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역사

제4장 포병과 보병의 역할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7. 10. 05:35

4. 포병과 보병의 역할
(Artillery conquers, Infantry occupies)



독일 육군이 곡사포를 조숙하게 선호하는 지혜를 유럽군에게 확산시킨 것에 추가하여, 서부전선에서 참호전의 시작은 모든 관련자에게 포병을 더 큰 전투에 적합하게 만드는 방법을 재차 생각하도록 강요했다. 혁명적인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조건에 가장 빨리 적응했던 사람과 제도는 과거의 해법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쓸모가 없던 수법이 프람더스(Flamders)의 진흙과 캄파뉴(Compagne)의 이회질 언덕에 고착되어 있던 군을 무겁게 압박했다. 참호전에 적용했던 자신들의 방법을 기동전을 준비하는 방법에 자주 반영했다.
포병 전술을 변경하기 위해 처음 투입된 프랑스군 장교중 한 명은 1914년 기동 전역에서 보병연대 및 사단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빼땅(Philippe Petain)이었다. 포병 화력에 의한 체계적인 공격준비(systematic preparation of attack by artillery fire)를 오랫동안 주창했던 그는 그 당시 프랑스 육군에게 아주 유명했던 “포병(red trouser)" 학파에게는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1900년 초에 이미 남아프리카 전투에 관한 책을 읽었던 그는 적 진지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와 특정 지형을 관리하기 위해 특정 부대를 할당하는 의견에 우호적이었다. 많은 패배로 프랑스 육군이 고생했던 1914년 가을, 이와 같은 접근으로 그에게 명예와 진급을 가져다준 사소한 승리를 많이 했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빼땅의 관점이 공식화되었다. 1914년 11월 28일, 죠프리(Joffre)는 제한된 목표(수개의 참호)에 대한 지시, 목표에 대한 항공 정찰을 포함하는 정성 들인 정찰, 공격 측방에 대해 독일이 사격할 수 있는 진지 탐지, 화력으로 공격해야 할 부대와 공격 측방이 보호되어야 할 부대 지명, 철조망 장애물을 개척하기 위해 사다리와 폭약통으로 장비된 개척 공병으로 증강되어야 할 소규모 보병종대 사용, 그리고 각 공격부대를 위한 시간계획표(timetable) 설정을 포함하는 공격 방법을 건의하는 회장을 발표했다. 보병이 공격할 수 있을 때까지, 포병은 적 참호에 사격을 했다. 그 당시 포병은 적 제1선 후방에 탄막(barrage)을 형성하기 위해 사격을 했다. 추가로 포병은 독일에게 공격 측방을 사격을 할 수 있는 진지에 사격을 했다.
체계적인 공격을 위한 죠프리의 비법에 대해 상대방인 독일도 같은 일반 지침으로 발전시켰지만, 원료의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에 의해 나타난 방법은 매우 다른 맛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개척 공병의 기술과 수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참호 박격포(trench mortar)를 보유한 독일은 포병으로 철조망 문제에 대한 어떠한 염려의 필요도 제거했다. 연대장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부대 간 자발적인 협조를 강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독일의 지휘 통제 철학은 지시의 필요성을 감소시켰다. 계급 간 단체 의식은 이러한 철학이 가능하게 했고, 또한 계획 수립 과정을 반복 과정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말하자면 참모장교가 작성한 후 지휘계통으로 발표된 세부계획보다는 독일의 계획 수립 과정에서 모든 제대의 지휘관 간 더 진솔한 이야기를 포함할 것 같았다.
참호로부터 시작되는 행군선으로의 전개가 주의 깊게 준비된 계획에 의해 대체된 최초 독일 공격은 1914년 10월 30일 벨리(Vailly) 근처에 있는 아이슨(Aisne) 강 북쪽 제방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종대 선두 차량을 탑승한 지휘관이 하던 신속한 상황 평가는 이 공격에서 1주 동안 계속된 항공사진을 포함하는 정찰 노력으로 대체되었다. 부대가 가용할 때에는 포대 급식을 위해 관습적으로 설계된 조직인 특정 부대를 특정지역과 특정표적에 신중하게 할당하여 탈취했다. 그러나 확실한 시기에 확실한 표적에 대해 사용될 확실한 사격형태를 요구하는 시간계획표를 작성하는 것이 가장 극단적인 변화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구식체계가 남아 있었다. 군단(1군의 3군단이 공격을 실시하는 대형일지라도, 군단 포병본부를 설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군단 예하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포병여단장이 전체 공격을 위한 포병 노력을 협조했다. 그 결과 공격을 하기 위해 군단에 할당되었던 추가적인 중포병(150밀리 곡사포 3개 포대, 210밀리 곡사포 1개 대대, 그리고 100밀리 중평사포 2개 포대)은 포병여단에 바로 배속되었다. 포병여단장은 예하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평사포와 곡사포로 사격할 표적을 직접 볼 수 있는 관측소를 설치했다.
이 관측소와 평사포를 연결했던 전화 때문에, 독일은 참호전에서의 협조된 공격 기법에 기동전의 급속공격 방법을 실시할 수 있는 일부 융통성을 갖도록 허용받았다. 새로운 독일 방법의 중심사상(leitmotif)은 시기의 적절성(timing)이었다. 모든 화력은 적 전방참호에 사격을 동시에 해야 했다. 수 분내(적이 포격 효과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도 전에) 보병은 자신의 참호로부터 일제히 일어나서 적 참호로 돌진해야만 했다.
이 단순한 생각도 벨리에서 독일 포대의 반 이상(대포의 65%)이 평사포로 장비되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의 대포가 참호보다 높은 언덕인 독일 전선 2~3km 후방에 진지를 점령했기 때문에, 탄도의 부정확도가 문제가 되었다. 즉 심지어 사격제원이 완벽할지라도, 독일군이 프랑스군 참호에 사격한 많은 77밀리 및 100밀리 포탄이 독일군 참호 근처에 떨어졌다. 따라서 특히 참호가 프랑스군 참호에 근접한 독일 보병은 포격을 하는 동안 최전방 참호로부터 철수가 요구되었다. 물론 이로 인해 독일 포병 화력이 투발 되고 독일 보병이 무인지대의 다른 쪽에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시간 간격이 증가되었다
프랑스 보병을 포병 사격에 보다 천천히 대응하도록 ”훈련하는 “ 것이 이에 대한 해법이었다. 이것은 강렬한 포격과 정적을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첫 번째 포격 후, 프랑스 보병은 전투진지에 배치하기 위해 그들의 대피호로부터 돌진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었다. 4번의 허위경보 후, 사격 중단을 지루한 훈련정도로 간주했다.(각 포격의 재개가 사격 진지에 있는 부대의 살상자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부가적인 결과이었다.)
