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역사

제9장 전 후 발 전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7. 10. 05:40

9. 전 후 발 전
(POSTWAR DEVELOPMENTS)

태평양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2발의 원자탄이 전술적으로 혁명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줄잡아 이야기한 면이 없지 않다. 직업적으로 양성된 야전군이 요새를 유럽국가의 주 방벽으로 바꾸어 놓은 18세기 이후, 군의 (군을 평가하는) 기본적인 척도가 처음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군사 계산법으로 2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소총, 기병도(刀), 그리고 평사포를 셈하는 것을 더 이상 포함하지 않았다. 대신, 권력의회 내에서 한 국가의 영향력은 메가톤만큼 무거웠다.
그러나 야전군이 실시한 요새 교체가 요새를 완전히 쓸모없게 바꾸지 않았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만큼 핵무기의 우세가 재래식 군대를 역사의 뒤편으로 넘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핵무기는 이러한 군대가 사용하던 방법을 바꾸었다. 말하자면, 포병을 설계, 조직, 운용하는 방법에 결과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핵무기라는 제단에 놓여진 전쟁의 첫 번째 제물은 핵 강대국 간의 재래전이었다. 재래식 군이 핵무기에 적합한 표적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장 잔인한 지도자(스탈린, 모택동)들도 핵전쟁으로 확전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재래식 전쟁을 마지못해했다. 이것이 세계 지도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2가지의 선택사항을 남겼다. 즉, 핵 강대국이 자신의 군대를 안전한 거리에 떨어져 있도록 하는 재래식 국지전과 게릴라전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호전적인 국가들은 이 2가지를 혼합한 방법을 취했다.
이런 종류의 첫 번째 전쟁은 현대 서구군으로부터 반응을 얻어낸 인도차이나에서 발생했다. 관련된 서구군(프랑스 연합의)은 초기 식민지 전쟁에서 처럼 싸웠다. 포병 대포(요새의 수비대나 이동 대열에 속한 소수의 평사포)는 많았으나, 전통적인 유럽의 사고방식을 가진 포병은 없었다. 디엔비엔푸 포위(siege of Dien Bien Phu)라는 충돌에서의 결정적인 전투가 예외 중 하나이었다.
이 후자의 전투가 인도차이나의 운명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좋은 포병을 가진 폭도들이 대개 승리했기 때문에 기념할 만하다. 베트남 민주동맹(Viet Minh)은 200문의 평사포(대부분이 105밀리 곡사포인)와 프랑스 진지를 둘러싼 좁은 말발굽 모양의 고지대에 배치된 로켓발사기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방위각(à tous azimuth)에 의한 방법으로 사격해야 하는 105밀리 곡사포 24문과 155밀리 곡사포 4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평사포가 베트남 민주동맹의 보병과 공병을 혹독하게 살상을 가하는 동안, 그들 또는 프랑스 지상공격기중 어느 쪽이 베트남 민주동맹의 평사포를 격멸할 수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핵시대에서의 두 번째 비핵전이 한국에서 일어났었다. 또다시, 서구세력의 포병 군수품 저장소(artillery park)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에도 그랬듯이 그늘에 있었다. 더구나, 이때에는 적이 전선에 곡사포를 둘 수 조차도 없었다. 이런 결과의 원동력은 전쟁의 결과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30년간 전력을 무장시키려는 미국 방법이 포병에 눈을 돌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와 벨기에처럼, 한국전쟁을 궁지로 몰아넣는 신속한 기동의 전역으로 요약할 수 있다. 1단계(1950년 6월부터 1951년 6월까지)에서 양쪽에 가용했던 극소수의 포대로는 어느 누구도 1944년이나 또는 1945년에 흔히 있었던 화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양질인 반면, 제2차 세계대전 후반부의 영국, 미국, 소련, 심지어 독일 지휘관에게 가용했던 포병의 수에 비해 미약했다. 2단계(1951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에서 연합군의 깃발아래 싸웠던 군대는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회담을 참호를 파며 기다렸다. 이 당시 전쟁에서 연합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방어와 제한된 목표를 가진 공격에서 대량살상을 하는 포병에 크게 의존했다.
유동적인 한국전 초기에서 포병의 부족은 연합군에게는 심각한 문제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예비역들이 주로 지휘했기 때문에, 미국과 특정 연방부대는 3 내지 4개의 포병대대가 실제 상황에서 각 보병대대를 지원하는 것이 가용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가정하에 전쟁형태로 싸우도록 배운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재간과 기술, 그리고 적시적소에 (화력을) 집중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서 (포를) 사용되었을 때, 이 정도는 가끔 분리된 작전을 하는데 충분했다. 예를 들어, 1951년 4월 초 미 21사단 보병연대를 직접지원하는 105미리 2개 곡사포대는 사격으로 최근 중국 보병연대에게 빼앗긴 고지를 힘이 약한 소총중대 병력으로  탈환할 수 있게 했다. 포병 계획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포병대대장이 직접관측하여 포복으로 전진하는 소총수의 후방에서 지시에 따라 전방으로 연신하는  1개 포대에 의한 이동 탄막사격이었다. 다른 포대는 중국군이 공격 중인 미군에게 종사하는 것을 방해하도록 인접한 고지의 적 진지에 대해 사격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에는 포병이 부족했다. 1951년 4월 말, 임진강에서 전투를 한 영국군 제29여단은 4.2인치 박격포 1개 포대와 25파운드 24문의 1개 연대로 증강된 사단의 전투력을 가진 중국군 보병에 의해 공격을 당한 보병 4개 대대와 협동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협동의 문제가 아니었다. 포대와 부대 지휘관을 피지원부대와 함께 전방에 배치하는 영국의 체계는 잘 수행되었다. 규모면에 더 많은 문제가 있었다.
