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이야기

14. 중위시절3

포병역사 (onrt20 , 김여홍) 2007. 7. 17. 05:59

그당시 서강대 학군단에는 현역 대령 1, 중령 1, 소령 2, 대위 1, 중위 1명과 예비역교관들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중에 학군출신은 대위 1과 중위 1있었는데, 1년 뒤에 장선배님이 전역한 후 이진삼장군의 아들인 후배가 왔습니다. 저는 후보생들과 나이차이도, 그들의 대학생활과 별 다른 차이도 없었고, 사고방식도 비슷하여 서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기때문에 개인 사생활(부모, 학점, 관심사, 걱정거리) 등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이때가 저에게 있어서 청춘의 환금기이었는데, 예상치못한 결혼으로 인해,,호시절을 접게되었습니다.

 

생각나는 사람들로는.

먼저 단장님이 계신데, 참으로 멋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옛날 원주에서 장군으로 진급될 수 있는 보직에서 근무할 때,  천주교 원주교구 장교단 회장이었는데, 문성현신부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해서 사전에 그런 정보를 인지하고서 보고하지 않았냐고 조사를 받으면서 장군진급의 기회를 놓친 분으로 참으로 합리적이고 멋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뒤에 민선 양평군수를 했던 민대령님이었습니다.

 

후보생중에는 배구선수였던 경영학과 김호열, 배일국이 생각나는데, 이 사고뭉치들 때문에 뒷수습을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당시 명예위원장이었던 정외과 정귀룡이는 애인이었던 숙대생하고의 교제를 집안에서 반대해서 맘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 학생은 그뒤에 보니깐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로 나오더만은 둘이는 교제하다가 각자 따로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한 것을 알았고,

 

현재 현역중령으로 있는 철학과 **는 여자를 울리는 선수이었는데, 사고친 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냐고 묻거나 그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모친에게 훈련하다가 기관총을 부려뜨렸다고 말을 해달라는 그런 사고뭉치로서 제가 후보생의 품위를 잃은 부적격자로 제명건의를 했는데,

 

작년에 유성에 한미연합사 워게임 교관으로서 지원갔다가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저는 그넘의 얼굴을 보고서 바로 알아보았는데...

 

그리고 복무연장이었던 국문과 박재서라고 대위때 근무했던 15사단의 민간인 폭행사고사례에 등장했는데, 그당시 자기 대대 작전과장이 국방대학원 석사과정에 합격하여 몇몇만 모여서 술을 먹다가 민간인들하고 시비가 붙어서 그당시 분위기상 현역은 맞고만 있어야만 했는데, 그 민간인들을 묵사발을 만들어 지역신문에 나왔는데, 사단장님이 맨날 민간인에게 얻어터지는 군인이야기를 듣다가 모처럼 때린 것을 알고서 뒤에서 칭찬했다나..

 

이렇게 2년을 후보생하고 즐겁게 지냈는데..

참, 나는 84년 3월에 결혼에 결혼을 했는데, 그당시 나에게는 적금던 95만원이 전부였다. 하지만 남들은 결혼하면 따뜻한 밥을 먹고서 대학원을 다닐 수 있다는 말도 들었고 군인 봉급으로 아무리 모운다고 해도 경제적인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하면서 예식비 등 모든 비용을 처가집에서 지원을 했고, 그당시 결혼식 하객으로는 처가집에는 인산인해였지만, 나는 부산에서 올라온 형제와 누나뿐이었다. 대신 자리에 앉은 이들은 후보생들로 가득 찼는데.....

 

그당시 저는 7남매의 막둥이고 집사람은 5남매의 막둥이로서 저희 집은 강남복부인 1세대인 큰형수집만 빼고는 거의 먹고 살기도 힘들었고, 처가집은 대단한 집이었습니다.

 

한예로 장모님이 옛날 MBC에서 프로권투를 중계할 때 초대 프로권투준비위원장도 했고, 택시만 450대 운영하는 여장부였습니다. 동서중에서 외국에 안가본 사람은 저뿐에다 최근 소식에 보니깐 동서들 자녀들 중에 제아들만 빼고 7명이 모두 여자인 조카들은 외국에 태어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그중에 이대나와서 지금 남편의 미국에서 박사과정받고 있는 남편을 따라서 지금 미국에 있는 제일 큰조카를 빼고는 6명 모두 미국에서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마친 그런 집들입니다.

 

동기들하고 여러면에서 차이나는 것을 도저히 만회할 수 없는 그런 것도 차후에 제가 장기지원한 이유에다 어떤 섭섭한에 어느 순간 동기와 자매라는 가족의 끈을 끊고서 외롭게 살아왔던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95만원에 그달 봉급에서 5만원을 추가해서 화곡동 한칸짜리 방을 보증금 100만원에 월6만원에 얻다보니 중위봉급 13만원으로는 정말 힘든 시절이었다.

 

이렇게 서강대에서 훈육관으로 2년간 근무한 후 마지막 1년을 문무대 구대장으로서 근무하기 위해서 전출을 건의하고서 그곳으로 떠났다.

'나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 대위시절1  (0) 2007.09.04
15. 중위시절4  (0) 2007.07.17
13. 중위시절2  (0) 2007.07.10
12. 중위시절1  (0) 2007.07.10
11. 소위시절4  (0) 2007.07.10