공격체계를 제공했던 시간계획표가 제한을 주지 않도록, 포병여단장은 국면의 요구에 따라 포대 사격을 재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는데,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 포병 책자(더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포대의 화력을 집중하는 포병여단장의 책자)에서 종종 언급된 이상적인 실현이었다. (자신의 관측소를 가진 연대장, 대대장, 그리고 포대장이 주어지면, 1914년의 독일 포병전술의 중심인 시기의 적절성을 이용하거나 재난을 방지하기 위해 화력계획을 따르지 않을 권리를 가질 수도 있었다.
고정 관측소에 추가하여, 포병은 전화기를 보급받아 최전방 보병전선에 위치한 장교 및 하사관인 전방관측자의 다른 눈 체계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전방관측자는 일부 기술적인 작업을 했다. 그들은 2~3마일 떨어진 포대장이 볼 수 없는 낙탄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술적인 작업이었다. 그들은 공격하는 보병과 협조하기 위해 최전방 보병전선에 위치했다.
독일이 벨리에서 사용한 사격형태에는 3가지 기본형태가 있었다. 화력구획(fire block)은 동맹국이 고정 탄막사격(standing barrage)이라고 명명한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참호의 방자에게 대피호 점령을 강요할 목적으로 참호의 장축을 따라 놓여지는 낙탄의 벽이다. 상자형 탄막사격(box barrage)은 증원이나 조직적인 철수를 방해하기 위해 참호후방에 놓여지는 유사한 형태이다. 집중(concentration)은 위치가 식별된 적 포대와 개활지를 이동하는 적 부대와 같은 보다 전통적인 표적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많은 포대의 화력을 분배하기 위한 계획보다는 모든 포대가 사격을 할 지점만을 지시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집중은 포병 화력을 가장 간단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며, 여단장에게 우발상황을 조치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관측소가 전장의 전체 그림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던, 또는 전방관측자와 포대를 연결하는 구식 전화기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던, 또는 단순히 기동전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 때문이든 간에, 포병여단장은 대대로부터 소수의 평사포를 공격 중인 보병에 배속시켜 보병과 함께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전쟁에 늦게 나타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포대는 보병연대에 배속되지 않았었다.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의 기동단계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동안 사선으로 전방 추진된 포대같이, 이 부대들은 펄신(Percin) 장군이 ”아래로부터의 연락“과 시각에 의한 연락”이라고 불렸던 방법으로 보병과 협조했어야 했다.
화력과 융통성이 제공됨에도 불구하고, 독일 보병의 행동 자유는 새로운 공격 방법에 의해 전례가 없이 제한을 받았다. 벨리 이전의 독일 공격은 자연의 한계까지 가도록 강요당했다. 지휘관은 순간적인 호기를 이용하고 노출된 측방으로 우회하며 인접 부대를 구조하거나, 타격을 받은 적을 추격하라는 요구보다는 특정 지형의 특징을 확보함으로써 지시를 덜 받았었다. 벨리에 대한 공격명령에서, 제3군단장은 예하부대가 이이슨 제방 너머로 투입되는 것을 금지했다. 일단 물가에 도착하면 제5, 6 보병사단의 보병은 새로운 참호체계를 구축해야 했다.
이렇게 제한한 이유는 역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이슨 남쪽 제방에 있던 독일군은 증원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격을 개시할 때보다는 훨씬 적은 포병지원하 공격을 해야 했다. 지휘 통제의 거리가 더 문제가 되었다. 일단 그들이 강 북쪽 제방에 있는 고지를 떠나게 되면, 자신들의 포병 관측소에서도 독일 보병을 관측할 수 없었다. 일단 도하를 하면 전방관측자는 아이슨 너머로부터 (전화 또는 전령으로) 전문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만일 다른 대형(동일 규모의 2제대 군단의 참가를 요구했던 최초 계획)이 가용했다면, 독일은 2차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관측소와 전방 관측체계를 가진 평사포 및 곡사포의 2선을 설치할 수 있었지만, 제3군단에는 단지 한 차례 투입할 정도의 전투력만이 있었다.
지난달 중순 마네(Marne)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독일 육군은 벨리전투에서 처음 승리를 만끽했다. 특히 독일 보병은 시작을 준수해야 했던 지역에서 승리했다. 독일 보병은 고정 탄막사격이 중단되자 곧바로 공격했던 장소에서 손실을 적게 입고서 프랑스 1 참호선을 점령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 화력의 확대가 지연되어 재치를 회복하여 무기를 작업순서대로 재장전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프랑스군으로부터 심하게 피해를 받았었다.
벨리 근처의 아이슨 북쪽 제방을 점령한 지 2 달반 뒤, 3군단 예하 제5보병사단은 소아손(Soisson) 북동쪽과 벨리로부터 수 km 서쪽에 위치한 고지대의 일부인 브레그니(Vregny) 고원에 있는 유사 진 지를 점령하여 기만을 계속했다. 이곳의 일부 지형은 독일 보병여단이 상향으로 공격하기에는 다소 험난했다. 이와 같은 문제는 보병보다는 포병의 비율을 더 높임으로써 완화되었다. 이것은 2개의 다른 보병여단이 연 이틀 동안 수행했던 정확한 공격으로 작전을 양분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1월 12일 자정에 공격했던 6개 보병대대도 사단 할당에 거의 3배가 되는 32개 포대와 함께 이 작전을 했다. 그다음 날 타 여단의 7개 대대도 비슷한 수준으로 지원을 받았다.
독일 포병은 벨리에서 처럼 브레그니에서도 작전에 맞게 편성되었다. 추가된 타 사단의 포대와 마찬가지로 중포병 포대를 임시 전술부대로 구성하기 위해 제5보병사단 예하 2개 포병연대에 배속했다. 이 포대조(team of battery)는 위치와 보유하고 있는 무기 능력에 따라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5보병사단에 가용한 포병의 절반을 통제하던 제18포병연대는 곡사포(150밀리) 4개 포대, 경곡사포(105밀리) 4개 포대, “100밀리 장거리 평사포” 1개 포대, 그리고 경평사포(77밀리) 6개 포대를 지휘했다. 각 포대는 자신에게 승인된 모든 대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곡사포 40문과 평사포 40문(평탄도 1문당 1문의 고각사격 무기)이 있었다.