7.5마일의 전면은 영국군 여단이 계속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넓었다. 그 때문에 전방 3개 보병대대의 병력을 대대 간 2마일의 간격으로 고지 정상에 많은 진지에 분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말에 영국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 진지 사이에 있는 저지대에 “맹렬히 포격하였다.” 그러나 이 전술을 수행할 화포가 부족한 영국은 거점을 방어하는 보병에 대한 지원을 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1개 포대의 간헐적인 사격에 심하게 고생을 한 중국은 압축된 소총중대 사이를 첨입했다. 1918년 3월 21일에 일어났던 사건의 반복인, 이것 때문에 중국의 “폭풍 기병대”는 영국 25파운드의 사격진지를 위협하는 것이 가능했다. 1918년 3월처럼 결과적으로 평사포를 재차 침묵시킴으로써 영국 진지의 결속력을 제거했었다. 1시간 이내에 여단은 철수를 강요당했다. 보병은 탄약이 바닥나고, 중국군을 살상하는 주요 수단을 빼앗긴 대대 중 하나는 전멸되었다.
1945년 제대로 향한 광란의 돌진동안 미국이 세계각처에 버려진 포병 군수품 저장소를 재집결하려고 하자, 이런 재난은 반복되지 않았다. 1951년 5월 초처럼 영국군 제29여단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것과 비슷한 중국의 공격은 서울 정북 쪽에 미국이 설정한 “무명선”을 따라 비통함이 나타났었다. 이 승리에 대한 공로는 공자(중국군)의 기진맥진함에 있었다. 미국 포병은 중국에게 대량피해를 입혔다.
1944년 혹은 1945년의 사격임무에서, 어떤 경우에는 미국 14개  경․중 포병대대가 1개 표적에 대해 2,500발의 포탄을 2분 이내의 “동시탄착사격(TOT)으로 집중하였다. 임진강에서 영국 제29여단에 가용했던 평사포의 10배가 넘는 이러한 규모의 집중사격이 모든 보병에게 가용하지 않은 반면, 이와 유사한 집중사격은 ‘무명선’ 방어의 특징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집중사격의 필요는 미국에게 다련장(multiple-rocket launcher)에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때에는 설계의 다양성 및 무기 운용자에 대한 의문이 없었다. 유일한 모델(트럭 탑재용 4.5인치 로켓)이 포병인이 다루는 잠정 로켓포대에 장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에 비추어 기대한 대로, 이 무기는 개활지에 있는 적을 살상하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한국전 첫 해의 밀고 밀리는 양상은 진지전에게 길을 내주었기 때문에, 강조사항은 위기에 대응하는 많은 대대의 집중사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나날이 이어지는 전투에서 참호후방에 있는 포병이 사격을 했던 동일 종류의 임무를 훨씬 적은 수의 평사포 사격으로 전환되었다. 30여 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군 정찰대를 지원할 야전포병의 상용은 적 정찰대를 몰아내었고, 적의 활동을 저지했으면, 보다 시선을 끌었던 것보다 훨씬 더 탄약을 많이 소모한 것으로 판명된 적 화포를 침묵시켰다. 1951~1952년 겨울에 찾은 해답은 1914~1915년 겨울의 해답인 1일 1문당 발수의 기준에 의한 엄격한 포탄 분배이었다.
또 다른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의 반복에서, 한국전의 정적인 단계에서 복무했던 미국 보병은, 포병은 항상 가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전에 의해 생긴 통신의 “자유화”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시의 대부분 군대는 국지포대(local battery)의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보병대대장이나 그의 상급자에게로 제한한 반면, 광범위한 무전의 분배로 각 정찰대의 지휘자는 시간에 맞게 포탄이 도달하도록 요청하는 능력을 제공받았다.
한국에서의 진지전 경험은 포병운용의 다른 방법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이들의 눈에 포병도 일종의 공익사업이라는 견해를 보여 주었다. 즉, 많은 미국인들은 포병화력이 마치 가스열, 수돗물, 또는 전기와 같이 “주문자”의 의지에 따라 소환할 수 있는 것으로 믿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마치 민간사회에서 공익사업의 생산물에 접근하듯이, 포병 화력에 접근하는 것은 더 커진 전술상황에도 불구하고 경험할 수 있는 권리였다.
2가지 요인이 포병을 공익사업으로 보는 미국인의 견해에 기여했다. 첫 번째는 그 구조가 움직이는 방법이다. 전방 관측자는 단거리의 무선이나 전화통화로 보병 정찰대나 전초를 포대, 사격지휘소, 화력지원협조소,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의 크고 정교한 통신망에 연결시켰다. 마치 소비자가 전기 스위치나 수도꼭지를 켜는 것 같은 전방 관측자의 통화에 의해 격렬히 움직이는 활동을 보병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본 것은 결과에 의해 생긴 산물이었다.
두 번째는 한국전쟁의 정적인 단계에 있는 정치적인 풍토이었다. 일단 활동이 멈추게 되면, 미국의 정치지도자는 전쟁에서 이기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분할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일련의 협정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작전은 전선을 유지하거나 개선하는 쪽으로 감소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단지 미 보병이 많은 우군포병이 쉽게 지원하는 범위 내에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포대의 정밀한 배치, 진지 및 참조점의 측지, 포탄의 퇴적, 그리고 이격 된 포병을 단일 포병체계로 전환하는데 필수적인 보안성 있는 통신의 설립 등을 용이하게 했다.
