 것이다.
프랑스가 포병을 후방으로 멀리 이동하는 것을 선호했던 전쟁 이전의 신념을 재빨라 버렸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지형의 특성에 따라 실제 거리가 변했을지라도, 보병은 통상 참호 2,000~3,000미터 전방에 있는 포병진지로 이동했다. 똑같은 일이 독일 주어졌다면, 2,000미터 이내 거리에서 포대가 서로 사격하기보다는 4,000~6,000미터 정도 분리시키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프랑스 북동부의 지형 특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와 같은 결과는 대치하고 있는 포병사이에는 1개 이상의 언덕, 숲 또는 다른 지형이 주는 차폐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 이전의 군사 전문잡지의 기사에서 예견되었던 것처럼, 이로 인해 적 포병의 위치를 알아낸다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아무렇게나 사격(firing blind)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교적 작은 융기 뒤에 위치한 포대는 바로 이것 뒤, 3,000미터 뒤, 혹은 그 사이 어디라도 위치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참호전에서 사용되었던 반영구적인 평사포 진지의 특징 때문에 포대가 지상에서 눈에 덜 띄게 되어 교회탑, 언덕, 비행기에서조차 표정 하기가 어려웠다. 위장할 수 있는 시간적 영유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대포와 포수에게 말, 탄약상자, 장비수송 마차처럼 숨길 수 없는 병참물자를 갖지 못하게 방해할 필요가 훨씬 줄어들었다.
다른 교전국들도 적 포병을 격멸하려는 그들의 시도가 비슷하게 방해받았다. 거의 전 세계적으로 간접 사격을 선택하고 포대를 후방 멀리에서 계속 유지하려는 모든 군의 경향은 대포병사격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소용없게 만들었다. 많은 요원이 동시에 군복무를 하는 보다 더 진보된 국가의 과학 집단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법을 개발하려고 착수했다. 그동안 유럽의 포병은 포병 상호 간에는 위험하지는 않았으나 보병에게는 매우 해로웠다.
이와 같은 이유로 2가지 중요한 결론이 나왔다. 첫째, 보병과 포병간 연락의 어려움이 더욱 증가했다. 이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우군에 의한 사격(friendly fire)(프랑스 포탄이 프랑스 장병에게 떨어지고 독일 포탄은 독일군 장병에게 떨어지는)이 많이 발생했다. 둘째, 대포병사격과 보병 지원사격 간의 전통적 관계가 반전되었다. 오직 어둠 속에서 찌르기만으로 적 평사포를 빼앗는 주요 수단인 현재와 같은 대포병사격을 한 후에 보병으로 적을 뒤집었다.
이런 현상의 뜻밖의 결과로 대포병사격을 할 수 있는 눈을 얻게 된 곡사포는 적 대포에 대한 공격을 열망하는 보병의 중요한 보조 수단이 되었다. 더 높아진 정확성과 더 무거운 포탄을 가진  곡사포는 공격하는 보병으로 하여금 무인지대로 돌진할 수 있게 했고, 적 포병이 대응하기 전에 적 참호로 보다 쉽게 진입하게 했다. 만약 공자가 성공적으로 돌진하게 되면, 공자는 방자의 포병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군과 적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신하지 못하면, 공격의 보병을 타격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보병도 타격할 것이다. 한편, 만약 공격하는 보병이 시기적절하게 방자와 교전을 하지 못한다면, 빗발치듯 쏟아지는 유산탄의 첨단에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참호전 첫해의 목표는 최전방 참호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방자의 포대가 공자에게 살상을 입히고 (그리고 확실히 그렇게 하였고), 상당히 많은 자원이 여전히 대포병사격에 할당될지라도, 대부분의 방자 보병으로 채워졌던 무인지대에 가장 근접한 참호가 방어의 “중심(center of gravity)”이었다. 만약 이것이 무너진다면, 전체 진지를 빼앗길 것이며, 만약 이것을 확보한다면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병들이 싸우기를 주장하는 한, 포병의 임무는 간단했다. 공자의 보병이 방자의 참호에 도달할 때까지, 참호 내에 있는 방자를 적어도 꼼짝 못 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공격이 동반하는 파괴가 크면 클수록, 공격 효과의 정도는 더 커지고, 제압효과는 더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런 종류의 전투를 완성하는데 최상위 제대였던 군이 가장 큰 중포병부대와 곡사포를 가장 높게 할당받아 전투에 임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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