제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하던 증원대대도 인접한 제7예비사단 포병에 의해서 비슷하게 정렬했다. 쓸모가 없는 105밀리 “반지 대포(ring cannon)"와 현대식 대포의 혼성으로 무장된 포병대대(제7예비사단의 포병연대 예하 제1대대)의 포대는 ”100밀리 장거리 대포“와 150밀리 중곡사포로 보강되었다. 독일이 확보한 소이손 북서 고지에 위치한 포대조의 임무는 소이손의 남쪽과 남서쪽에 있는 프랑스 포대의 화력을 제압하고, 프랑스 전-후방 간의 통신을 두절시키며, 그리고 프랑스 예비대가 전방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었다.
1월 12일, 독일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침에 실시된 가치 있는 기록사격과 고정시설에 대한 공격(여명부터 오전 10시까지), 프랑스 참호에 대한 1시간 동안의 집중사격(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그리고 보병 4개 대대의 20분 동안의 백병전으로 독일은 제1참호를 자신들의 수중에 여유 있게 확보했다. 같은 방법으로 프랑스 후방 진 지를 처리했다. 포병 화력을 참호에 먼저 집중하였고, 이 사격의 엄호하에 보병은 위로 이동하여 착검을 한 후 사격이 중지되는 동안 참호로 돌진했다.
이러한 처리는 프랑스를 항복으로 유도하기에 대부분 충분했지만, 그러나 일부 참호체계는 추가적으로 집중된 포병 화력의 처리(미계획된)에 좌우되었다. 보병과 함께 이동하는 전방관측자는 이 특별한 집중을 처리하기 위해 전화기를 유용하게 사용했다. 독일은 1시간도 안되어 프랑스군 진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또한 2,000명의 프랑스군을 항복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 대한 진정한 공은 프랑스 포병 관측소에 주어져야 했다. 관측소의 보고가 없었다면, 프랑스 포병은 효율이 매우 떨어졌을 것이다. 이 프랑스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2단계 독일 공격은 더 쉬워졌다. 프랑스 포병 화력을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이 충분히 치열해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이점이 필요했다. 독일은 프랑스 제1참호선을 비교적 손쉽게 점령했다. 일단 독일군은 수풀에 들어가기만 하면, 오후 내내 계속된 소부대와 교전에 의해 고착되어 어두워질 때까지 용맹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최근의 야전축성 지침을 준수하면서 프랑스는 브레그니 고원에 연속적인 3개의 저항선을 가진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진지의 참호는 깊지 않아서 각종 포탄으로부터 안전한 대피소가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독일 화력은 3개 진지로 분산된 반면, 고원을 방어 중인 프랑스 병사들은 쏟아지는 곡사포 포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단지 청색 전투모만을 쓰고서 5시간 이상을 포복해야 했다.
이와 같은 3개의 프랑스 저항선이 쉽게 무너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은 포병화력으로 방어 중인 프랑스군을 동요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은 소총을 던져 버리고서 독일 소총수의 전진 행렬의 시야로부터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중우와 혼합된 먼지는 프랑스군보다도 일부 독일부대의 전진에 더 많은 장애가 되었다. 오후 4시 30분경 일부 독일부대는 브레그니 고원의 남쪽 외곽으로 이동했다. 프랑스 3번째 후방 진지에는 보병 전방진지보다도 돌파하기가 더 어렵다고 확인된 미로와 같은 교통호가 있었다. 독일군은 숲 속에 있던 75밀리 평사포 포대와 알파인(Alpine) 경보병 2개 대대의 저격수를 발견했다. 오후에 내린 비 때문에 방해를 받았던 독일 보병은 관측자가 있는 포병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지 않고서 많은 손실만을 입고서 진지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제52보병연대예하 1개 중대는 장교들을 모두 잃었고, 제8근위연대예하 1대대는 중대장의 절반을 잃었으며, 또한 프랑스 포병 2개 포대를 포획했던 임시부대인 슐쯔(Schultz) 대대는 장교 5명 및 사병 25명이 사망하고 10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독일 강습보병은 야간낙하로 전체 목표를 일소했다. 심지어 1개 파견대를 소이손 북쪽으로 침투시키기 위해 고원너머로 투입했다. 노획물은 광범위했다. 브레그니 고원에서 프랑스군 5,650명이 그들 뒤에서 대포 3문과 기관총 6정을 끄는 노예로 행군을 했다.
벨리 근처의 고지대 점령은 독일에게 진지전 단계로 발전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브레그니 고원의 손실로 프랑스 지휘부는 매우 심각하게 되었다. 개전부터 죠프리 장군은 집단을 전멸시킬 수 있는 독일의 능력을 처리하지 않고 보병 집단을 공격으로 내보내려는 군의 자살적인 습관을 버리도록 계속 시도했다. 계속된 각서마다 데 세부적인 관심, 더 많은 보병과 포병의 협조, 그리고 보병에 의한 포병 화력 효과의 신속한 확대를 요구했다. 1월 2일 죠프리 장군은 벨리에서 독일이 사용했고, 브레거니에서도 사용한 방법과 매우 유사한 공격방법을 채택하라는 명령을 각서로 발표했다. 1월 15일 브레거니에서 전투참고를 명백하게 만들라는 각서를 보완하여 발표했으며, 그 내용의 핵심은 “여러분은 지금 나를 믿어라”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많은 영감을 제공했던 독일 공격기법과는 매우 다른 프랑스 기법은 죠프리 장군의 독려에 의해 발전되었다. 프랑스 중포병은 독일보다 수적인 면에서 너무나 열세했고, 여전히 더 방쥬 체계의 저속 사격무기로 통상 구성되었던 프랑스는 격렬한 독일 포탄에 대응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요소가 동일하다면, 프랑스도 독일과 같은 포탄량을 투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포탄은 구형 포신의 빡빡한 병목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포탄을 투발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와 같이 제압(suppress), 충격(shock), 그리고 사기를 떨어뜨리는(demoralize) 능력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독일 진지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시도 외 다른 어떠한 대안도 없었다. 독일이 포격을 12시간 이상 지속하지 못할 때에도, 프랑스는 통상 수일 동안 포격을 계속했다.