미 포병이 공익사업이라는 생각은 50년대 말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창도자는 포병인이었고, 청중은 보병이었다. 1940년대 후반이 되자, 미 포병은 자신들의 무기에 대한 불안감과 타 무기 분야에 있는 많은 경우의 선택적인 건망증 증세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저명한 언론이 핵전쟁, 로켓,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군의 영광에 대해 찬양하는 동안 보병 및 전차 지휘관들은 평화시의 훈련(포병 화력은 주로 문서상에만 존재하는)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조용한 사건들은 점차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그들의 대응은 다중대대의 집중화력을 설교하는 것과 이와 같은 화력의 편성을 가능케 하는 상급제대 포병본부를 설립하기 위해 의회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급 포병부대는 화력지원협조소(fire support coordination center)라는 새로운 기관에게 집중화력 업무를 빼앗겠다. 본래 지상에 주둔하는 포병(육군과 해병)의 일과 해군 선박에서의 화력을 해병대의 지상공격기의 활동에 협조시키는 일시적인 수단으로 태평양에서 사용했던 화력지원협조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해병대 전투편성을 위한 영구적인 기관이 되었다. 몇 년 뒤, 육군은 연습에 채택하였다.
화력을 제공하는 다양한 부대(비행대, 단, 편대 ; 포병 포대, 대대, 연대 ; 해군함정 ; 그리고 박격포 소대까지)의 대표로 구성된 화력지원협조소는 피지원 부대장이나 대형에게 응답하는 상설 위원회이었다. 시간이 가용할 때, 한때 포병의 범주에서 제외되었던 일종의 화력지원계획을 끌어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화력지원협조소는 ‘지원’을 위한 다양한 화력지원기관에게 표적을 분배하는 반응적인 방식이었다. 즉, 화력지원협조소는 생산자나 소비자를 일치시키는 세탁소이었다.
권한을 가진 장교(종종 화력지원협조관)가 이끌 때에는, 이러한 일치과정은 독단적인 면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지도자는 즉석에서 여러 자원을 각 요소에 아치모양으로 걸쳐져 연계되는 계획에 따라 할당하는 전성기의 뮐러의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종종 그렇게 했다. 그러나 만일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화력지원협조소는 군사기관이라기보다는 누가 어떤 목표를 공격할 것인가를 계속하여 살피는 약삭빠른 모든 거래를 하는 의회기관을 닮았었을 것이다. 그러한 천막이나 지휘장갑차량에 갇혀있는 이러한 “‘약삭빠른 거래꾼”이 전장이나 화력지원기관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거의 갖지 못했기 때문에, 화력지원계획 수립은 지상 상황과 연관이 없는 가능성이 많았다.
화력지원협조소는 화력지원을 제공하는 다양한 부대 간 “중재(deconfliction)"(우군 포탄이 우군지역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하면서 가장 적합한 무기를 표적에 할당하는)를 신속하게 제공했다. 이것은 적 방공임무 제압(우군 항공기가 무장을 투발하기 위해 도착하기 전에 적 방공무기의 활동을 제압하는 포병사격)을 조직하는데 특히 유용했다.
심지어 최고점에서 일광을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공익시설로서의 화력 표시처럼, 화력지원협조소는 정적인 전쟁에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해변을 달리고 쭈그려 앉는” 수륙양용작전에서 비롯되어 한국전쟁의 정적인 단계에서 다듬어진 화력지원협조소는 작전의 보조가 느릴 때에 가장 잘 기능했다. 모든 것에 기능하도록, 화력지원협조소는 빠르게 이동하는 군에는 거의 가용하지 않는 1급의 통신망을 요구했다. 더구나 기능을 잘하기 위해, 화력지원협조소는 “무기 개발자”가 포적을 포병사격 임무나 항공기 비행에 일치시키는 동안 표적이 조용히 머물기를 요구했다.
성장력에도 불구하고, 재래식 포병이 더 큰 화력을 지원하는 화력의 한 부분이라는 시각은 적어도 1950년대까지는 세계적인 추세가 되지 못했다.으로 적어도 1950년대까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것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근접지원(경포병이 기동부대와 직접적으로 협동하는 비교적 가벼운 무기의 독립 포대나 대대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었다. 이 “대량의 반대되는 기류”는 태평양에서 섬전투의 기억과 한국전쟁의 유동적인 단계에서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근접지원 학파의 가장 큰 후원은 그 당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무기인 전술 핵폭탄과 헬기에서 유래했다.
280밀리 대포에서 사격된 비유도 로켓에 의해 투발 되던, 또는 항공기에 의해 투하되든 간에 전술 핵무기는 재래식 부대의 집중을 위험한 전제 조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보병과 전차에게는 확실한 사실인데 반해, 포병에 있어서는 2배의 사실이 되었다. 수천 미터의 재래식 사단의 정면을 따라 배치되는 5~6개의 포병대대는 1~2발의 전술 핵무기의 파괴에 취약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근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결국에는 집중된 곡사포가 할 수 있는 것은 “은빛 탄환(silver bullet)”으로 명명될 되는 단일 포신사격으로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다.
