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여단 포병대대장은 육사 39기(입교는 38기로 임관은 39기)로 한 엄중령인데, 승리사단시절 인접대대 포대장을 하다가 연대 작전보좌관을 하던 성격이 참으로 깐깐한 참군인(나의 기준으로 볼 때)이었다. 그 당시 육본 영관보임장교하고는 엄중령과 고교선후배사이라서 나에 대해서 많이 챙겨주었다.
일단 부대정문에 있는 비오큐에 혼자 있으면, 1달에 맥주를 한 박스씩 몰래 집어넣어 주고, 제가 생활하는 불편하지 않도록 많이 신경을 썼다. 나 역시 비록 화지반장으로서 여단에 있었지만, 대대 간부과 대대장간의 완충지대로서 역할도 많이 했다.
화지반장을 하면서, 부가적인 임무로 여단장이 제출하는 군단지휘보고를 작성하게 되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윗분들이 좋아하는 글과 문장, 용어들을 가다듬게 되었는데, 추후에 문서작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가 예하기동부대가 박격포 훈련하는 것을 교육감독하다가.. 기절초풍하고서.. 박격포운용 지침서를 작성하여 여단 집체교육을 시켰다. 포병학교 전개교관했던 경험에서 나온 현실감 있는 교육으로 마지막 훈련하는 모습을 산 위에서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후에, 새로운 여단장이 오게 되었는데, 그 분하고는 각종 훈련을 하면서 화력운용분야에 대한 견해차이로 삐꺽거리기 시작했는데.. 그냥 알았습니다 하면 될 것을... 교범에 밑줄을 쳐서 여단장의 개념이 틀리다고 했으니..
RSOI연습에 3군 연락장교로 2군 사령부로 파견을 가서 많은 경험을 했다. RSOI연습이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미군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면서... 연습이 끝나는 날.. 미 여군소령으로부터 감명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서 부대를 복귀했다.
틈틈이 on Artillery라는 책을 번역하여 포병역사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했는데, 국방일보에 학군 20기 김여홍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개글도 나왔고.. 이 역시 20기로서 한몫은 한 것 같다. 선봉화력지에 장애물통합운용이란 번역자료를 우리 것 화하여 낸 것이 채택되어 선봉화력지에 실리고..
그런데 18개월 기갑여단의 포병부대대장, 이 보직은 말년소령에게는 환상의 보직이라고 하지만, 나는 떠나기로 맘을 먹었다. 그 당시 군단지역에는 15명 정도 동기가 있었는데, 기갑여단에 근무한다고 기갑병과로 알고 있는 동기도 있고, 어느 동기는 아직도 부대대장하냐는 등,,,
그 와중에 모사단 포병연대장인 선배님이 전화 와서 자기 밑에 오라고 했는데, 재결통보인지 뭔지에 문제가 있는지 오라는 사람도 있고 간다는 사람도 있는데, 군단지역을 초월해서 그런지 그게 안되더라..
그래서 그 당시 군부사령관하시던 선배님에게 전화를 했다. 마지막 군생활은 미군과 훈련을 가장 많이 하는 기계화사단으로 보내달라고...
그때 그분이 전곡에 있는 모사단 연대참모로 갈 수 있게 군보임과장에게 임무를 주었는지.. 이제는 군사령부에서 거꾸로 전화가 온다.. 그런데, 기갑여단장은 자신의 장군발표를 앞두고.. 6개월 동안 조치 안 해주더니 결국 장군 발표가 난 후 풀어주었다.
6개월이란 기간 동안, 모 사단장과 포병연대장이 모두 바뀌었다. 선배님의 복안은 마지막 군생활이라도 연대 작전과장을 할 수 있는 자리로 보내주었는데, 모든 여건이 바뀌어서 고참 소령이 낙하산으로 왔다고 투덜 되는 말을 듣고서 전입신고를 하면서.. 보직은 연대 정보과장이 되었다.
연대 정보과장이 된 것 자체를 놓고.. 연대에서는 또 누군가 투덜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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