이 장시간 포격 때문에 발생된 가장 불리한 점은 분명히 기습의 상실에 있었다. 일단 프랑스가 사격을 개시하면, 독일은 대응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전술적 제대에서는 대부분의 보병을 최전방 참호에 집중하는 독일 정책과 작전적 제대에서는 예비대 부족 때문에, 독일은 효과적으로 작전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독일 방어체계로부터 대포를 분리시키려는 제한된 목표에 대한 공격을 자주 성공했다.
그러나 일단 제한된 목표에 대한 공격이 성공되면, 현대식 중포병에서의 프랑스 약점이 새로운 문제로 자명해졌다. 프랑스가 최근에 점령한 영토는 종종 돌출부(나침반의 4 극점 중 3개로부터 포병 화력에 지배되는 독일 전선의 만입)를 형성했다. 돌출부를 (지역 내에 있는 독일포병 대포의 최대 효과거리까지 넓게) 확장하지 않으면, 프랑스가 점령한 모든 영토는 3면에서 타격하는 독일 포병화력에 취약하게 될 것이다. 물론 프랑스도 자신의 화력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더 현대적인 화력과 수적인 열세, 그리고 돌출부로 인해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령할 수 있었던 독일 중화포와 경쟁하기를 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공격은 넓은 전선에서 수행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1915년 프랑스는 주요 공세행동(5월의 아투와스 공격과 아투와스 재공격, 9월의 캄파네 공격)을 이 결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수행했다. 1차 아투와스(Attois) 공격에 앞서 340문의 중대포는 6일 동안 18km 전선에 공격준비사격을 했다. 동일 지역에 대한 9월 공격은 유명한 비미(Vimy) 능선에 중점을 두고 400문의 중대포가 152km 전선에 5일 동안 사격했다. 캄파네(Compagne) 공격에서는 872문의 중대포(75밀리 평사포 1,500문과 참호박격포 다수 참가)가 3일 동안 35km 전선의 전투에 참가했다.
3개의 공격 중 9월 아투와스 공격은 비참하게 참패했다. 대부분의 경우 프랑스는 독일 진지 전방에 있는 철조망도 넘지 못했다. 2개의 다른 공격은 일부 전진은 했지만, 독일 3개 진지를 돌파하라는 명시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후자의 경우 프랑스는 무인지역을 통과하여 독일의 제1 진지를 점령하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독일은 더 보병을 더 많이 진지에 조기 투입 투입하는 정책을 견지했기 때문에, 독일 제1 진지를 점령하여 프랑스 포격에 영향을 받아서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는 상당한 수의 독일군 포로를 포획했다. 전방진지 2,00m 또는 3,000m 내에 많은 독일 포병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이 방법으로 많은 독일군 평사포를 노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독일 진지를 통과하게 되면, 프랑스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투와스 1차 공격에서 모든 부대가 같은 속도로 전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격 1시간 뒤에, 프랑스군의 주공을 형성했던 2개 군단은 비미 능선의 1차 목표와 독일 제1 진지를 분리하는 4km 지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남쪽에 위치한 다른 2개 군단은 독일 제1진지를 돌파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예비인 보병 및 포병부대의 노력을 더 성공한 프랑스 주공 군단에 집중하여 프랑스 공격을 돈좌시켰다.
독일은 캄파네 전투로부터 프랑스 공격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제1진지 전방에 있는 진지로부터 약 3,000미터 후방에 일련의 보조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보조진지의 대부분이 캄파네의 백회질 언덕 후사면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포병의 위치를 식별하여 포격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포병은 독일 포대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은 반면, 독일 포대는 프랑스 포병에게 사격을 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항공기의 도움을 받아 독일 포대의 위치를 식별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사격한 표적을 관측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포병의 일부 화력이 독일 포대에 낙탄 되는 것을 보장했지만, 프랑스는 체계적이고 수적으로 월등한 포병 우세를 위치가 식별된 독일 포병에게 집중하여 파괴하는 데는 통상 이용할 수 없었다.
만일 독일에게 모든 서부전선의 부대를 집결하여 위협을 받고 있는 지역으로 보낼 수 있는 2~3일의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면, 일제히 행동하는 전진의 실패와 후사면에 위치한 독일 포대를 효과적으로 격멸시키지 못한 프랑스 포병의 무능력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포격이 3~6일간 계속되었을 때는 전략적인 기습이 불가능했다. 독일은 공격개시 시간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그러나 전투에 가장 근접해 있는 철도역과 역습부대를 만들기 위한 예비대를 습격해야 하는 지역을 알고 있었다. 동부 전선의 넓은 공간과 러시아 철도망의 제한은 위협을 받고 있는 지역으로 증원하는 문제는 하루로는 해결할 수 없는 1주일이 걸리는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라면 실패했을 곳에서도 독일은 성공할 수 있었다. 얄궂게도 이와 같은 첫 번째 전투는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었던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구할 목표로 시작되었다.
이 전투를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반참모가 선정한 장소는 골리스(Gorlice)의 폴리스(Polish)와 탈노우(Tarnow)의 카페시안(Carpathian) 산맥에 있는 폭이 50km가 되는 구릉지대이었다.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접합점에 위치한 카페시안에는 오스트로-헝가리와 러시아 제국사이에 장벽이 형성되어 있다. 산맥(특히 폴리스 평원을 헝가리 고원과 연결하는 4개 통로)을 통제하는 자가 적의 심장부를 지배할 수 있는 뛰어난 장소이었다. 러시아가 전투에서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면서 성공하는 동안, 오스트리아-독일은 통과를 위한 간접 접근로를 선택하기로 계획했다. 골리스와 탈노우를 돌파한 후, 연합부대는 통로 후방을 촌단 하여 러시아를 절단했다.