육군과 해병대 양측에 대해, 핵 전장의 전망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은 대대나 연대 전투조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이 기관의 구성과 전문적 명령법은 다소 달랐다. 그러나, 개념은 동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펄킨(Percin)의 가르침이나 1943년 독일 제78강습사단의 최초 조직에서 그랬듯이, 단일 표적에 1개 대대의 가치를 갖는 포병이상으로 집중할 필요가 없는 포병은 피지원 기동부대에게 더 근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육군은 4개(후에 5개) 소총중대의 전투단(battle group)에 1개 이상의 독립 6 대 12 포신의 직접지원 포병부대를 배속함으로써 전투조(combat team)를 형성했다. 5개 전투단, 5개 직접지원 포병대대, 핵탄을 사격하기 위해 고안된 일반지원 포병부대로 펨토믹( Pentomic) 사단을 만들었다. 만일 사단이 “순수 보병”(straight leg) 사단이었다면, 직접지원 포병부대는 155밀리 곡사포 1개 포대와 다른 105미리 포대들로 구성된 작은 대대일 것이다. 보병사단의 일반지원 포병부대는 8인치 1개 곡사포와 첨단 핵(nuclear-tipped) 로켓으로 무장된 “어네스트 존” 1개 포대를 가진 작은 대대이었다. 펜토믹 사단의 공수 변형은 더 적은 포병을 가졌다. 이것을 직접지원하는 포병은 105밀리 곡사포 5개 포대와 4.2인치 박격포 5개 포대로 구성되었고, 일반지원부대는 “어네스트 존” 로켓 단일 포대였다.
해병군단의 조직에 대한 철학은 다소 더 보수적이었으나 장비 선택에서는 급진적이었다. 이로 인해 상륙조를 형성하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제도화했다. 다른 지원요소들과 함께 곡사포 대대가 연대 상륙팀을 구성하기 위해 보병연대에 추가되었다. 보다 적은 규모로서, 단일 포대(다른 “잡동사니 제품”이 추가된)가 대대 상륙팀을 구성하기 위해 보병대대에 추가되었다. 양쪽 형태 상륙팀의 독립은 1950년대의 해병보병 부대에 81밀리와 4.2인치 박격포가 잘 보급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주목할 만큼 진전되었다.
육군 전투단 포병으로 선택된 무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육군 사단포병의 주 의지수단을 형성했던 105밀리 곡사포를 다소 경량화한 형태이었다. 한편 해병군단은 더 가벼운 무기를 선호했다. 해병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해병 포병대대에 대량으로 장비되었던 다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75미리 꾸러미 곡사포와 4.2인치 박격포에 의해 제공된 “차체용 강타(bang for the buck)"에 감명을 받아, 2가지를 결합시켜 ”곡사 박격포(howtar)"를 만들었다. 이 무기는 반동 구조, 바퀴가 달린 운반대, 곡사포의 안정된 조준구를 더욱 치명적인 포탄과 박격포의 높은 발사율과 결합했다. 이 무기의 사거리는 4.2인치 박격포(5,500미터)와 105밀리 곡사포(10,500미터) 사거리의 중간이었다.
“곡사 박격포”에 대한 해병의 관심은 가능한 한 해병 상륙팀을 경량화하려는 요구에 의해 박차가 가해졌다. 전형적인 수륙양용작전에서, 이러한 경량화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최고의 장점은 아니었다. 1950년대의 해병이 신뢰했던 지상상륙은 핵무기에 너무나도 취약했다. 그러므로 수륙양용작전의 미래는 헬기에 속해졌다. 그 결과 ‘경량화’는 더욱더 중요해졌다. 같은 수의 105밀리 곡사포를 운반하는데 필요했던 양력의 반도 안 되는 힘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곡사 박격포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투단을 근접지원하기 위해 보다 더 경량화된 대포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의 모든 포병의 개발이 기동성의 지원에 있지는 않았다. 전술 핵무기를 사격하기 위해 발사기가 요구되었으며, 육군 포병병과가 로켓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보여 주었지만, 그 이전시대에 초중량 포병(superheavy artillery)의 범주로 분류될 무기에 대해 상당한 업적이 이루어졌다. 꾸러미를 선도한 것은 “280밀리 원자력 (Atomic Annie) 곡사포"이었다. 들볶는 주문은 제2차 세계대전의 8인치 곡사포의 자주화와, 동일 장착대에 올린 175밀리 장거리 평사포에 더 내려갔었다. 이 후자의 2개 무기는 재래식 포병탄약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은 곧 유용할 것으로 판명되었다.
미육군과 해병군단이 50년대를 위해 준비했던 전쟁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 대신, 미군은 후세대의 역사가들이 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언급했을지도 모를 것에 그들이 포함된 것을 발견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처럼,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게릴라전과 제한된 재래식 전쟁의 형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1차 전투의 많은 동일 행위자와 모든 지형이 존재했던 사실과 결합된 이 전쟁은 많은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전술적 수준에서 큰 차이점 중 하나는 화력이었다. 종종 프랑스가 베트남 민주동맹보다 포병을 덜 보급받은 반면, 미군은 베트남에서 거의 항상 첨단 화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무기(105밀리와 155밀리 곡사포) 뿐만 아니라, 전술 핵전쟁을 위해 선택된 무기(헬기, 4.2인치 박격포, 곡사 박격포, 경무게의 105밀리 곡사포, 155밀리 곡사자주포, 175밀리 평사포, 8인치 곡사포)의 조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 무기들을 이용하기 위해 전개된 전술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가설적인 핵전쟁의 전술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았다.
특히 케산(Khe Sanh)을 포위하는 도중이나, 수많은 포병 습격(artillery raid)에는 예외가 있을지라도, 이러한 무기들은 나라 전체에 퍼졌던 타자석 크기의 사격기지(fire base)에 운용되었다. 이 사격기지에서 작전을 하면서, 포대는 하루, 수주, 여러 달, 심지어는 수 년동안 수많은 포탄을 발사했다. 그러나 드물게 1개 포대 이상의 화력을 보장할 정도로 충분히 큰 표적은 사격할 진지에 있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대대 편성의 전개에서 나타났었다. 임시 변동으로 만들어진 부가적인 미 포병은 추가된 포대로 보강된 많은 대대가 있은 반면, 추가된 화포로 증강된 포대의 사례는 거의 없었다. 반대로 일부 포병대대는 6문 단위 표준 사격부대만큼 4문 단위 포대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베트남에서 미포병의 핵심적인 장점은 포함 범위와 반응성이었다. 소수의 적 보병과 접촉한 소규모 보병 정찰대를 구하기 위해 소량의 발수를 사격하는 포병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충분한 포탄발수가 없었던 위험은 없었다. 더구나 우리가 필요로 했던 포탄량이 적시에 필요한 곳에 사격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실제로 무전과 미 포병부대의 고객지원 지향 불려질 것 때문에, 포함 범위와 반응성이 너무 좋아서 많은 미보병은 81밀리 박격포도 없이 전투에 임했다.
베트남 일부지역에서 보병 지휘관들은 지원포병, 해군 함포사격(해안지역의), 지상공격용 항공기의 전투력과 신뢰도가 보병 정찰대의 규모를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대 소탕이나 소대 정찰대를 사용하는 것 대신, 이들은 무전기와 개인용 방어무기를 휴대한 겨우 4, 5 혹은 6명의 팀을 내보냈다. 비록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노랑가오리(stingray)”팀은 미국이 심하게 관련되었던 4년 동안, 일반 보병대대보다는 훨씬 적은 피해를 받고서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보병은 찾고, 포병은 죽인다(infantry finds, artillery kills)”라는 이 논리는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해 (1970~1971) 동안 11 해병연대 (4.2인치 박격포부터 175미리 평사포까지의 사거리를 가진 무기를 갖춘 포병편성)에 의해 끝까지 추진되었다. 점점 더 적은 수의 보병이 오지로 보냄에 따라, 적의 “집안 관리”를 방해하는 일은 장거리 포병화력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부는 선택된 언덕 정상에 위치한 초소에서 관측되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첩보기관이나 비공식 수단에 의해 위치가 파악되어 무관측사격이 지시된(기지, 무기 / 식량 저장소, 로켓과 박격포 위치, 합류지점, 이동로 같은) 표적이었다.
영구적인 관측소에서 관측된 사격의 정확도는 야간 관측장비를 가진 선박용 쌍안경과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접속한 400파운드 장치인 통합 관측기구(integrated observation device)를 사용함으로써 한층 강화되었다. 주간 10,000미터인 거리(야간에는 4,000미터로 줄어든)를 가진 통합 관측기구는 해병 관측자에게 105밀리와 155밀리 포병대포의 사거리 내에 있는 모든 지점을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하게 했다. 그다음,  관측자에게는 불필요한 거리측정 사격(firing ranging shot)을 하지 않고서도 효과적인 사격을 할 수 있게 했다.
적을 고착시키기 위한 보병이나 어떤 다른 무기수단이 없고 적의 위치와 방위각을 포병이 알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 확실한 부대에 대한 포대의 일제사격의 효과는 “포병단독” 전술에 의해서 더 많은 소실을 입힐 수 있었다. 이것은 북베트남인들이 계속적인 그 지역 해병관측소에 대한 공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공격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명확했지만 - 관측자들은 물론 최고로 좋은 위치에 선정되어 있다 - 이들은 필수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영구적인 기지을 만들어 놓고, 숨어서 미국인들이 철수하기를 기다렸다.
베트남에서 장거리포를 많이 사용한 덕분에 많은 미국인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적이 사용하는 통로를 따라 파괴적인 사격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심스러운 적위치에 포대에서 포탄을 떨어뜨리는 미국인들의 그러한 행동에 희생이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민간인, 가축, 재산에 대한 불가피한 희생을 초래하는 무차별 포격은 미국이 더욱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러 왔다는 의심을 증폭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포격이 다른 무기에 비해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효과가 탁월하다는 사실이 적군으로 하여금 미국의 이러한 행동을 경멸하도록 만들었다. 베트남에서 보통의 적군은 앞선 전쟁들에서 추정 미국이 더 적은 포탄에 지치기 전에 믹구이 포탄을 쏘는데 지치도록 할 만큼 견뎌내는데 익숙해 있었다.
게릴라오 유물론자들이 정규전을 밀어내 버리는데 일조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재래식 군대는 영구적인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항상 이용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긴급히 결정되어 짧고 빠르게 전개된 전쟁, 방사능이나 화학적 오명(1980년대 후반의 Intefadah), 혹은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 간은 식별상 어려움은 원자력시대에도 여전히 1944년과 45년 식 스타일의 군대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소나마 미국과 소련군에 위안을 주는 것은 그들의 방법을 거부한 중동지역에서 재래식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가 가장 성공적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기갑, 보병, 항공과 마찬가지로 포병의 경우에 이스라엘은 미국 및 수련제 무기를 기꺼이 사용했다. 그러나 전략적인 면에서는 독일에 의해서 완성된 (지금은 기동전이라 불리는) 전력전을 채택했다.
기동전의 채택이 옛날 참호전의 악몽에 의해 평화시대에는 병역의무에 곤란을 겪고 있는 구식군대와는 다르게, 이스라엘에서는 초창기부터 전력전을 연습해 왔다. Order Wingate Liddello-Heart,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Erwin Rommel에 의해 영향을 받아 아랍-이스라엘 분쟁(1948, 56, 67, 73, 82) 동안에 싸운 이스라엘군은 융통성 있는 전술운용과, 임기응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동에 있어서의 빠른 템포유지에 놀랄만한 능력을 나타냈다.  처음에 포병은 전쟁에서 적은 역할에 불과했지만, 몇 년 뒤에는 필수적이고 이용가능한 장비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야전포병의 이용을 증가시켰다.