이 전략적인 절단을 수행할 임무가 최근에 독일군과 오스트로-헝가리 군으로 구성된 제11군에게 부여되었다. 다국적 어를 사용하는 이 대형의 참모장은 서부전선에서 3군단 참모장으로 벨리와 브레그니 공격계획을 수립했던 젝트(Hans  Von Seeckt) 대령이었다. (골리스-탈노우에서 실시하기 위해 젝트가 계획한 공격과 최근 서부전선에서 젝트가 운용했던 부대와 포병 대포의 10배 규모가 참가한 공격은 단지 적 진지를 점령하고 러시아 전선을 파열하는 데 목표를 두었지만, 그러나 전술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제11군 예하의 4개 군단 중 2개 군단포병에 대한 지휘는 포병여단장의 책임하에 있었다. 포병여단장은 자신의 포대에 추가하여 사단에 할당된 중포대를 지휘했다. 각 군단의 포병여단장 2명 중 1명에게 보병이 돌격할 때까지 군단 내에서 포병운용을 협조할 책임이 주어졌다. 즉, 공격준비 포격(preparatory bombardment) 편성은 군단장에게 책임이 주어졌지만, 그러나 일단 준비가 되면, 사단은 자신의 포병과 배속된 중포대를 재차 완전 통제했다.
공격 첫날의 임무를 주로 험난한 언덕을 확보하는 것으로 부여받은 크노블(KneuBl) 연합군단의 대형은 대부분의 포병을 집권화 통제했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크노블 장군은 자신의 잔여 보병이 노출된 측면을 엄호하는 동안, 언덕을 확보하는 1개 특수임무부대(산악전을 위해 특수훈련을 받은 바바리아 사단의 보병 4개 대대로 구성된) 요청을 계획했다. 이 견부를 확보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크노블은 자신에게 배속된 중포대 및 포병부대를 공성포병 병과 대령의 단일 지휘하에 두었다. 이 장교는 공격 전반에 걸쳐 군단 주공인 부대와 협조를 보장하기 위해 군단포병을 통제했다. 조공 임무를 부여받은 보병은 16문의 평사포와 산악 평사포의 지원을 받아 처리했다.
제41예비군단은 포병 화력 통제 책임을 군단장과 사단장에게 분담했다. 또한 타 군단처럼 공격준비사격에 대한 책임을 1개 사단포병 여단장과 군단포병 여단장에게 주었다.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중포병을 집단(groupment)으로 구성하여 군단포병 지휘관의 직접통제(direct control)하에 둔 반면, 포병 통제는 사단에서 했다. 이렇게 정렬한 근본적인 이유는 병력 절약에 있었다. 군단포병은 사단포병 여단이 전투요구에 자유롭게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확실한 표적을 포격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주요 공격에서 제11군의 포병 지휘관으로 처음 임명받은 장교가 있을지라도, 제11군 본부에서는 포병에 대한 지침을 최소로 하달했다. 서식 공격명령으로 제공된 주관점은 (정찰대가 피해를 확인하고 개척 공병에게 철조망 및 기타 장애물 개척을 허용하기 위한) 공격준비사격에 대한 강제적인 중단과 대포병전 노력에 대한 각 군단의 책임이었다. 제11군 포병 지휘관은 보다 세부적인 포병 지침을 분리형 명령으로 작성하여 하달했다.
군단 및 사단급에서 보병과 포병은 같은 장소에 있는 보병사단 및 포병여단 지휘소에서 협조를 했다. 독일군에게 러시아 제1선과 그 후방에 위치한 포대진지에 대한 거의 완벽한 모습을 제공하기 위해 전사면 거점과 참호선을 구축하는 러시아의 경험은 쾌청한 기상 및 독일 쌍안경과 결합되었다. 공격 2~3일 차에 전진 중인 오스트리아-독일이 러시아의 제2, 3선으로 돌진할 때, 그들은 똑같은 이점이 혜택을 받았다. 이처럼 지휘소에 위치한 포병지휘관도 현장에 위치한 보병 지휘관처럼 진행 중인 일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공격이 언덕에서 먼 측방으로 이동되면, 주요 보병과 포병의 협동 형태는 보병과 함께 전방으로 이동하는 포대형태이었다. 대부분이 평사포 포대인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보병연대에 배속되었지만, 대다수는 포병 대대장, 연대장, 그리고 여단장의 지휘하에 계속 있었다. 후방에 대기 중인 중포대가 (숲 또는 방해하는 지형 때문에)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우군 보병에게 오인사격하지 않도록 독일군 보병대대는 섬광 신호수단을 제공받았었다.
공격 중인 보병과 이를 지원하는 포병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전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거의 볼 수 없었다. 1914~1915년의 겨울을 전선 후방에서 보낸 후, 공격에 투입된 많은 사단은 진지전을 수행한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실시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비교적 장거리 (러시아 진지가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최전방 참호를 분리하는 1.5km 정도의 무인지대에 있었던) 작전에서는 전화기 사용이 매우 곤란했다. 공격 중인 보병과 포병 본대 간 신속한 통신의 부족은 전투 결과에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전투 첫날 통신의 중요성을 스스로 실감했다.
5월 1일 일몰 직후인 오후 9시에 포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평사포, 곡사포, 그리고 참호 박격포는 지속 발사속도(sustained rate)로 사격을 했다. 즉 포탄을 포병 대포가 과열되거나 승무원이 지치지 않도록 동일 보조로 포미마개(breechblock)에 밀어 넣고 방아끈(lanyard)을 당겼다. 독일 포병은 야간(5월 1일 저녁 10시부터 11시까지와 5월 2일 새벽 1시부터 3시까지)에 사격을 2회 중단했다. 사격이 중단되는 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병 병사에게 휴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러시아가 기관총 사수에게 사격하도록 유도하여 이로써 생소하고 위협을 주는 러시아 무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식별하였다.
5월 2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군단마다 정확한 시간은 상이함) 독일 포병은 그들의 관심을 러시아 최전선에 집중하면서 사격속도를 증가했다. 오전 9시부터 9시 30분까지 평사포와 포수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속도로 포격속도(tempo of bombardment)를 증가했다. 1시간 뒤 (정확한 시간은 군단장이 결정하는) 사격이 최전방 참호 후방의 표적에 전환되자, 독일 보병은 종심이 깊은 전초선으로 돌진했다.
대부분 장소에서 러시아군은 접근을 하는 총검의 벽(wall of bayonet)을 도주로 대응했다. 순수한 포격의 비중(중대포 200발, 경곡사포 300발 사격)은 많은 러시아군에게 저항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병사들과 포격의 매서움을 공유하길 싫어하는 많은 러시아군 장교는 일부 지역에서 러시아의 저항을 급속도로 몰락시키는 역할을 했다.) 근위군단예하 오거스트 여왕 근위연대는 전형적인 경험을 했다. 3개 제대로 형성했기 때문에, 2~3명의 사상자만을 내고서 무인지대를 통과했다. 공격개시선을 통과한 후, 4분 30초 만에 이 부대들은 러시아 제1참호와 무기를 버린 수백 명의 러시아 병사들을 포획했다.