1948년 이스라엘에 새롭게 배치된 야전포병은 8개 포대 65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1차 대전이전에 생산된 65미리 산포,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 75미리 속사포, 자체생산한 Davidka 중 박격포 등의 잘 쓰이지 않는 구형무기로 무장했었다 이들 포대는 독립적인 활동 했고 종종 보병여단의 지원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의 제한된 수 때문에 1948년 이스라엘군의 중요한 간접화기 화력으로 보병 박격포가 증가하는 것만큼 밖에는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박격포 중 (대부분 영국제 2~3인치 모델) 900개 가까이는 소총의 비율은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독일사단보다는 못했지만 영국보다는 더 큰 비율을 가졌다.
종종 전투지대에 25파운드의 포를 남겨놓곤 했던 아랍군대의 태만적인 관대함에 크게 힘입어 1956년까지 이스라엘의 야포수는 150문으로 증가했다. 현재 상황에 맞게 8개 대포포대가 (영국식으로 조직된) 기동부대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야포는 120미리 박격포와 함께 근접지원의 역할을 담장 수행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에서 반응성을 높이기 위해 화포의 무게를 줄이는데 노력했는데 이것은 대대크기나 그보다 작은 형태의 부대에 single 4개의 화포를 배속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이스라엘 포대에 의한 제한된 호락을 사용하는 기술은 마치 양대 세계대전에서의 동일의 모습은 보는 것 같았다. 포병부대는 전차의 긴 종대행렬과 무장화력 수송대 앞에 놓이게 되었다. 기동중대와 포대 지휘관들은 이동 중에 화력을 을 요청하는 사단, 여단, 대대 지휘관들과 함께 타고 다니면서 협력하게 되었고, 목표를 찾아 선제공격하는 데 있어서의 포병의 필요성에 크게 강조되었다. 서로 간에 커다란 손실이 예상되는 상황에서조차 (예루살렘에서 싸우는 것과 같은) 이스라엘은 순수한 방과자들이나 종전세력보다, 적진 내 위치한 화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형식적인 argency 보다도 더 포병장교들의 훌륭한 판단을 믿었다.
대체적으로 이스라엘 군대는 주준지에서 싸우는 보병기동단위로붙커 사막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가솔린으로 움직이는 기동부대를 변했기 때문에 전차부대나 기계화보병처럼 기동 할 수 있는 포병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투자했다. 이런 계획의 일환으로 절반은 이스라엘에서 자체생산되기 시작한 120미리 박격포를 탑재했고 나머지 반은 미국제 반무한 궤도식 군용차를 채용했다. 더 어렵고 시간이 많이 소비된 계획은 평사포와 곡사포의 자주화였다.
이스라엘에서 첫 번째 자주된 야포는 1954년 프랑스로부터 얻은 경 탱크(AMX-13) 포가에 탑재된 105미리 곡사포였다. 이것들 중 단지 single 8개 대포포대가 1956년 전쟁에서 이용되었는데 그것들만으로도 이스라엘 정부에 그것들의 가치를 인식시켜 주었다. 그 결과로 1956년에서 67년 사이에 sherman 전차포가에 자체생산된 155미리 곡사포와 160미리 박격포, 미제와 프랑스제 105미리, 155미리 포를 탑재시켜 자주포병을 증강시키는데 주력했다.
1967년까지 이스라엘 포병은 105미리와 155미리 곡사포의 수를 56년에 비해 2배로 늘렸다. 그러나 아랍에서도 더 긴 사거리에 더 무거운 포탄을 날릴 수 있는 소련제 무기(특히 122미리와 130미리 평사포)로 그들의 2차 대전 때의 제작장비 (거의 영국제 25파운드 포)를 대체하도록 하며 그들의 2차 대전 때의 제작장비 중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랍과의 포병경쟁에서 더 나아질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수단들 -전차를 이용한 깊은 종심작전이나 지상공격기에 의한 타격-을 이용하여 아랍의 화포를 전쟁에서 무력화시켰다.
이것은 국가탄생 초창기 20년간에 이스라엘 포병의 가장 큰 집중을 보인 전쟁에서조차 사실이었다. Ariel sharan의 1967년 6월 5일 밤 sinai의 Um Katef에 대한 제한적 목표에 대한 공격, 비록 공격목표는 이집트의 야포 160문이 위치한 매우 강력한 지점이었지만 sharon의 100문의 화포 (각각 8개의 대포를 가진 6개의 대대) 중 어떤 것도 포병전에 참여하지 못한 채 sharon의 사단을 전개하기 위해 이집트 화포를 무력화시키는 작업은 지상공격기들에 의해 행해졌다. 나머지 이집트 포대들을 끝내는 일은 공수부대에 의해 행해졌다.
이집트 포병에게 이러한 비재래식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 화포는 공격 중이 보병과 전차에 지원을 집중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이스라엘 포병의 영향은 보영의 전진이 적에게 들키지 않았는가를 감시하는 것으로 제안했다. 발각돼서 이집트군이 사격을 시작하면 그들은 “jumping barrage"로 산개한다. 즉 이스라엘의 ‘주요 포대”들에서 각각의 tube는 먼저 정해진 목표에 사격을 하고 몇 분 후에 모든 tube들은 두 번째 목표로, 다시 세 번째 목표로 전환하는 노출된 사격지점으로 갈 것이라는 희망에 먼저 번의 목표로 되돌아가 사격하곤 했다. 이러한 jumping barrage를 10 동안 하면 이집트군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진지에서 나와 사격하게 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군은 비교적 가벼운 사상자 수로 이집트군의 위치와 근거를 알아낼 수 있었다.
1967년 후에 이스라엘군은 근접지원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했고, 박격포를 자체 생산 중이라는 사실에 간접화기의 선택에 있어서 120미리와 160미리 박격포를 선호하는 의견이 점점 증가추세었다. 처음에 이러한 성향은 박격포가 평사포와 곡사포를 밀어내는 것이 전쟁술에 있어서 손래를 입히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근접지원 임무로부터의 이스라엘 포병의 해방은 6일 전쟁의 전광석화 같은 승리를 가져온 20년간 포병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스라엘 포병에 대한 임무가 전차나 보병이 직접 접근할 수 없는 목표에 대해 긴 사거리로 사격하는 것은 6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기동전에서 두 번 패한 아랍의 지도자들은 그들 장군들의 명성이나 무기의 위신에 손상이 가지 않고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을 계속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의 해결책의 하나로 테러가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긴 사거리의 포병과 다련장, 로켓 포격을 이스라엘 정착지에 가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것은 요르단강을 전환시켜 이스라엘로부터 물을 빼앗는 시도였다.
아랍연합의 이러한 세 가지 작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응은 포병을 이요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국경선 마을에 포탄을 떨어뜨릴지도 모�반큼 아랍이 이스라엘에 근접해 있다는 것 또한 이스라엘 포병의 일을 쉽게 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의용군이던지 폭탄에 대해 그리고 시리아인으로부터 당했던 포격(1968년 이집트에서 시작된)에 대해 이집트의 정제시설, 수에즈와 Ismailia시에 대한 그리고 요르단을 전환하려는 노동자들에 보복을 가했다.
1918년 파리 포격이 처음 시도되었을 때, 국가들은 전투라는 중간과정 없이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전략적 무기로 포병을 사용하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요르단강의 강탈행위를 방지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러한 포격과 포병 전은 탄약을 지급하는 정부의 그날그날의 정책에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1967년에서 73년 사이에 이스라엘 포병이 거의 두배로 증가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73년에 아랍이 다시 침공했을 때 100미리나 그 이상 구경의 화포 570문을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확장을 가능하게 만든 긴 사거리 무기는 미국에 의해 공급되었다.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증진된 친선 덕분에 (1970년대 후반에 결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포병은 이러한 전쟁에서 필요한 장거리포(175미리 자주포 같은)를 획득할 수 있었다. 1973년 10월 전쟁에서 장거리포는 대공 미사일기지, 디아스커스 공항, 수에즈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Ismailia시에서 카이로에 연결된 도로등 전쟁에서 중요한 포격목표들을 전략적 지역에서부터 전쟁수행지역까지 사격할 수 있었다.
큰 구경의 화포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사격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이스라엘에서는 더 알맞게 화포를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10월 전쟁에서 처음으로 정밀한 대전차 미사일이 양측 모두에서 채택되었다. 특히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많은 탱크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소련제 Sagger를 도입하는 수단을 보였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은 어떤 전차도 근접지원하는 포병이나 박격포 그리고 기계화보병의 근접협력 없이는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Sagger는 가볍고 정착했지만 대포사격이나 포탄 파편에 굉장히 공격받기 쉬웠다. 그들의 유도시스템은 매우 정교했으며 더욱이 조그만 실수에도 전차를 잡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10월 전쟁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이스라엘은 155미리 자주포 36문으로 편성된 독립여단을 창설했다. 이 단위부대는 12개의 대포를 가진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단과 더 높은 제대에서 정한 주요 목표에 짧고 강하게 화력을 집중하도록 고안됐다. 이러한 대포의 화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집중하기 위해 이스라엘 진지 산업은 현대 화력조정 컴퓨터를 발전시키도록 요청받았다. 그리고 기동 관측소를 공급하기 위해 이스라엘 비행기 회사는 군부분에 TV카메라를 설치한 원격조종 차량을 고안해서 생산해 냈다. 그 결과로 이 고안품으로 사단을 기계화하고 무장시켰을 때 똑같은 기간에 프랑스제 무기로 무장한 사단의 사단포병과 매우 비슷해졌다.
짧은 시간에  작은 지역에 집중사격하기 위해 이스라엘 포병은 다련장에 대한 지속적인 선호를 나타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아랍군대로부터 240미리 Katyushas를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은 이와 유사한 무기를 그들 스스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160미리 자체고안, 생산품뿐만 아니라 소련제의 트럭에 장착시켜 쏘는 로켓을 포함한 거이었다. 이런 로켓 시스템은 LAR-160으로 알려졌는데 비록 낡은 전차포가에 장착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긴 사거리(3만 미터)를 가진 현대식 무기이고 사용의 용이함으로 다련장 로켓 시스템과 유사했다.
전투의 서유럽 군대의 포병은 같은 기간의 이스라엘 포병처럼 같은 방향의 발전형태를 위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유럽무기의 디자인과 운용형태를 많이 반영했다.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그들 자신의 재래식 전생이 없었으므로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의 정보를 그들 자신의 재래식 군대의 고안에 참조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대부분에 나토의 문제는 이스라엘의 문제와 비슷했다. 양쪽 모두 거의 사전경고 없이 짧지만 집중적인 전쟁에서 많은 수의 적 탱크를 막아내야 하는 필요서에 직면해 있었다.
나토의 경우에 1964년 후르시초프의 몰락으로 시작된 소련 재래식 무기 증강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탱크열풍은 최고조에 달했다. 첫 번째는 나토의 반응은 소련전차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모든 부대 - 보병, 항공, 기갑, 포병 -들은 이들 탱크가 행동범위밖에   놓이도록 하는 직접적인 수단을 찾아내는 일을 수행했다. 보병과 항공에 대해서는 여러 종류의 대전차 미사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탱크와 포병에 대해서 탱크열풍은 모든 tube를 대전차포 종류로 바꾸도록 위협했다.