그러나 인접한 2개 연대는 심하게 고생했다. 불행하게도 시베리아 소총수가 방어하고 있는 지역을 공격해야 하는 알렉산더 황제 근위연대 행렬의 선두에 있던 3,000명 중 장교 12명과 사병 290명이 사망했고, 같은 수만큼 중상을 입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 근위연대도 비슷하게 피해를 입었다. 포격에서 살아남아 러시아 기관총으로 돌격한 후 몇 분이 안 되어 죽었고, 37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투가 끝난 뒤, 연대 외과 군의관은 사망자 대부분이 적어도 2발 이상의 총상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다행히 오스트리아-독일 공격에서 러시아가 집단으로 포위했던 지역은 공격이 지연되거나 격멸된 곳을 크게 초과했다. 결과적으로 5월 2일 러시아군 제1 진지를 돌파한 후 5월 3, 4일에 걸쳐 러시아 제2, 3 진지를 파괴했다. (이 돌파는 대체로 5월 2일 소규모 공격의 반복이었다.) 5월 5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개활지에 도달했으며, 전술적인 승리는 작전적 돌파로 전환되었다. 행군이 종료되었을 때, 14만 명의 러시아 죄수들이 중앙제국(central power :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수중에 있었으며, 폴란드에서는 거의 모든 러시아 군대가 철 수 했으며, 헝가리에 대한 러시아 침공의 위협도 완전히 제거되었다.
골리스-탈노우는 말할 나위도 없이 독일에게는 대단한 승리이었다. 그러나 이 승리에서 도출된 많은 교훈을 독일과 기타 국가에서는 잘못 이해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동전으로 복귀를 선도하는 돌파구가 그들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독일 선임군인인 팔겐하인(Falkenhayn)은 결론을 달리 내렸다. 작전적인 이유 때문에 서부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통상 불가능하다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우세한 포병으로 프랑스를 전쟁에서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15년 12월 중순, 팔겐하인은 군 지휘관 및 참모장 회의에서 전쟁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서부 프랑스군에 대한 강타는 프랑스 민족의 “내부적인 약점”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프랑스 국민에게는 전쟁 지속에 대한 무용론을 확신시켜야 한다고 재차 주장했다. 따라서 팔겐하인은 각 군사령관에게 자신의 책임지역 내에서 공격에 적합한 지역을 발전시키도록 요구했다.
1915년 12월 마지막 2주와 1916년 1월 첫째 주의 후속회의에서 팔겐하인은 일부 특정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독일의 장차작전에 대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신념을 재차 발표했다. 이것은 제한된 목표를 가진 또 다른 공격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구나 돌파를 해서는 안되었다. 팔겐하인이 제안한 공격 목적은 프랑스군의 “피를 흘리게” 하는 직접적인 소모전이었다.
1월 둘째 주, 독일 제5군 참모장인 크노벨도르프(Schmidt Von Knobelsdorf) 장군으로부터 많은 자문을 받은 팔겐하인은 베르던의 복합요새를 목표로 선정했다. 보게스(Vosges) 산맥의 구릉지대로 불려졌던 뮤제(Meuse) 강의 날카로운 굴곡에 위치한 베르던은 팔겐하인의 목적을 의심할 것도 없이 지원할 것처럼 보였다. 요새화된 지대 주변은 독일 전선에 약간의 만곡(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병사들이 “돌출부”라고 불렸던)을 형성했다. 만일 프랑스군이 베르던 북부 또는 남부에 있는 독일군 진지를 포위하려고 시도했다면, 프랑스군에게 유리한 이점을 약간이라도 줄 수 있는 지역에서 전투하기 위한 핑계를 원했던 장군에게 돌출부의 확보는 “군사적인 필요성”에 대한 논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팔겐하인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베르던의 상징적인 가치에 있었다.
뮤제 계곡을 장악하는 것이 지역을 요새화하는 근본적인 정당성의 이유가 되었던 베르던의 중평사포는 최후거점에서 철수되었다. 그리고 외부에 있던 요새도 참호, 벙커 그리고 훨씬 현대적인 야전축성으로 축성된 요새를 제공하기 위해 거의 철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던은 여전히 요새이었다. 약 100야드 정도의 손실 또는 이익이 전단 표제의 이유가 되었던 전쟁 3년 차에, 독일의 손실은 빈틈이 없는 대다수 관측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심각한 패배로 간주되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처럼, 이러한 지각은 프랑스 대중에게 베르던과 관련된 역사, 특히 라인(Rhine)을 향한 프랑스의 확장에서 “전선 지휘소(frontier post)"로서의 역할을 상기시켰다.
순수하게 군사-기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독일은 베르던을 3면으로 포위했던 요새란 사실 때문에 팔겐하인의 전략 개념을 쉽게 실시했다. 팔겐하인은 프랑스 민족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실제적인 임무를 대포 1,612문을 보유한 제5군의 포병에게 부여했다. 이들 대포의 1/3 정도는 보병사단 고유의 경평사포(77밀리)와 경곡사포(105밀리)이었고, 나머지는 상당히 무거운 “도보 포병(foot artillery)”무기로서 구경 230밀리 장거리포와 구경 420밀리 고사계(high-angle of fire) 무기이었다. 프랑스 진지의 반도적인 성격 때문에, 거대한 포병 군수품 저장소는 개별 포대로 적절히 소산하여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팔겐하인은 독일 중포병를 확실히 신뢰하였다. 더 크고 높은 고각으로 사격되는 독일 포탄의 종말탄도효과는 대부분의 프랑스 포탄을 능가하였다. 전투개시 10년 전에 설정된 대부분의 독일 대포의 발사속도는 구식 프랑스 대포보다 대체로 빨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통상 독일 포병이 지역 내에 있는 프랑스 포병보다 수적인 면에서 우세하였다. 이 괄목할 만한 포병의 우세는 팔겐하인에게 프랑스 역습을 물리치고, 프랑스 보병진지를 재차 포격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한 화력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제5군이 프랑스 포병보다 불변의 화력 우세를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팔겐하인의 개념에 의하면, 독일은 보병을 포병의 보조 역할로 보았다. 그의 개념에 의하면 보병은 포병에 적합한 표적이 집결되도록 강요하기 위해 프랑스와 접촉을 유지해야 했다. 이를 위해 포병 관측자는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베르던이 최후 거점을 점령하여 위협함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프랑스군이 육절기 속으로 들어가도록 유린했다. 그러나 팔겐하인이 많은 사례를 들어 강조하기를, 독일 보병에게는 이것이 거점 탈취의 성공 여부와는 관계가 없으며, 단지 프랑스군의 전투력 소모보다는 부차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이 팔겐하인에게 가장 중요한 예하 지휘관인 베르던에 위치한 독일 제5군 사령관과는 공유되지 않았다.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왕권을 동시에 승계한 황제 빌헬럼Ⅱ세의 장자인 빌헬럼 황태자는 개인적으로나 전문적으로도 팔겐하인의 개념에 의거 작전을 수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에 있는 표현에 의하면, 빌헬럼은 요새를 점령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팔겐하인이 추구했던 소모전투를 회피하려고 했다.