미국이 105미리 곡사포를 새로운 155미리로 바꿨을 시기에 대전차포로 야포를 전환시키던 155미리 곡사포에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하는 것이 다른 하나는 포탄에 소련 탱크의 꼭대기 장갑을 관통하도록 다량의 소형포탄으로 포탄 속을 채우는 것이었다.
앞서 소개한 두 가지 방법 모두 크게 열정을 갖고 추진했으나 전통적 야전포병의 조직과 장비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발전을 통해 생산된 대포에 장착하는 대전차 유도미사일은 Copperhead라 불리는 레이저유도장치였다. Copperhead의 첫 번째 문제는 복잡한 유도시스템이 곡사포로부터 발사될 때 받는 압력으로부터 결딜만큼 강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Copperhead를 쏘아 전체 사격하는 포대와 레이저 측정기를 갖춘 전방관측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결국 극복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남아 있다. 소수의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포대를 전투지역 밖에 가져가는 상황하에서 Copperheader 같은 시스템은 Tow 미사일처럼 직접발사하는 정밀유도탄에 비해(높은 각도에서 떨어지고 보고발사하는 기능이 떨어지는 것처럼) 거의 이동이 없었다. 더욱이 155미리 곡사포 포대에서 필요로 하는 양만큼을 구매하고 배치하는 것은 직사 유도미사일에 비해 훨씬 더 뒤떨어졌다.
또한 소형 폭탄은 많은 포대를 간의 협조를 약속했다. 155미리 포탄의 제한된 부피 때문에 단지 소수의 포탄(더 작은 타입의 약 16개) 만이 각각 운반될 수 있었다. 즉, 목표지역에 있는 모든 탱크의 머리 꼭대기에 포탄이 떨어지도록 하는 사격을 하기 위해 많은 포탄을 소비해야 했다. 많은 포탄을 사격하는 필요성은 길고 오래 끄는 포격(사격하는 포대가 대포병사격에 노출되고 탱크로부터 도망갈 수 있도록)이나 많은 포대의 집중사격(조직하기는 어려운)의 필요성에서부터 제기했다.
이러한 폭탄문제에 있어서의 해답은 로켓학에서 찾았다. 소련의 Katgusha, 독일의 시안의 Hobelwerfer, 미국의 2차 대전 당시의 Caooipe와 같이 순차적으로 이것을 깨달았을 때 미군은 탱크 위에 폭탄을 더 신속히 떨어뜨릴 수 있도록 고안된 새로운 다련장 로켓을 획득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정말로 이러한 거승로 인해 얻어지는 경제성은 매우 장래성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희망했던 것과는 다르게 폭탄이 탱크에 효과가 적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조차도, 미국에서 다련장 로켓은 바르샤바 조약의 포병을 공격하는데 특히 1970년대 후반에 소련제로서 등장하기 시작했던 자주포를 공격하기 위해 계속해서 발전되었다. 그 결과로 다연발 로켓 발사 시스템(MLRS), 일분만에 3만 미터의 사거리 밖으로 수백 개의 포탄을 날릴 수 있는 무기로 발전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나토의 다른 군대는 다련장 로켓에 이와 유사한 지속적 관심을 나타냈다. 이러한 관심은 독일, 이태리, 영국, 프랑스에서 MLRS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을 결정함에 따라 명백해졌다. 그러나 독일과 스페인에서는 야전에서 더 가벼운 다련장 로켓을 만들었다. - MLRS와 같은 긴 사거리의 무기와 155미리 곡사포 사이의 차이를 극복한 무길들
다련장에 대한 선호는 1980년대 들어와서는 신고전주의란 불리는 경향에 의해 더욱 강해졌다. -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과의 분쟁에서 적용된 프러시아 - 독일,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고전적 개념의 기동전에 크게 기초를 두고 있는 재래식 전쟁 개념과 유사. 비록 소련은 계속해서 전차를 생산해 냈지만, 서유럽 군대는 단발무기에서의 고착적 견지에서 벗어나 소련탱크를 파괴시킬 방법을 좀 더 다각적으로 모색했다. 이것에 대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제도적 완성 -종종 기술자들의 근시안적인 측면으로 나오게 되는 잘못된 군사분석 -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수의 자주포를 포함한 포병군수 공장과 무기고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신고전주의 주요 글자는 무기들을 합치는 것 -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적을 진퇴양난에 빠뜨리기 위해 다른 무기들끼리 서로 협조하는 것이 더 강력하다는 생각 -이었다. 포병이 관련된 범위 안에서 신고전주의는 기동단위에 대한 근접지원과 더 강력한 대대 집중화력으로 모두에 이익을 주는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 동시에, 근대 전투에서 필수적인 기동부대의 역할에 대해 더 나은 인식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것은 차례로 기동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신고전주의 기간에 표준적인 포병 화포는 - 이번 세기의 초에 이십 년간 75미리 속사포가 인기를 끌었던 것과 비교해서 - 155미리 자주포였던 가벼운 속사포의 경우에서처럼 모든 국가들이 그들이 원했던 만큼의 155미리 자주포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학문적인 면보다는 재정적인 면에서 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 기간의 대부분의 군대는 미국 M109와 유사한 무기로 구성되었고, 최소 18문의 대포로 한 대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어떤 일치된 부분도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이 독일을 경계선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생겨난 신고전주의 전략적인 환경이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