베르던의 복합요새를 점령하려는 제5군의 능력에 대한 빌헬럼의 믿음은 최근 경험의 직접적인 결과에 있었다. 1915년 빌헬럼은 참호전의 많은 전술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있는 2개 실험부대의 옹호자 및 주요 후원자로 활동했다. 첫 번째, 돌풍부대인 "로어(Rohr)" 돌격대대는 최초로 수류탄을 무장한 10~12명의 돌격부대가 종심 돌파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하여 사용했던 중화기(기관총, 참호 박격포, 총류탄 발사대, 포병)의 전술 형태를 발전시켰다. 민간 소방수로 구성된 근위 공병예비(Guard Reserve Pioneer) 대대는 많은 원시적인 화염투척기(primitive flame thrower)를 시험했다.
이 2개 부대와 이들 부대의 성과에 대한 지식에 직접적으로 근접되게 연결되어 있던 황태자는 참호전에 관해 팔겐하인과는 상당히 다르게 전망했다. 팔겐하인은 참호전을 보병이 진지전으로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으로 쉽게 생각한 반면, 황태자는 “로어” 돌격대대와 근위공병 예비대대가 발전시킨 기법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1915년 늦은 여름과 가을, 보게스 산맥의 많은 작전에서 이 실험부대의 파견대로부터 훈련과 지휘를 받았던 독일 보병은 계속해서 최상의 프랑스 알파인의 저격수로부터 참호체계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빌헬럼은 벼르던 에서의 공격 방법을 자신의 보병 지휘관과 공유하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915년 대부분의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전투에 참가가 예상되었던 사단은 처음으로 제한된 목표를 가진 공격작전에 접근했다. 참호에서 나와 몇 일간의 휴식을 한 후 근접전투기술에 중점을 둔 훈련을 받았다. 1915년의 최신 기술을 가진 대부분의 보병부대처럼 훈련은 종종 중대, 대대, 연대 그리고 드물게 전투가 예정된 실지형 크기로 묘사된 총연습으로 최고조에 도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땅을 점령하는 임무가 포병에게도 여전히 있다고 자연스럽게 가정했다. 골리스-탈노우의 예에서 용기를 얻은 것처럼 그들은 자주 화력만으로도 프랑스 저항을 몰락시킬 수 있다고 자랑했다. 그들이 자주 인용했듯이 보병은 베르던 거점을 씩씩한 보조로 행군할 수 있었다.
2월 21일 아침 일찍, 베르던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오전 8시 12분 빌헬럼 황태자는 포병 사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정찰대가 피해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관습적인 중단을 제외하고는 포격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정찰대는 통상 굴토된 참호, 파괴된 철조망 장애물, 그리고 후방으로 도주하는 프랑스 병사에 대해 보고했다. 근탄에 의해 발생된 파편(splinter)에 맞은 포병 연락장교가 이 날의 유일한 독인군 사상자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정찰대가 포로를 붙잡기도 했다. 정찰기 조종사는 넓게 퍼진 파괴에 대한 보고를 확인했으며, 독일 중포병의 포탄에 의해 파괴된 철도를 설명했고, 그리고 화력에 의해 베르던이 초토화되었다고 보고했다.
둘째 날, 포병의 임무는 파괴(destruction)에서 제압(suppression)으로 변경되었다.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 제5군 예하 9개 보병사단은 각 사단의 책임지역 전방에 있는 프랑스군 최전방 진지를 점령하기 위한 제한된 목표를 향해 공격을 계속했다. 독일 병기창(arsenal)에 있는 고사계 무기의 높은 비율 때문에, 후방에서 철저하게 예행연습을 했던 제1 제파의 강습부대는 사격효과(effect of fire)를 충분히 확대하기 위해 우발적인 사상자 발생을 감수하면서 초기 전투에서는 불가능했을 정도까지 장벽을 구부릴 수 있었다. 이 연습으로 향상된 돌풍부대는 사격이 수 초간 중지된 탄막 내에 있는 참호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 독일 포병대포로부터 시간당 30~50발의 사격을 받고서도 여전히 그들의 재치를 수습하려고 시도하는 프랑스군은 자주 그들의 개인호 속에 갇혀서 협조된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프랑스 전선의 최전방 참호를 대적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전술은 통상 효과가 있었다. 전투 2일 차, 모든 독일군 사단은 그들의 목표에 도달했고, 예상치 못한 약점을 이용했던 장교가 지휘했던 일부부대는 제5군 참모장인 크노벨도르프 장군에게 승인을 요청하기 위해 몇 분간 정치한 후 그들에게 부여된 목표보다도 수백 미터 이상 돌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병이 베르던의 최후거점으로 씩씩하게 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 독일군 포병장교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4시간 계속되었던 포격은 독일 전선의 전방 지면을 완전히 뒤집었고, 전례가 없었던 파괴를 야기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격은 근접전투로만 극복할 수 있는 광신적인 저항정신을 생존자에게 불러일으키는데도 기여했다.
전투 3일 차, 독일 공격에서 팔겐하인의 의도와 예하부대의 행동을 완전하게 연결했던 특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전략과 전술의 구분에 대한 가장 명백한 기록의 증거는 2월 23일 제6 보병사단장이 하달한 단편명령에 의해 제공되었다. 헤르베호이즈(Herbehois)로 알려져 있는 숲에 위치한 프랑스 진지를 점령하라고 3개 보병연대에게 명령할 때, 그는 “사상자는 고려하지 말고 공격을 계속하라”라고 독려했다.
벨리 전투의 많은 예비역으로 연대 행렬이 채워졌던 브라던(Braden) 시민들은 숲 속으로 돌진할수록, 더욱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프랑스 증원군은 전날 저녁에 도착하여 포탄 구멍(shell hole)과 잡석더미에 있는 진지를 점령했다. 상대방 부대와의 확실한 경계를 제공했던 참호는 없었으며, 그리고 포병 연락장교의 관측을 방해했던 나무의 잔해가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더욱더 자신의 자원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독일 보병은 스스로 알게 되었다.
헤드베호이즈에서 제6보병사단의 장병들이 경험한 전투수행 형태가 베르던에서 수행할 전투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땅을 점령하는 과업은 더욱 힘들어졌다. 공격 초기 일부 독일부대가 만든 종심돌파는 프랑스가 각 포탄 구멍에는 기관총을, 그리고 각 나무 그루터기 뒤에는 소총수를 위치시키며 따라 곧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2월 21일부터 27일까지 1주 동안, 독일군은 일사천리로 전진을 했다. 2주의 최고점은 제6보병사단 예하 3개 중대가 2월 21일에 통과했던 공격개시선으로부터 10km 너머에 있는 거의 방어준비가 되지 않은 도우아우마운트(Douaumount) 요새를 탈취했던 2월 25일이었다. 그러나 2월 27일 이후, 독일의 전진 속도는 현저하게 둔화되었다. 전술적인 주요 사태가 여전히 제한된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규모는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1주간의 전투에서 독일은 전선을 1km 이상 전방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3월, 4월 그리고 5월의 하루 전진 거리는 수천 미터가 아닌 10미터 단위로 측정되기 시작했다.
7월 11일 빌헬럼 황태자는 자신의 사단에게 모든 공격 행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는 솜머를 공격 중에 있어서 모든 가용 자산은 그곳에서의 방어전투를 하기 위해 필요했다. 팔겐하인은 소모전으로 프랑스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긴급 전략목표를 달성하여 전투초에 복무하였던 프랑스군 40만 명이 사상되거나, 더 이상 군복무를 하지 못하게 부상을 입히거나, 또는 전쟁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독일군 포병 단독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독일군 보병이 일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이득을 얻기 위해서 평사포를 곡사포로 보강을 막 시작했던 프랑스 포병 화력에 스스로 노출시켜야만 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병사 3명이 전투를 할 수 없는 반면, 독일군은 병사 2명이 손실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던 독일 전술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모 전략을 실시했던 팔겐하인의 무능력 때문이었다. 빌헬럼 황태자 및 그의 참모장과 함께 전투를 했던 제5군 사령관은 팔겐하인의 전투 개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크노벨도르프가 수정하여 빌헬럼 황태자가 승인한 작전명령의 궁극적인 목적이 프랑스군의 돌출부를 제거하는 제한된 목표를 가진 연속 공격작전으로 변경되었다. 제5군 지휘관들이 포병은 임무를 최상으로 달성해야 하고, 보병은 절약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는 동안, 프랑스 보병이 독일 포병 화력에게 스스로 노출되도록 강요하는 지역손실의 위험을 이용하는 목표추구는 실패했다. 이와 같이 전투 2일 차 크노벨도르픈는 전진이 비록 팔겐하인 전략을 한층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지 못했을지라도, 일부부대가 첫날 목표를 초과하는 것을 승인했다.
팔겐하인이 빌헬럼 황태자 및 크노벨도르프와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무능력했을지라도, 팔겐하인 최고사령부 예하 4개 지휘제대와 빌헬럼의 제5군 예하 3개 지휘제대, 그리고 제6 보병사단장이 1915년의 지형지배 전투수행으로 복귀하여 “피해를 얼마나 받든지” 당일 목표를 반드시 확보하라고 명령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연대장과 대대장도 똑같이 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군장급이상 장군들은 땅을 점령하는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1년을 투자했다. 비록 그들이 점령은 잘했다 하더라도, 전기가 전략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소부대 전술 면에서는 매우 발전을 했을지라도, 대체로 독일군은 베르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팔겐하인의 색다른 소모전략은 완전히 신뢰를 잃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와 같은 전략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타군 지휘자에게는 교훈이상은 아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한된 목표를 격하기 위해 전선의 특정지역을 확보하는데 필요로 한 병력을 경제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지원할 때만 의미가 있었다. 관찰된 내용을 보면, 2년 이상 그렇게 해왔던 조직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전투에서 대단히 많은 영감을 이끌어 내었다. 프랑스 육군이 수적인 면에서 앞서는 데 실패하였고, 독일이 프랑스의 공격을 격파하는 핵심 요소가 솜머에 대한 프랑스-영국의 공격이었을지라도, 많은 프랑스군은 소모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다른 적진돌파 시도의 실패로 인해 독일 육군이 몰락의 시점으로 갔던 그 10월이 지나자, 프랑스는 자산들의 소모 전략을 채택했다. 하극상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시간에 쪼들리는 동맹국에 대한 모든 압박을 필사적으로 다른 데로 돌리려는 최고사령부의 이러한 접근은 적진돌파의 새로운 시도를 위해서 요구되는 미국 사단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이 전략을 보강하기 위해 선택된 방법은 전체 목적이 1915년의 독일 소규모 작전과 유사한 제한된 목표에 대한 공격이었다. 독일은 그 당시 부차적인 지역을 확보하는데 필요했던 병력절약을 허용했던 지형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팔겐하인의 개념으로부터 1장을 취했던 프랑스는 독일에게 중요한 땅을 잃느냐와 대체할 수 없는 자산을 고갈시키느냐 둘 중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국지적인 공격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이 1914년 10월 벨리에 대한 독일 공격에서 시작되었던 현대전투에 대한 접근은 빙 돌아서 제자리로 왔다. 다른 곳에서 승리를 찾고 있던 군을 병력절약의 수단으로 시작하는 것은 전망이 좋은 결정이었다. 이 결정이 도달할 수 없다고 판명되었을 때, 다른 시간에서 승리를 찾으려고 계획된 군으로 병역절약 수단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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